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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 어느 분이 언급하신 백제의 위치에 관한 중국측 기록들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65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7/4
조회수 : 1088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4/06/21 21:08:17
송서는 언급했으니 넘어가고

양서(梁書)

백제란 그 조상은 동이다. 동이는 세 한국이 있으니 첫째 한국이요, 둘째 진한이요, 세째는 변한이다.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가 있고, 마한은 오십사국이나 되었다. 그 중에 큰 나라는 인가가 만여 호나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가 되어 모두 합치면 도합 십여만 호가 되니 백제란 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뒤에 와서 점점 강대해져서 모든 조그만 나라들을 합쳤다.그 나라는 본래 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해 차지하게 되자 백제도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 땅을 점령해서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진나라 태원년중에 왕 수와 의희년중에 왕 여영과 송나라 원가년중에 왕 여자가 모두 백성들을 보내서 바쳤다. 여자가 죽자 그 아들 경을 세웠고, 또 경이 죽자 그 아들 모도를 세웠으며, 도가 죽자 그 아들 모태를 세웠다.제나라 영명년중에 모태로 대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을 삼았다. 

천감 원년에 다시 모태에게 정동장군의 호를 주었더니 이윽고 고구려에게 파멸되어 여러 해 동안 세력이 쇠약했다. 그리하여 남한 땅으로 옮겨 앉았다.보통 이년에 왕 여용이 비로소 다시 사신을 보내서 표문을 올려 신이라 일컬었는데, 여러 번 구려에게 파멸당했다가 이제 와서 비로소 함께 좋게 지내기 시작했고, 백제는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

>천감 원년이면 502년이고 백제의 기록상 무령왕이 반대파인 백가를 토벌하고 고구려의 강냉이(...)를 털었던 시기입니다, 결과적으로 뭐가 뭔지도 모르고 대강 그렇다 하던데? 수준인 것을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의 우산 아래에서 강성해졌다는 내용을 볼때 프로파간다적인 측면에 들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이러한 것도 그러하지만 사족을 달자면 애시당초 요서를 향유했던 나라들에서는 요서 경략설을 찾아볼수 없다는 점도 문제가 되겠지요.

간단하게 말해서 이러한 요서 경략설의 시기를 종합해 보면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것은 고국양왕과 광개토왕 시대의 일이며 이 시기의 백제의 왕들은 진사왕과 아신왕인데...음..간단하게 말해서 백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대규모 군사 원정을 감행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고구려에게 한수 이북의 10성과 관미성을 빼앗기고 밀려나다 의문사 당한 일본서기에 의하면 아신왕에 의해 제거당한 진사왕은 그렇다 쳐도 아신왕 시기는 고구려에 밀리고 밀려서 백제왕이 스스로 신하를 자칭했었으며 볼모로 아우와 신하를 스스로 보냈으며 나라가 무너져 내리는 꼴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엑소더스를 떠나던 시기인데요? 뭐 답이 없는 이야기이지요.

남사(南史)

백제는 그 조상은 동이였다. 세 한국이 있었으니 즉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 세째는 변한이다.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이고, 마한은 오십사개국이나 있었다. 이들 중에 큰 나라는 인구가 만여 호나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밖에 되지 않아서 도합 십여만 호나 되었으니 백제는 그 중의 하나였다. 그 뒤에 나라가 점점 강대해져서 여러 조그만 나라들을 통합했다.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천여 리 밖에 있었다.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해서 차지하고 백제도 역시 요서를 점령해 가졌었다. 이리하여 진나라는 두 군의 땅을 평정하고 스스로 여기에 백제군을 두었었다.진나라 의희 십이년에 백제왕 여영으로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을 삼았다. 송나라 무제가 즉위하자 진동대장군의 호를 올렸다.

