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전, 술김에 친구에게 말했다.
"이때까지 말 안해준게 있는데 말이야. 그게 있지, 그게..."
술김에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 눈이 계속 감기고 턱과 이마에 손이 간다. 오락가락하는 정신에도 왠지 긴장이 된다.
이 긴장되는 마음은 어떤 때여도 다른 감정들 보다 더욱 강인하리라 싶다.
계속 머뭇머뭇한다. 머무르다 사라진 사람들이 아른거린다. 이 친구도 사라질까. 머물러 줄까.
언제나 어떤 일이든 된다, 안된다 확률은 반반이다. 라고 외치며 자신만만한 나였지만, 어찌 이럴 땐 그 자신감이 수그러드는지.
친구는 계속해서 재촉한다.
"뭔데 그래? 얘가 취했나. 말해보라니까. 야이 멍청아 정신 차리라고."
잠시 헤까닥. 정신을 놓았나 보다. 실실거리며 그를 쳐다본다. 이마에 간 손에 땀이 흠뻑하다. 이마에서 흘렀을까 손에서 난 것일까.
"나 있잖아. 그러니까 내가...그러니까...."
망설임을 그만 둘 수 없다. 이 친구는 솔직히 말해 평생 보고 싶은 친구니까. 끊임 없는 재촉에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놓고는. 웃기지도 않는 놈이다.
"나.. 이성을 좋아하질 못하겠다? 동성을 좋아하게 되더라고...동성만을..."
말을 하고는 급하게 술을 들이킨다. 친구가 말아준 '고진감래' 라던가 뭐래나. 쓰지만 끝이 달달하다. 참 맛좋다.
"그거 얘기 할려고 이렇게 길게 뺀거냐?"
친구는 어이 없다는 듯이 쳐다본다.
"이거 얘기하면 그렇게 좋게 봐주는 놈들이 없길래.... 사라진 사람도 제법 있고..."
"사라진 사람이, 이해 못하고 절연한 사람?"
어쭈 제법, 절연이란 말도 다 쓰고. 라는 생각에 하하 웃음이 나온다. 느낌이 이 친구는 날 떠나지 않을 모양이다.
"말 잘하네. 그렇지 절연. 절연한 사람."
나는 술잔을 들어 자잔을 채우고는, 얼음을 두알갱이 넣어 잔을 흔들어 짤랑거린다.
"나는 항상 말을 할때나, 하고 나서나 걱정이 돼. 날 떠나가지 않을까. 나랑은 이제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뭐 그런거?"
친구는 피식 웃더니 내 팔을 툭 친다. 아까운 술이 방울방울 테이블에 흘러내린다.
"자식아. 내가 그거 하나 이해 못해줄 줄 알았냐. 그래도 동기중에 제일 낫다고 생각하는 게 넌데. 그거 하나 이해 못해주고 인연 끊으면 말 다한거지 뭐."
"그런가?...헤헤 좋구만..."
손에 쥔 술을 다시 들이키고 생각한다. 아까 그게, '고진감래'였나 뭐였나... 딱 지금 같구만.
점점 속에 있는 얘기를 꺼내게 된다. 친구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은 웃어가며 내 얘기를 들어준다.
"진짜 이게 자각한 이후로는 완전... 열등감에 쩔어서 살게 되더라. 내가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을 하면 어떤 결과가 나는지 아니까.. 눈에 선하니까 차마 말을 못하겠더라고. 몇몇 잃고난 이후에는 더더욱. 부모님께 말하고는 집에서 쫓겨났다니까. 하하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밖에 안나온다. 죽여버리겠다느니. 너는 내 자식이 아니라느니. 그러면서 또 막판에 입대하기 전에 받아주더니 이런 말을 하더라. '그래도 여자랑 결혼해야겠지?' 라고. 인정을 안하는 거지 인정을... 이런 말 들을 땐 차라리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이 들더라고. 내 인생 최고 소원도 그거고. 여자 되는거. 결혼하는거. 이쁜 팔찌라던가 목걸이, 반지 같은것도 눈치 안보고 사고 싶어. 가끔 악세사리 매장 앞에 넋놓고 바라보고 서 있으면 왠 여자들이 뒤에서 숙덕대면서 비웃는거 같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지. 근데 그 상황에서 제일 엿같은게 뭔지 알어? 나보고 여자친구 선물 사주녜.. 여자친구 선물... 내가 쓸건데... 아 맞다. 그래도 군대가 나한텐 좀 안맞을 거 같은데 괜찮더라고. 씻을 때 빼고. 나 무지 빠르게 씻잖냐. 5분컷! 이러면서 빠르게 씻는데 그게 다 그런 이유가 있는거... 진짜 내가 부대내에 좋아하는 사람이 한명 있거든... 000상병이라고... 그 사람 씻으러 들어오면 눈을 둘 곳이 없다니까 진짜 하하.."
"조금 어이없네 그건 흐흐."
"생각해봐. 너도 좋아하는 여자가 너 옆에 알몸으로 씻고 있다고 생각해봐바... 그러니까 니 여친이라던가 크흐.. 그거 말고도 웃긴 얘기 있는데 들어봐바 흐흐."
"얘기해봐."
"나 이게 알게 된게 중딩 딱 올라오고 나서 알았거든. 근데 내가 짝사랑하던 애가 나랑 중고딩 쭉 같은반을 했어.. 우와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저준가 싶기도 하고... 어쨋든 내가 딱 고등학교 올라가기 전에 걔한테 고백할라 그랬다? 근데 고백하기 전에는 그 뭐시기냐... 그러니까...내가 게이 라는걸 걔 한테 알려줘야 하잖아? 그래서 중3 내 생일날 그 친구를 다른 애들이랑 만나는 시간보다 한시간쯤 일찍 불렀다. 그러고 옆에 앉혀놓고 말했지. 나 게이라고. 그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나한텐 고백하지 마." 이러는거... 하하하 진짜 그때 파티 끝나고 버스 역에서 줄창 울었지... 지금 생각해 보니까 중고딩때 나를 죽여버리고 싶네 흐흐.... 왤케 생각 없이 커밍하고 다닌거지?"
"커밍?"
"커밍아웃이라고.. 나 게이다! 라고 말하는 그런거."
"들어보니까 너도 참 힘들게 산다."
뜬금 없이 내뱉는 말, 커밍아웃 하고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신기하게 느껴져 멋쩍게 웃고는 계속 얘기를 나눈다. 그렇게 한잔 두잔 오가는 술에 서로 정신을 점점 놓고는. 필름이 끊기기 직전에 딱 그만두고 나온다. 왠지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