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년 - 부산 출마. 여론조사에서 앞서 있다가 총선 직전 남북정상회담 발표로 인한 반김대중 정서, 허태열의 지역감정 조장 작전에 밀려 패배.
92년 선거에 대해 노통은...
"낙선의 원인은 ‘노무현이를 밀어 주면 DJ(김대중)가 (차기 선거에서) 대통령이 된다. YS(김영삼)를 대통령으로 만들려면 미워도 허삼수를 찍어야 한다. 이번엔 후보 보고 찍는 게 아니다’ 라는 부산 사람들의 의식에 있었다. 사실 그 한 마디로 선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선거는 YS가 좌천동 증산공원에 들러 허삼수 씨의 손을 번쩍 드는 것으로 이미 끝나 버렸다”
- 1994년 펴낸 자전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
95년 부산선거에서는...
"92년 대선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가 복귀한 김대중 당시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이 지역등권론을 내세워 전북에서 지원 유세를 시작하자 승세는 한순간 뒤집어졌다. 지역등권론이란 “어느 한 지역이 권력을 독점하거나 어느 한 지역만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논쟁이 벌어졌고, 부산 시민들은 이를 지역주의로 이해했다."
특히 2000년의 패배는 노통이 분위기 좋다가 남북정상회담 발표 듣는 순간 불운을 직감했고 결국 김대중 밑에서 아들딸들 종살이나 시킬거냐는 허태열의 지역감정 작전에 말려 패배했으나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겠지요” 라며 스스로를 위안. 이를 본 사람들은 노사모를 결성했고 호남과 광주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노무현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분위기에서 2년후 광주 신화를 시작으로 대통령으로 당선 된것입니다.
유력한 1위주자가 아니라 광주분들의 전략투표를 기대할수도 없는 이재명 시장이 겨우 다음 이유로 노무현의 광주 신하를 재현할수 있을까요?
이재명 "광주는 내 정치 출발점"…2박3일간 호남서 강한 '스킨십'
이 시장은 "호남은 어머니 같은 존재다. 내 삶을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광주 민주화운동이었다"고 강조했다.
"대학 들어가기 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도들의 폭동으로 알았고 그들을 비난했지만, 대학에 들어가 (군부)그들에게 속아서 만들어진 잘못된 일이란 것을 알았다"면서 "기득권과의 싸움, 지난한 싸움에서 각종 사건 아픔을 촛불민심에서 공감하고 이때 국민적 지지를 일부나마 갖게 된 것"이라며 광주와의 인연을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