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미디오 오늘의 기사에서 기자는 사건에 개입하면 안된다는 원칙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있다.
경찰에 정유라를 신고한 JTBC 기자, 어떻게 볼 것인가
[기고] 박상현 메디아티 이사, "보도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관찰자로 남았어야"
박상현 메디아티 이사 [email protected] 2017년 01월 03일 화요일
원문보기:
요지는
본인은 대체적으로 기사에서 말하는 원칙에 공감한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옳은 것이며 어떤 일을 할 때 기준이 될수 있는 규칙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땅의 기자들 그러니까 한국의 언론들이 감히 이런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기자들을 만나 밥이라도 먹여야 기사가 한 줄 나고 (정치적 사건 개입), 일부 기자는 악의적 보도로 해당 업체의 사장을 자살로 몰아넣기 까지 한다. 이것이 한 두 번 일어난 일부의 문제라면 굳이 여기에서 다루지 않겠지만, 국민적 상식으로 누구나 아는 진실이다. 온 몸에 똥을 바르고는 설거지를 하는 사람에게 위생의 기본이 왈가왈부 하는 꼴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 JTBC기자에게 이런 딴지를 걸면서 알량한 그의 기자정신에 대한 위대한 자존심이 조금이나마 회복되길 바란다. 원래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까서 모두가 바보가 될 때 편안함을 느끼는 부류는 어디에서나 볼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배가 아프다고 말하면 폼이 안날 테니까 말이다.
유명한 일화인 케빈 카터의 일화를 살펴보자.
<수단의 굶주린 소녀> 사진은 1994년에 퓰리처상을 받아 유명해 졌고, 일약 보도사진의 스타로 떠올른 케빈 카터는 대중로부터 소녀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는다. 케빈 카터의 일생을 다룬 영화 “뱅뱅클럽”에서도 그의 감정을 잘 볼 수 있다. 다만, 영화에서는 조금 모호하게 처리한 부분이 있다. 아무튼 대중들의 비난처럼 그는 상에 눈이 멀어 인간성을 포기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해당 소녀의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에 독수리가 내려 앉았고 그 때를 촬영한 후 독수리를 쫒아내고 자리를 떳다.
물론, 사실이야 그렇다 치고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독수리가 소녀를 뜯어 먹어도 셔터만 열심히 눌러야 한다는 말이다. 혹은 새를 쫒아내고 취재를 포기해야만 하며, 퓰리처상 같은건 받아서도 않되는 일일 것이다.
이는 인간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적 ‘정의’에 대한 도전이며, 기자의 원칙이 그 상위개념인 인간의 원칙을 뛰어넘는 요구이다. 왜냐하면 기자의 원칙은 기자로서 가지고 있는 특권을 활용해 사익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이지 이것이 순수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자의 원칙이 중요한 이유중 하나로 일명 ‘새다리 본드’사건을 언급했다.
이 사건을 보면 당연히 사진가가 자연에 개입, 즉 사건에 개입한 나쁜 예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주목을 받는건 사진가가 단지 사건에 개입했다는 사실뿐만아니라, 어린 새의 다리에 본드칠을 해서 원하는 장면을 얻은 즉 ‘생명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기자 원칙을 휠씬 넘어선 매우 큰 사안이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을 해당 논쟁의 예로 드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차라리 목숨을 걸고 국경을 건너는 난민들의 다리를 걷어차고, 이어 소녀에게 신경질적인 발길질로 사건에 개입했던 헝가리 N1TV의 기자 Petra László 의 예를 드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첫 번째 그녀는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겼으며, 더불어 인간으로서 할수 없는 비 윤리적인 짖을 서슴치 않았기 때문에 딱 정당한 예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자의 사건에 개입하지않는 것이원칙이라고 정한 이유는 위의 예처럼 새다리를 본드로 붙인다는지 아이를 안고 뜀박질하는 절박한 난민을 걷어차는 것처럼 언론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만들어 졌다고 봐야한다. 언론은 우리 사회를 공정하게 바라봄으로써 사회발전에 이바지한다는 공익성 때문에 특권을 가지는 것처럼, 언론 스스로가 사회적 가치에 도움이 될 때 그것의 최종적 소비자이자 주체인 일반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언론은 어떤 상태인가. 여기에서 굳이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개’로 비유된다든지 하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이미 기자의 원칙은 고사하고 언론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도 내다 버린지 오래다.
청화대의 이정현 홍보수석이 KBS사장에게 집적 전화를 걸어 보도내용에 대한 지시와 질타를 하는 녹취록이 공개된지도 오래이며, TV조선과 같은 매체는 이미 정치적 실체로서 작동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정도의 약소는 있더라도 밥그릇을 지키지 위해서 불의와 타협하고 협박에 굴종해서 ‘소시지 빵’ 같은 뉴스나하고 있는 언론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적어도 여기 이땅에서는 누구나 피부로 느낀다고 생각한다.
양심을 팔아서 먹고살더니, 이제와서 JTBC가 하는 뉴스에 대 놓고 ‘원칙’으로 딴지 걸기에 신나하는 신문언론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하는지 안타깝다.
솔찍히 내 눈에는 ‘꼬투리’하나 잘 잡아서 안주거리로 씹어대고 싶어 하는 일부 ‘원칙’주의자들의 선동질로 밖에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어디가도 실전 경험 없이 이론만 달달 외우며 현실과 동떨어진 감각으로 사람들 고생시키는 꼴을 너무 많이 봐왔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현재의 언론이 JTBC의 신고를 가지고 ‘보도 윤리’와 ‘원칙’등을 내세우며 앞으로 있을 남용을 걱정하기 보다는, 그동안 자신들이 어떻게 이명박 박근혜정권에서도 짤리지 않고 밥그릇을 지켜왔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내 눈에는 아무리 그들이 뜨뜻한 방다박에서 질투하는 못난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기자의 원칙을 어긴 JTBC가 잘 했다는건 아니다. 물론 그 원칙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지금까지 많은 올바른 일들을 결정해준 좋은 기능이 있으며 우리는 결과적으로 그것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기자의 원칙보다는 대통령의 원칙, 민주주의 원칙, 법치주의의 원칙을 발톱 밑에 낀 때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악’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할 말은 아닐 것 같다.
권력자에게 질문하나 던지지 못하고 받아쓰기나 하는 수준의 언론을 너무나 오랫동안 봐왔던 탓일까. 아니면 편파적 방송을 너무 많이 봐왔던 것 일 수도 있다.
해당기사에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니체의 말처럼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결국은 독재자이며 위선자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기자의 ‘원칙’없는 행동에 대한 가치 판단은 일부 지식인이나 언론권력이 평가할 것이 아니며, 국민이 역사를 통해서 평가할 시대의 도도한 흐름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