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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 운동 (7)
게시물ID : history_165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11/4
조회수 : 1001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4/06/23 11:55:49
지난 글에서 배경을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경위를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형평사의 창립경위는 상세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이 일제 관헌이 약술해 놓은 것을 형평사 창립경위로 이해되고 있지요.

경남 진주군 진주면 대안동에 이학찬李學贊이라는 백정출신 자산가가 있었다. 그는 자제를 교육시키고자 여러 차례 공·사립학교에 입학시키려 노력했으나 백정이라는 구실로 거절당하거나 혹 일단 허가를 받아도 백정자제임이 알려지면 주위의 배척이나 압력을 받아 중도에 퇴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사회의 몰이해를 원망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본 관서지방에서 수평운동水平運動 이 활발하다는 소문을 들은 이학찬은 친구인 일반인 강상호 註2)·신현수조선일보 진주지국장·천석구진주자작농회 간부 등에게 백정의 고충을 호소하여 이들의 찬동을 얻어 이들 및 같은 백정 출신인으로 일본 명치대학 중퇴자인 장지필張志弼 등과 함께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백정의 신분해방 운동단체인 ‘조선형평사’를 조직하게 되었다.

형평청년전위동맹衡平靑年前衛同盟 사건의 재판과정에서도 피고인들은 형평사의 창립과정에 대해 위의 내용과 대체로 같은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최초로 창립을 주장한 인물이 이학찬 대신에 강상호라는 점이 다를 뿐이지요.

이외에도 『경상남도지』 상권에 수록되어 있는 김용기金龍基의 「형평운동의 발전」에서는 1959년 당시 67세였던 신현수로부터 청취를 하여 강상호에게서 확인한 것이라 하면서 창립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이 역시 처음형평사 창립을 논의했던 인물과 그 신분에서 차이가 나고 있을 뿐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양반 자제 신현수는 민족해방의 지름길은 민중의 계몽·국민교육에 있다고 생각하여 진주에서 유치원과 보통학교를 설립하려고 했다. 그는 백정 가운데 부자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기부금 모금을 위해 1922년 겨울 대표자인 강상호를 방문하였다.

신·강 양인은 사회문제를 비롯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주제로 서로 토론하여 계몽과 단결의 필요를 확인했다. 특히 당시 40만 명에 가까운 백정이 천시당하고 있음은 철저히 시정되어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두 사람은 민족전선의 급선무는 백정계급의 해방이 그 선결책이라는 결론하에 결사結社와 명칭을 생각했다. 

그때 신현수가 일본의 수평운동水平運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수평보다 한층 의미깊은, 저울같이 공정하고 평등을 주장한다는 의미로 형평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제안하자 강상호도 찬동했다. 이리하여 1923년 3월 하순부터 그 준비는 급속도로 진척되었으며, 강상호의 추천으로 장지필 등도 가담하여 4월 15일에 이들 등 수명이 준비회를 열어 취지 목적을 결정하고 4월 25일에 결성대회를 개최하여 신현수가 회장, 강상호가 부회장, 장지필이 총무에 선출되었으며,

(一) 일치단결하여 차별대우와 그 유풍遺風을 타파한다.
(二) 신분을 공정히 하여 명실공히 동등한 국민인 것을 표시하도록 관계당국에 요청하여 시정할 것.
(三) 이천만 동포가 결속하여 백의민족의 해방을 쟁취할 것 등을 결의했다는 것이다.

032_004.jpg
(진주에서 처음으로 발기한 형평사)

이러한 형평사의 창립과정에 관한 내용을 통해 보면, 먼저 형평사는 백정자산가와 선진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앞의 기록들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학찬은 백정자산가, 강상호는 일반인으로 초대 동아일보 진주지국장이었으며, 신현수도 일반인으로 당시 조선일보 진주지국장이었습니다. 또한 천석구는 일반인으로 진주자작농회 간부였고, 장지필은 백정으로 일본 명치대학 중퇴의 학력을 가진 자였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주고 있지요.

이것은 초기 노동·농민·사회운동은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노동자·농민과 함께 선진지식인이었는데 형평운동도 마찬가지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형평사는 백정에 대한 교육 차별 문제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조직되었습니다. 당시 백정의 교육에서의 차별실태의 한 예로 다음과 같은 강원도 형평사원의 수기가 있습니다.

내가 10살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김이라는 양반에게 수십 원을 건네주고 나를 △△학교에 입학시켜 주었다. 백정의 아들이 일반인 속에 섞이어 공부하게 된 것은 △△학교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하늘을 오른 기분이었다. 이제 겨우 백정의 생활에서 빠져나와 인간생활로 들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생도들은 나를 가리켜 백정이라 욕하며 주먹을 쳐들고 … 수백 명의 생도에게 매일 수 시간씩 입에 담을 수 없는 학대와 모욕을 받는 일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3·1운동 이후 1920년을 경계로 공립보통학교 입학생수는 급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15년 이래 1919년까지 3만여 명이었던 것이, 1920년에는 6만여 명, 1921년에는 8만 5천여 명, 1922년에는 12만 5천여 명, 1923년에는 13만 7천여 명으로 급증하였고 이렇게 교육열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백정도 자제들의 보통학교 입학을 추진하거나, 나아가서는 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들의 교육열은 일반인 이상으로 강하였지만 이러한 백정의 교육열은 일반사회의 차별로 좌절되기가 보통이었고, 자제교육을 위해 ‘예수교’에 귀의할 정도였습니다. 

