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복잡계 경제학이니 뭐니 해서 사회현상, 경제현상의 원인은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정말 맞는 말이다. 요즘같이 모든 것이 얽히고 설킨 세상에서 이거 때문이야! 라고 명확하게 주장할 수 있는 만악의 근원이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노동문제에도 역시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사측과 정규직 노동조합원들의 이기주의, 비정규직 노동자와 일반 대중들의 무지, 정부의 선동 등.
원인의 가짓수는 많고 또 그 숫자만큼이나 뿌리깊다.
하지만 여기서 구태여 직접적인, 1차적인, 가장 큰 원인. 주적이 과연 뭐냐 라고 집어내자면
나는 '성과 목표', 그리고 '그래프'를 들고 싶다.
기업이 연말이 되면 하는 일 중에 소속원들이 가장 싫어하고 엿같아 하는 작업이 바로 '내년도 성과 목표 설정'일 것이다.
'목표'. 정말 좋은 말이다. 어떤 일을 이뤄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한 가지이며, 구성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평가의 가장 알기쉬운 잣대가 되어주는 '목표'.
그러나 이 목표에서 인간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 빠지는 순간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고문기구가 된다.
세상 만물에는 모두 사이클이 있다. 그 어떤 것도 성장만을 할 수는 없으며, 성장하기도 하고 정체하기도 하고 때로는 쇠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사이클 속에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 상태를 성장한다고 할 것이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호황이 있는가 하면 불황도 있다. 불황의 존재를 부정해 버리면 거시경제학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다.
불황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화 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모든 기업 조직의 '성과 목표'는 이를 부정한다.
"전년 동월 대비 2배 성장", "전년 동월 대비 몇 % 성장"
목표는 모두 성장만을 외친다. 기업 소속의 경제연구소에서는 불황을 점치는데도
각 점포들에게는 성장을 하란다.
방법? 그런건 니들이 알아서 생각해내야 할 문제가 된다. 즉, 쥐어짜이는 것이다.
그렇게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목표는 원래의 기능인 평가의 잣대가 되어 사정없이 목을 내리친다.
목표를 달성했을 때는 더 비참하다. 억지로 억지로 내 살을 쥐어짜며, 혹은 운이 좋아서, 혹은 극적인 혁신으로 목표를 달성하면
내년의 목표는 올해보다 더 성장할 것을 요구한다.
말이 안되는 상황이 기업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목표의 설정이 당연한 것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또 하나의 원인인 '그래프'이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여기지 않고 '노동 - 자본 투입 그래프'상의 한 점으로 치부해 버리는 순간
인간은 인간에게 상상도 못할 만큼 잔인해 질 수 있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기업의 경제연구소 소속이고 책상에 앉아서
이런 그래프를 그려놓고 내년의 불황을 고려하여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동 - 자본 투입의 최적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 점을 찾아 내어 노동 x, 자본은 y를 투입하여야 한다 라고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찾아낸 최적점의 노동 x가 작년 노동 투입량 x'보다 왼쪽으로 이동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면
당신이나 경영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노동력 투입을 줄여야지 하고 결재를 내릴 뿐이다.
하지만 그 결정으로 인해 잘려나가는 노동 x'-노동x에는 수십개의, 어쩌면 수백개의 가정의 운명이 걸려있다.
그러나 그래프에는 그런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 뿐더러
경제학 이론상 이렇게 해야만 한다 라는 합리화를 위한 정당성까지 당신에게 부여한다.
이런식으로 인간은 점점 인간이 아니게 되어 가는 것이다.
경영자에게 사원은 더이상 옛날과 같은 '우리 식구'가 아닌 '노동력의 한 단위'로 변화해 나가는 것이다.
아무런 죄책감도 주지 못한 채로.
이런 심경의 변화를 통해 노동자들은 더더욱 어두운 구렁텅이로 계속 끌려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계속 힘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다. 사람을 사람이 아닌 단위화 하는 순간 단기적으론 당신들의 주머니를 불려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당신들의 살을 깎아먹는 올가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