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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을 보면서 묘하게 닮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오립니다.
게시물ID : freeboard_7700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jjman
추천 : 4
조회수 : 26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6/27 13:38:11

히틀러의 독재와 제2차 세계대전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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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독일 정권 장악과 세계대전을 위한 모의

1930년 가을 이후 히틀러의 대중적 인기와 연설력에 힘입어 나치당의 당세는 크게 신장되었다. 특히 1932년 1월 27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히틀러와 대자본가들의 회담은 나치와 독일 지배세력의 결합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히틀러는 1932년 3월 13일의 대통령선거에서 31.1%, 4월 11일의 결선투표에서는 36.8%의 지지를 얻었으나, 힌덴부르크에게 패배했다. 같은 해 7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37.4%의 득표를 했고 히틀러는 대통령 힌덴부르크에 의해 파펜의 연립내각에서 부총리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절했다. 1932년 11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33.1%를 득표하여 당세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독일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했고, 1933년 1월 그는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1933년 2월 그는 육·해군 수뇌부와 회담하여 그들의 지지를 확인했고, 이후 자본가들의 지지도 확보했다. 또한 같은 해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네덜란드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알려짐)을 이용하여 공산당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적들에게 대대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1933년 3월 5일 이러한 상황 속에 실시된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를 득표했다. 같은 해 7월 히틀러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일단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절대적인 독재권을 확립시켜나갔다. 먼저 나치 돌격대 대장으로서 군의 불신임을 받고 있던 에른스트 을 체포하여 1934년 6월 29일 재판 없이 처형했다. 또한 슈트라서·슐라이허 등도 함께 숙청했다. 나치 돌격대의 붕괴에 만족한 군부도 히틀러를 지지했다. 이때부터 독일제3제국은 지배세력과 혼연일체가 되어 군비의 급격한 대확장과 군수공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독일의 국력은 순식간에 유럽 제일이 되었다. 1934년 8월 2일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총통 겸 총서기로 취임했다. 히틀러의 지배 아래 독일은 준전시경제체제를 수립하여 대자본가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 자급자족정책의 확립, 실업자의 감소, 사회보장정책의 실시, 특히 신분제적 특권의 소멸과 각종 구습 및 제도의 폐지, 그리고 중하계급 출신 청년들의 지배기구로의 충원 등의 혁신에 성공함으로써 히틀러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올라갔다. 히틀러가 나타나면 독일 국민은 열광하며 그를 환영했다. 그러나 독재정치가 진행되어 국민생활은 획일화되었고, 언론·집회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자유가 사라졌으며, 히틀러의 반대파는 강제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살해되었다.

한편 히틀러는 눈부신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1933년 10월 국제연맹을 탈퇴한 독일은 1934년 1월폴란드와의 불가침조약으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났고, 1935년 1월에는 자르 지방의 국민투표에서 대승하여 자르의 영유권을 회복했다. 같은 해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제한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부활시켰으며, 6월에는 영국-독일 해군협정을 체결하여 독일 해군을 증강시켰다. 1936년 3월에는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하고 라인란트 지역의 재무장을 강행했다. 이에 따라 독일에서 반히틀러 운동은 지지자를 잃었다. 1938년 3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같은 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에 관한 뮌헨 협정으로 그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고, 그는 '불세출의 영웅', '일찍이 없었던 위인'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히틀러의 외교적 성공의 배후에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영국·프랑스 등의 지지 또는 묵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1937년 11월 5일 히틀러는 군부와 정부의 수뇌들을 모아 은밀히 전쟁의지를 표명했다. 1938년 2월 4일 이들 가운데 전쟁개시를 주저하는 자를 파면한 히틀러는 자신이 국방장관을 겸임하여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1939년 9월 그는 불시에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부의 작전에 깊숙이 개입했으며, 1940년 5월 대프랑스전에서 작전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1941년 히틀러가 보수파와 군수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소련과의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히틀러는 특히 1942년말 독일 제6군단이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에서 포위당했을 때 독일군의 후퇴를 금지시킴으로써 22만여 명의 독일군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게 했다.

히틀러의 점령정책은 매우 가혹했으며, 포로와 점령지 주민, 그리고 유대인을 강제노동에 동원하거나 강제수용소로 이송·살해했다(→ 전쟁범죄). 또한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물자를 무자비하게 탈취했고, 슬라브 민족에게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반(反)나치 저항운동이 전유럽에 걸쳐 전개되었다. 그러나 독일 내에서 히틀러의 이민족 억압 및 착취 정책에 대한 비난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일의 주요지배계급은 전쟁 말기까지 히틀러의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더욱이 1944년 7월 20일 히틀러의 암살을 기도한 반란조직에 가담했던 많은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회주의자와 종교인을 제외하고는 히틀러보다 더 반동적이어서 구체제로의 복귀를 희망했다(→ 7월암살음모사건). 즉 독일에서 히틀러 반대세력은 나치가 멸망하는 날까지 극히 적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동지로서 존경했으며,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내부의 친독일파였으므로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외교면에서 이탈리아와 독일은 스페인 내란 이후 상호협력했으나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자 실망한 히틀러는 중요한 정책을 무솔리니와 의논하지 않고 단독으로 결정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국가적 이해는 존중했지만 이탈리아와의 동맹관계를 부담스럽게 생각했고, 독일의 패배 또한 대부분 무솔리니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모든 타협을 배척하고 최후까지 전쟁을 수행했으나 결국 패배했고,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총통 관저 지하에서 음독자살했다(권총자살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최근의 소련 자료에 의해 음독자살로 판명되었음). 그의 시체는 소련군에게 발견되었으나 독일측에 반환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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