즉 백정에 대한 교육차별, 이것이 형평사 창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자명한 일이었지요, 

당시 백정의 교육수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1924년에 조사된 것으로 생각되는 <표 1>은 자료의 정확성과 보편성과 관련하여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백정의 교육수준이 일반인들보다 매우 낮은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고등교육을 받은 백정의 비율은 아주 낮았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표 9〉백정의 교육실태
교육정도/도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남 평북 강원 함남 함북
보 
통 
학 
1910년 
까지
재학중 78 38 92 69 64 88 87 40 23 26 50 - 7 666
퇴학 5 2 23 24 10 16 3 20 6 6 4 1 3 122
1920년 
까지
재학중 73 64 138 76 87 127 120 61 16 19 54 2 10 847
퇴학 16 12 17 45 27 21 11 27 6 9 8 - 2 201
졸업 20 7 8 12 17 8 18 20 - 2 2 1 2 115
1921년 
까지
재학중 6 - 42 - 1 1 1 5 - - - - 1 57
퇴학 9 3 18 15 12 7 12 37 2 3 8 - 6 132
졸업 19 1 25 2 1 2 29 4 - - 12 - 6 101
  226 126 313 243 219 270 281 214 53 65 138 4 37  
고 
등 
보 
통 
학 
1910년 
까지
재학중 - - - - 3 - 1 - - - - - - 4
퇴학 - - - - 2 - - - - - - - - 2
1920년 
까지
재학중 4 1 4 - 10 2 2 - 1 - - - - 26
퇴학 1 - 1 1 7 - 1 - 1 - - - - 12
졸업 1 - - - - - - - - - - - - 1
1921년 
까지
재학중 1 - - 3 - 2 - - - - 1 - - 7
퇴학 - 2 - 11 - - 4 - - - - - - 17
졸업 4 1 - 4 - 1 4 1 - - 1 - - 16
  11 4 5 19 22 5 12 1 2 0 2 0 0  
※ 전문학교 이상의 학교에 재학 중이거나 중도 퇴학한 사람도 포함함(전라북도에 1명, 전라 
남도에 1명) ; 洪奭鉉, 「白丁の分布」, 『朝鮮白丁調査錄』, 朝鮮總督府警務局, 1925.

보통학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자(재학생·중도퇴학·졸업생 포함)는 1910년에 788명, 1920년에 1,163명, 1921년에 290명이었으며, 고등보통학교 수준의 교육을 받은 자의 수는 1910년에 5명, 1920년에 39명,1921년에 40명이었고, 전문학교 이상은 2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전체 백정 인구라든가 당시 일반인 사회의 교육 정도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통상적으로 백정의 인구를 40만 명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인식에 기초하여, 공립보통학교 입학생수가 1920년에는 6만여 명, 1921년에는 8만 5천여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백정의 교육수준은 매우 낮은 것이었고, 특히 고등교육 수준은 아주 낮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례라 할수 있겠지요.

그리하여 교육을 통해서도 차별구조를 타파하려는 백정의 열망이 당대를 풍미하던 진보적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던 지식인들과 연계 속에서 그들의 지지와 지원을 얻게 됨으로써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신분해방운동 단체로서 형평사가 결성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석>

>수평운동이란 일본에서 일어난 특수부락민의 해방운동으로 일본에서의 특수부락민은 穢多·屠者 등의 모욕적인 말로 불리워져 오랫동안 사회적 차별을 받아오다가 1871년 “爾今 에다의 칭호를 폐한다”라는 포고로서 법제적으로 해방되었습니다만 사회적 차별관습은 여전하여 이들은 ‘특수부락민’, ‘신평민’ 등의 모욕적인 칭호로 사회적 천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1922년 3월 경도에서 차별대우 철폐와 인간해방을 목표로, 전국 각 지방의 부락민 4,000여 명이 모여 全國水平社를 창립하였는데 전국수평사의 강령은 

① 우리 특수부락민은 부락민 자신의 행동에 의해 절대의 해방을 기한다. 
② 우리들 부락민은 경제의 자유와 직업의 자유를 사회에 요구하고 그럼으로써 그 획득을 기한다. 
③ 우리들은 인간성의 원리에 각성하고 인류 최고의 완성을 향하여 돌진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수평사는 창립 1년경에 250여 개의 지방수평사가 조직되는 발전을 하였으나, 1923년을 기점으로 운동노선을 둘러싸고 내부 분열을 하게 되어. 이후 전국수평사 무산자동맹·전국수평사 자유청년연맹·勞動農民民衆支持聯盟·해방연맹·일본수평사 등의 여러 파벌이 등장하여 세력다툼을 치열하게 전개하였습니다. 

1931년에 이르러서는 전국수평사의 해산문제가 제창되고 이를 계기로 내부 동요가 더욱 심해져 구 본부파·중간파·해소파·해방동맹파의 4파로 갈리어 본부의 활동이 중단되기도 하였지요. 다만 오늘날에도 일본에는 部落이 남아있어 이의 철폐를 위한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 자료가 남아 있는 경상북도를 기준으로 봐도 고등 교육을 받은 백정은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합니다.

<표2> 경상 북도 내 백정 교육표 (1929.6)

 교육(학교)정도  재학중  중도 퇴학  졸업  계
 보통 학교 또는 같은 정도  299  48  20  367
 고등 학교 또는 같은 정도  1  -  -  1
 전문 학교 이상  -  -  1  1
 합계  300  48  21  369

※ 慶尙北道警察局, 『高等警察要史』, 1934, 352쪽.☞



*이 글은 독립 기념관의 글을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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