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첫사랑 그 사람은
첫사랑 그 사람은
입맞춘 다음엔
고개를 못 들었네
나도 딴 곳으로 보고 있었네
비단올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미역 냄새를 흘리고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파라
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
오, 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
골짜기에서 흘려 보내는
실개천을 보아라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울고 있었네
강은교, 빗방울 하나가
무엇인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천상병, 푸른 것만이 아니다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 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 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듯이 안 보일듯이 흐르는
한 떨기 구름
삼월 사월 그리고 오월의 신록
어디서 와서 달은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던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김광섭, 비 개인 여름 아침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정채운, 꽁치를 바르며
발열하는 팬 위에
설익은 사랑이 지글거리네
백년 느티나무 같이 단풍 들자던
그 여름 생생한 맹세들이
노릇노릇 빈혈을 앓기 시작하네
몸 뒤척이네
날 선 바늘 같은 삶의 발자욱들
부드럽게 재우라, 옆구리 달구는
화기서린 불꽃의 애정어린 직언
내 등 시리다고
너의 속 뒤집고 말았네
여린 가슴 속, 가시 하나 박고 말았네
속살 헤집어 가시를 바르네
내 가슴에 종주먹질, 성토에 성토를 더해도
비릿한 너의 아픔 발라지지 않고
창문 너머 시름시름
황달을 앓는 은행나무 한 그루
뼈를 세워 콕콕
내 정수리 회한을 바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