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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게시판의 >빈말<
게시물ID : phil_82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노문도
추천 : 2
조회수 : 32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2/16 00:43:26
 우선 글을 쓰기전에 밝혀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지식적인 것을 뽐내며 잘난척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지적인 헤게모니로 여기 게시판 사람들을 깔보거나 낮잡아 보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글을 쓰면서 또한 의도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바이지만, >빈말<은 하이데거 용어로, 절대로 비하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범하고 있는(범하고 있다는 표현 자체도 굉장히 이상하지만) 우리들의 언표 양식의 비근한 양태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철학게시판에 떠도는 >빈말< 에 대한 비판을 하고 싶습니다.

첫번째 비판, 철학 어디까지 읽어 보았느냐?
 제가 한 글을 올린적이 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즉, 철학서적에 대한 철학게시판 분들의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던 이유중 하나가 철학게시판 분들은 굉장히 많은것들을 사색하시고 논하시고 있는것 같긴한데 사상적 기반이 굉장히 빈약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철학에 관심있어 하는 분들에게 권하는 책들이 대부분 철학 입문서이고, 제 주관적 입장이지만 철학을 굉장히 '상품화' 한 책입니다.(물론 그런 상품화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비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제 감정적적으로는 굉장히 보기 안좋았습니다.)

 철학에서의 사색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철학은 어디까지나 지혜를 사랑하는 것에 근본을 둡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 그리고 사랑에 초점을 둬서 철학이라는 말 뜻을 봅니다. 그러나 비근해서 얘기하자면 지금 인간 개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생각은 2500년 전에 다 나왔다고 봐도 죄송하지만 무방합니다. 전부다 고전철학에서 얘기가 되었던 내용입니다. "내 생각은 아니겠지"라는 오만방자한 생각은 철학서를 접하다 보면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도발적인 멘트를 꺼낸 이유는 이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철학은 내 자신을 내려 놓음으로 부터 시작한다." 입니다. 즉 나와 다른사람, 그리고 쇼펜하워의 표현에 의하면 위대한 양서(쇼펜하워는 양서와 악서로 책을 나누는데 우리에게 까지 지금 내려오는 인문학 서적들을 양서, 그리고 베스트셀러나 그 시대도 풍미하지 못할 책들은 아무리 읽어도 해가 되는 악서라고 얘기합니다.)를 읽고 접하는 것이 인문학도로써 하나의 가져야 될 사명감 입니다. 즉, 이런 난잡한 글에 결론을 내자면 이것입니다. 자신이 위대한 양서를 읽어보지 않고, "그것은 어려울 것이야"라는 피해석된 해서을 갖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석된 글을 양도해 버리는 것은 굉장히 그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무책임한 일이며, 그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습니다. 그저 책임을 묻고 싶을땐 묻고 싶은 이가 없어지는 >그들(세인)< 속으로 책임이 전가되어 버리죠. 이렇게 책임을 전가 시켜버리는 말들이 >빈말<입니다. 즉 빈말은 인간의 평균적인 일상성 속에서 나타나는 비근한 언표양식이지만, 그 사람을 항상 >퇴락<시키면서 퇴락된 >세계<만을 개시하게 만들고 피해석된 세계로 내던져버리면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인간의 언표양식입니다.

두번째 비판, 사상적 체계는 보지 못하고, >결론<만 비판하는 모습
 위에 글의 상보적인 비판입니다.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사상적 체계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서양철학사, 또는 철학을 상품화된 책으로 사상을 접했을 경우 체계는 저자로 인해 피해석된 체계이고, 그 피해석된 체계마저 굉장히 빈약해 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론에 주목하게 되죠. 그리고 비약해서 표한하자면 칸트는 물자체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바보가 되는겁니다. 얼마전에 올라왔던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에 "기댄다"

 굉장히 >빈말<을 대표하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사상가들의 무엇을 보고 "기댄다"라는 표현이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대상을 두고 저것은 대상이 아니라 "표상"이라고 얘기합니다. 표상은 대상이 아니라 내가 인식할 수 있는 현상의 표상이고 현상하지 못하는 어떠한 것(물자체)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 라고 질문을 던지며 선험적 감성론을 얘기합니다. 실례로 강아지는 색맹입니다. 강아지에게 있어서 대상은 인간의 "색"이 제외된 현상입니다. 강아지에게 "색" 은 물자체 입니다. 그렇다고 "색"이 없느냐? 강아지의 현상과 강아지의 인식조건에는 없는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에게는 분명히 있습니다. 칸트는 얘기합니다. "신, 우주, 영혼에 대하여 우리의 인식조건 바깥에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것이 시대를 뒤바꾼 하나의 명제입니다. 형이상학에 기대는 것 같습니까? 이러한 사상이 쇼펜하워의 의지의 객관화(신체를 움직이는 '의지'는 살고싶어하는 욕망, 그리고 욕망의 근원은 알 수 없고 우리의 인식조건에 없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것은 아니다.)를 낳습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이러한 의지는 "실존" 세계내에서는 "존재의미"로 파악되고 우리는 존재 의미를 알기 위해서 "죽음으로의 선구"를 결의해야 함을 말합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어려운 내용은 다 간추리고 굉장히 그 철학자들의 주요 사상들만 짚으면서 실존까지 넘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제일 싫어하는 방식의 글입니다. 그러나 쇼펜하워의 의지, 또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미를 파악하기위해 죽음으로의 선구(즉 너가 죽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가능성, 위기탈출 넘버원 처럼 어떠한 상황에도 내게 주어지는 죽음의 순간들을 항상 외면하지 말고 나는 언제나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지금 순간순간 나는 죽을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실존하는 것)가 형이상학에 기대는 것처럼 보입니까? 오히려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한 처절한 고민을 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찾고자 죽도록 노력하면서 세인들을 관찰하고 사랑했던 모습이 조금은 보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을 "기대는 것이 아니냐?"라고 묻는 질문은 아무런 존재의미도 갖지 않는 >호기심<의 >빈말<입니다. 즉 퇴락된 인간의 일상적인 쉽게 말해 자신의 생각과 노력은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는 >그들<의 표현이지요. 어떠한 >각자성<도 띄지않아 보입니다.

 내가 사상가들의 책을 읽고 비판하던지 동조하던지 합시다. 사상가를 비판한 누군가의 글을 읽고 비판하거나, 사상가에 대한 떠도는 말에 대해서 툭툭 뱉는것은 죄송하지만 철학하려는 자세가 되어보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체계는 눈곱만치도 관심없고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여고생들의 호박씨까기와 다를게 없어 보입니다.

 철학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는 사람들의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으려면 타인들의 피해석된 의미에 주안점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바로 나 자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권하고 싶은 바는 "순수이성비판은 어렵다, 존재와 시간은 어렵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어렵다"와 같은 >빈말<들을 하지 말고 휩쓸리지도 않으며 일단 읽고 어려운지 어렵지 않은지를 파악하는 것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세인<들에게서 벗어나 진정한 "철학함"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글이 매우 난잡합니다. 이점은 글재주가 없는 제 탓입니다. 그러나 글이 불명확하다고 해서 제가 일부러 그렇게 쓴것은 아닌것을 밝혀봅니다. 저는 앞서 말한것과 같이 잘난척 하고 싶은것도 아니고, 그저 제가 생각하는 "철학함"의 자세를 얘기하고 싶었는데 글이 매우 난잡해 진것 같습니다. 이곳에 계신 모두가 >세인<의 말에 휩쓸려 >빈말<의 바다속에 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저의 바램이 이 글을 읽고 단 한사람에게 남겨진다면 저는 매우 기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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