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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黎) 왕조의 성군 - 여(黎) 성종(聖宗)
게시물ID : history_165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뭐이어드래?
추천 : 11
조회수 : 182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6/23 01: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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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黎) 태조(太祖) 여리(黎利 : 베트남어로는 레 러이)
 
15세기 무렵 베트남은 명(明)의 지배에 항거하여 오랜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하고 나라를 건국하는데 바로 여(黎) 왕조입니다. 이 여 왕조의 태조는 농민출신의 여리(黎利)라는 인물로, 여 왕조는 태조 여리 이래로 뒤이은 태종(太宗) 여원룡, 인종(仁宗) 여방기 치세에 점차 발전과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고 5대째인 성종(聖宗) 여사성(黎思誠)의 대에 이르러 최전성기를 이룩하게 됩니다. 물론 성종의 대에 이르기까지 도중에 여의민이라는 황족이 쿠데타를 일으켜 3대 황제 인종을 죽이고 4대 황제로 군림하는 불상사가 있긴 했습니다만 무시합시다.
 
 
훗날의 성종이 되는 여사성은 2대 황제 태종의 넷째 아들로서 서열상으로는 제위에 오를 가능성은 희박했습니다만 태종의 장남이자 앞서 말씀드린 제4대 황제 폐제(廢帝) 여의민이 역시 태종의 아들이자 여의민에게는 이복동생이 되는 3대 황제 인종을 쿠데타로 살해하고 즉위, 무자비한 황제중심집권제를 실시하는 바람에 이에 반발한 개국공신들의 반정으로 그 자신 역시 살해당한지라 위로 형들이 죄다 지들끼리의 내란으로 죽어나간 관계로 자연스레 황위 계승권은 넷째 아들인 성종 여사성에게로 넘어올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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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黎) 성종(聖宗) 여사성 (베트남어로는 Le Thanh Tong : 레 타인 똥)
 
베트남사에서는 우리나라 조선의 세종에 버금가는 수준의 성군입니다. 
 
 
이런 연유로 황위에 오른 성종은 정치, 경제, 문화 전반부에 걸쳐 탁월한 국정수행을 보여줍니다. 먼저 성종이 치세 초기 부터 당면해있던 과제는 바로 조부인 태조를 도와 명을 몰아내고 왕조를 개창하는데에 공헌한 청북(淸北 : 베트남어로는 타인 호아)일대를 기반으로 하는 공신세력의 비대화였습니다.
 
우선 태조부터가 미천한 농민 출신이었기에 명과의 투쟁 과정에서 당연히 세력의 조력자이자 힘이 되어줄 호족가문들이 필요했고 그 대상이 바로 청북의 호족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태조가 여 왕조를 개창하자 청북의 호족세력들 역시 개국공신들로서 그 지위를 인정받았던 것이고 나중에는 폐제 여의민을 반정으로 죽일만큼 권력의 정점을 찍게 됩니다.
 
이렇듯 신권정치가 판을 치는 현 상황을 두고 개탄스러워 마지 않던 성종은 이 개국공신들과 대신들을 찍어누르고자 유교를 도입하게 됩니다. 그 수단으로 왜 유교를 끌어들였는가에 대해서는 역게의 고수님들께서도 익히 아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관계로 굳이 따로 언급은 않겠습니다.
 
 
유교의 보급과 장려정책에 따라 성종은 과거제를 실시하고 6부(六部)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황제의 직속기구로 두어 공신세력을 제어하는 한편, 또한 중국의 명나라를 모방하여 전국을 13개 도(道)로 나누고 지방에는 각자 행정, 감찰, 치안을 담당하는 승사, 헌사, 도사라는 기구를 두되 별개의 기구로 분류하게 함으로서 중앙집권제를 확립시킵니다.
 
이러한 정책들 외에도 성종이 치세동안 실시한 정치개혁들을 비롯한 경제, 문화 분야에 걸친 치적들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만 기본 정책이념은 '지방의 호족들을 조지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한다' 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촌락의 지도자를 해당 지역의 백성들이 직접 뽑게하는 일종의 선거제부터 호적, 토지 조사나 베트남 최고의 성문법이자 황제에 대한 충성과 준법을 강조하는 <여조형률(黎朝刑律)>과 당시 쓰이던 연호인 홍덕(洪德)에서 이름을 따 중국의 수-당 왕조의 법률을 기본으로 하는 홍덕법전을 치세 동안 편찬, 문묘를 건립하는 등 베트남을 철저한 유교국가이자 오늘날 베트남의 근간을 이루는 유교 문화권으로 편입시키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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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이 성종의 치세기에 베트남의 대표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가 편찬되었고 예전부터 쓰이던 쯔놈문자가 체계화되어 문화적 측면에서의 발전 역시 정치에서의 치적 못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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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내치에서도 치적을 거둔 성종은 대외정벌에도 눈을 돌려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었는데요, 특히 오늘날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참파 같은 경우는 예전부터 베트남과 아웅다웅 하는 숙적이었고 특히 성종의 치세 초기인 1470년 경에 참파의 왕 반 라체트안이 여 왕조의 남부를 침공해오자 이에 대한 복수로 이듬해에 대군을 이끌고 참파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반 체트안을 생포하고 참파의 수도 비자야는 아예 거덜내버려 사실상 참파를 정복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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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그동안 여 왕조에 입공해오며 서쪽 변경의 속주로 있던 분만(盆蠻)이란 곳에 살던 타이계의 라오족이 속주에 파견된 여 왕조 관리들에 항거하여 관리들을 살해하고 라오스의 란창왕국과 연합하여 반기를 드는 사건이 일어나자 때마침 베트남 서쪽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던 성종은 이를 구실로 참파정벌로부터 약 10여년 후인 1479년, 정벌에 나서 반란을 일으킨 라오족은 물론 연합했던 란쌍왕국의 수도 루앙프라방까지 함락시킴으로서 란창 왕국을 비롯한 인근 소수민족들로부터 조공을 받아 참파를 멸한 남진으로의 성공에 이어 서진에서도 상당한 전과를 올립니다.  
 
 
이와 같이 내외치에서 뛰어난 업적을 거둔 성종 대의 여 왕조는 15세기 경 동남아시아의 명실명백한 최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으나 위에서 말씀드린 청북 일대를 기반으로 하는 공신세력과의 대결은 이후 여 왕조의 고질적이자 잠재적인 문제로 여전히 남아 있었고 여기서 파생한 권신들 간의 권력다툼과 맞물려 공교롭게도 성종 이후로 등극한 황제들이 줄줄이 요절해버리는 바람에 베트남은 내전으로 치닫고 성종 사후, 여 왕조는 급격한 쇠락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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