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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사원 조장희의 꿈
게시물ID : sisa_5317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작은창문
추천 : 0
조회수 : 41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6/20 13:18:43
[한겨레21] [연속 기고] 삼성과 나 ② 삼성 내 최초 민주노조 설립과 동시에 해고

“힘들지만 이 벽 못 넘으면 ‘삼성에서 노조 하면 실패한다’ 사례로 남잖아요”

그는 늘 태연하고 밝았다. ‘S그룹 노사전략’ 문건, 정확히 말하자면 노조 파괴를 위한 갖은 작전과 술수가 담긴 무시무시한 문서에서 ‘MJ(문제)사원’이라 지칭되고, 이름까지 언급되며 미행, 도청, 회유와 협박 등 갖은 작전의 대상이었는데도 말이다. “고립시키고 고사시킨다”는 문구를 보고 누군들 섬뜩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상대가 다름 아닌 ‘삼성’이라니. “삼성은 나를 말려죽이려고 하는데 나는 점점 몸이 불어난다. 삼성의 작전이 먹히지 않는다는 근거 아니겠느냐”며 너스레를 떠는 그. 그는 삼성그룹 내에서 맨 처음 민주노조를 설립한 에버랜드 노동조합의 조장희다.

3표 차로 극적 당선 그리고 3선

경찰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 3개월만 일하려고 들어간 에버랜드였다. 신체검사에서 예상치 못하게 ‘색약’ 때문에 떨어지면서 눌러앉게 된 에버랜드에서, 예상치 못했던 인생이 시작되었다. 원래는 싫은 소리를 잘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불합리한 일이 넘쳐나니 얘기를 안 할 수 없었단다. 회사에서는 그런 그를 여러 부서로 뺑뺑이 돌렸다.

그러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맞았다. 매일 아침 인사팀이 각 부서로 전화를 했다. 불려가는 사람은 해고 통보를 받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이, 꿈을 위해 열심히 일하던 이. 색색깔의 삶을 꾸려가던 동료들의 울음소리를 매일 아침 들어야 했다. 노동부에 문의해 “해고 통보를 거부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다음부터 인사팀 전화를 받고 내려가는 사람에게 “사인하지 말라”고 알려줬다. 자신의 말대로 했던 형은 과거의 업무상 실수, 시말서 등을 들이대는 인사팀 직원에게 6시간 동안 시달렸다. 그때 처음으로 노동법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노사협의회를 맡아야겠다, 그러자면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2000년 용인야간대학에 입학해 2년 동안 노동법 공부를 했다. 그가 노 쪽 대표로 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팀을 비롯해 회사의 여러 사람들이 전화해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이런 방해 공작이 오히려 동료들의 반발심을 자극했다. “조장희가 하면 왜 안 돼?” 결국 3표 차로 극적으로 당선되었다.

중요한 사안은 하나도 논의하지 않고, 회의 시간은 대충 때운 뒤 술이나 먹으려 했던 사 쪽 대표들에게 그는 골치 아픈 상대였다. 직원들에게 필요한 것을 고민해 100개가 넘는 안건을 제출했다. 법 위반 사항도 많았기 때문에 금방금방 성과가 나왔다. 직원들의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그 덕분에 3선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안건들은 노사협의회에서 결정할 수 없었다. 모든 중요한 사항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의 컨트롤이 작용하기 때문이었으리라.

노사협의회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길.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노동조합밖에 없었다. 그를 믿어준 동료들과 함께 그 미지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삼성에서 노조를 ‘설립’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과거 사례를 검토하며 납치, 미행, 징계, 협박, 그리고 복수노조 허용 이후에 예상되는 ‘알박기 노조’ 설립에 대한 대응책을 최대한 치밀하게 세웠다. 그 덕분일까, 아니면 동물 같은 감각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그에게 ‘속내’를 가지고 접근했던 수많은 사 쪽 사람들을 꿰뚫어볼 만큼 이골이 나서였을까. 노조 설립을 준비하던 중 그를 징계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계획을 앞당겨 2011년 7월12일을 삼성그룹 내 최초의 민주노조 설립총회일로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7월9일, 징계위원회 통지서가 날아왔다. 7월18일, 그렇게 기다리던 노조 설립 필증이 나옴과 거의 동시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서 그를 막으려 했던 삼성은 결국 그를 추방했다.

‘무노조 삼성’이 해악인 이유

해고 3년. 해고무효소송에서는 승승장구해왔지만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삶의 조건들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고 파괴돼갔다. S그룹 노사전략 문건에 나온 ‘경제적 압박을 가중시켜라’라는 문구처럼, 회사는 그를 궁지로 내몰았다. 집, 생계 문제에 이어 최근에는 아버지의 건강마저 급격하게 나빠지면서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그. “내가 힘든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가족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때는….”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며, 늘 밝고 긍정적이던 그의 마음에 시퍼렇게 들어가는 멍을 헤아려보게 된다.

“후회는 없으세요?” 조심스레 던진 물음에, 그의 답변을 기다리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흔히 말하는 ‘편안하고 행복한 삶’과는 너무 거리가 멀지 않느냐는 세간의 시선과 평가에 상처 입은 적이 수없이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힘들죠. 하지만 이 벽을 제가 넘지 못하면, ‘삼성에서 노조 하면 결국 실패한다’는 사례로 남을 거잖아요. 이 벽을 넘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무노조 삼성이 노동자에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문제제기를 틀어막아버리는 것’. 업무능력보다는 ‘삼성에 대한 충성심’이 모든 평가의 기준이 되는 회사 분위기는 개개인의 개성과 판단력을 짓밟아버린다. 겉으로 웃으며 지내던 동료도 어느 순간 ‘적’이 돼버리는 일터.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일터에서 ‘내 생각’은 싹 지워버리고 ‘삼성의 지시’만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내 삶의 주인은 나여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 권리마저 빼앗긴 채 길들여지는 것. 무노조 삼성이 개인들의 삶에 해를 끼치는 이유다.

삼성을 너무 잘 아는 그는, 자신이 삼성이 주목하고 있는 ‘사례’라는 것을 항상 생각한다. 실은 삼성만 그런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사례’를 중시한다. 앞선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나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얻기도, ‘역시 안 되겠다’는 절망으로 결론짓기도 한다. 그는 요즘 자신의 뒤를 이어 삼성에서 노조를 만든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투쟁에 온통 마음이 가 있다. 노동조합을 인정하라며 목숨을 바친 고 최종범·염호석을 떠올리면 ‘더 이상의 죽음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서, 모든 사람이 함께 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그. 자신의 꿈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의 꿈에도 그러하다.

삼성의 ‘사례’,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

그를 조금 더 알게 되자, 그는 결코 자신과 동료들의 꿈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늘 그래왔듯 함께 그 꿈에 다가설 사람들을 찾고, 그 사람들을 인생의 가장 소중한 보물로 여기면서. 뚜벅뚜벅 걸어갈 그를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고 싶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6&aid=000003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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