소제 경평 이년에 여영이 장사 장위를 보내서 대궐에 나가 조공을 바치고, 원가 이년에 문제가 겸알자 여구은자와 겸부알자 등에게 조서를 내려 가서 그들을 위로하게 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해마다 사신을 보내서 방물을 갖다 바쳤다.칠년에 백제왕 여비가 다시 공직을 닦아 여영의 작호를 제수했다. 이십칠년에 여비가 글을 올려 방물을 바치고, 사가대사 풍야부서하태수가 글을 올려 역림식점과 요궁을 요구하자 문제는 이를 모두 죽였다.

여비가 죽자 아들 경이 대신 왕위에 서서, 효무 대명 원년에 사신을 보내서 벼슬을 제수해 줄 것을 요구하자 조서를 내려 이를 허락했다. 이년에 경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 등 십일명이 충성되고 부지런하니 모두 벼슬을 올려 주십시오]하고 청하자, 이에 조서를 내려 모두 승진시켜 주었다.명제 태시 칠년에 또 사신을 보내서 물건을 바쳤다. 경이 죽자 아들 모도가 서고, 또 모도가 죽자 아들 모대가 서니, 제나라 영명년중에 그에게 대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을 삼았다.

양나라 천감 원년에 그에게 정동장군의 호를 주었더니 이내 고구려에게 침입당해서 여러 해 동안 국력이 쇠약해져서 남한 땅으로 옮겨 살았다.

>양사를 고스란히 베껴온 기록입니다, 말할것도 없지요.

통전(通典)

처음 백여가구가 바다를 건너면서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진나라때 이미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을 경략하였으니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이다, 진나라 이후로 여러 제국을 병탄하고 마한의 옛 땅을 점령하였다, 그 나라는 동서로 4백리요 남북으로 9백리이며, 북으로는 고구려를 접하고 있고, 남으로는 신라를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경계지어 있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세 개의 큰 섬이 있다.

> 제대로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냥 그렇다 더라 수준이지요, 정작 진나라 사이전에는 백제 고구려의 이야기는 없고 평주를 이야기 할때 한나라의 세력이 요동에 드날리자, 동이의 아홉 종족이 모두 그에게 복종하고 섬겼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니 이 기록에 의하자면 고구려와 고조선은 한나라의 군현입니다.

진나라 사이전

진나라에서 세워 군을 삼았고, 한나라 광무 때에 요동을 청주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도로 유주에 소속시켰다. 이 요동국은 현이 여덟이고, 호수는 오천사백이 된다. 여덟 현은 다음과 같다.양평 - 동이교위가 있는 곳이다.문.거취.낙취.안평.서안평.신창.역성.낙랑군 

한나라 때 설치했다. 통솔하는 현이 여섯이고, 호수는 삼천칠백이다.여섯 현은 아래와 같다.조선 - 주나라에서 기자를 봉한 곳.둔유.혼미.수성 - 진나라 때 만리장성을 쌓을 때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음.누방.사망.현도군

한나라 때 설치했다. 통솔하는 현이 셋이 있고, 호수는 삼천이백이 있다. 세 현은 다음과 같다.고구려.망평.고현.대방군

그리고 통전이 기술된 당시의 기록인 당사 동이전 백제 편에 뭐라고 되어 있나 하면

당사 동이전 백제편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서울 동쪽 육천 리 되는 곳에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있다. 서쪽 경계는 월주요 남쪽은 왜국이요 북쪽은 고려인데, 이곳들은 모두 바다를 건너야 간다. 그 동쪽은 신라이다.

>역시 정확하게 어떤 곳인지 파악이 안되어 있습니다,

예컨데 입맛에 맞는데로 짜맞추는 결과는 이 정도일 따름입니다, 그러한 기록을 신뢰하려면 고조선과 고구려도 한나라의 군 현 일따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더 나아가 동북 공정에 의한 역사 침탈 문제도 수긍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하지 못하는 까닭은 간단한게 사료 하나로 역사를 판가름할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고 기초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또한 사료 뿐만 아니라 고고학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접근이 요구되고 있으며 그럴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사료 한 두개 입맛에 맞는 부분만 짜집어 낸 주장으로 위치를 비정하고 역사를 논한다는 것은 가방끈이 짧은 제가 보기에도 스스로 역사를 연구한다, 이야기 한다 하기는 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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