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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일간의 싸움… 첫돌 맞는 노조, 76년 무노조 깼다.
게시물ID : sisa_5344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작은창문
추천 : 12
조회수 : 534회
댓글수 : 23개
등록시간 : 2014/07/03 22:16:39
고 염호석 분회장의 죽음… '삼성 사람'이 교섭에 앉았다는 성과

"저는 지금 정동진에 있습니다. 해가 뜨는 곳이기도 하죠.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 지회가 빛을 잃지 않고 내일도 뜨는 해처럼 이 싸움 꼭 승리하리라 생각해서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제가 여러분 곁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기쁨이었습니다.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 저 하나로 인해 지회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지난 5월 17일, 34살 젊은 청년은 손글씨로 유서를 썼다. 같은 시간, 동료와 지인들은 그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지인 이아무개 씨는 지난 5월 15일 오후 8시께 청년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호석아~~~!! 무슨 일이야?? 연락줘"라고 남겼다. 그리고 12시간 뒤 "어딨니? 항상 울렸던 네 전화의 연결음이 너무 간절하다. 우린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감사해. 방황하지 말고 와. 언제든 오라고 했잖아. 기다린다"라고 남겼다. 하지만 12시간 뒤, 그는 마지막 글을 남겼다. "잘 가." 

34살의 청년,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센터 분회장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지인들은 그가 외롭게 자랐다고 말했다. 여섯 살 무렵, 생모와 생부가 헤어지며 그는 할머니댁에 맡겨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생부는 그를 방치했고, 보다 못한 친구 어머니가 염 분회장을 거뒀다. 유서에서 친구 어머니를 '어머니'라 칭한 이유이다. "항상 자랑스런 아들이 되고팠는데 평생 속만 썩이고 또 이렇게 두 분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30년 만에 아들 소식을 들은 생모는 오열했다. 그는 아들의 유언에 따라 모든 장례 절차를 노조에 위임했다. "우리 석이가 힘들었던 것 같아. 정말 몰랐어요. 알았으면 벌써 데려왔지요. 호석이가 하고 싶은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인 것 같아요." 하지만 18일 저녁 경찰은 염 분회장의 시신을 빼앗아갔다. 경찰 300여명이 장례식장에 들이닥쳤다. 지회 간부는 "경찰이 한 말은 '하나 둘 셋, 밀어'가 전부였다"고 말했다. 

23년만의 시신탈취, 배후는 누구인가 

'시신탈취'였다. 당시 강남경찰서 관계자는 "유족의 요청에 의해 출동했다"고 밝혔지만, 후에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탄압 시계는 23년 전으로 되돌려졌다. 노태우 정권이던 1991년, 경찰은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의 시신을 빼돌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은 이를 외면했다. 세월호, 지방선거 등 굵직한 이슈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현실론과 함께 '삼성의 눈치보기'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한 둘이 아니었다. 자신을 '유족'이라 밝힌 사람은 누구인지, 애초 노조에 장례를 위임하기로 했던 생부의 마음이 왜 바뀌었는지는 여전히 규명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지회와 새정치연합 을지로위원회는 이 과정에 삼성의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을지로위 관계자는 "삼성의 요구가 있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관여된 정황들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료들은 손에서 일을 놓았다. 지회는 5월 19일 무기한 총파업을 선포했다. 21일부터는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에 침낭을 깔았다. 염 분회장이 일하던 양산센터 조합원들은 누런 삼베옷을 입고 이후 41일간 서울을 헤집고 다녔다. 이병철 전 회장 묘역,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입원한 병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자택도 찾아갔다. "거울을 볼 때마다 염호석 열사의 뜻과 우리의 처지를 기억하기 위해" 수염을 깎지 않는 조합원도 있었다. 

노숙농성이 시작되자 삼성 측이 반응했다. 농성 이튿날인 5월 22일, 삼성은 지회에 교섭을 요청했다. 다만 삼성본관 앞 분향소 철수를 전제했다. 노조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사측의 요청으로 교섭이 재개됐고, 여기에는 '삼성 사람'이 직접 앉았다. 다만 비공개 교섭이라 구체적으로 알려지진 않았고 '부사장급' 이라는 이야기만 들렸다. 그럼에도 노동계는 "삼성이 직접 나섰다"는 것을 높게 평가했다. 

첫돌 맞는 노조, 76년 무노조 깼다 

농성 41일째인 지난달 28일, 76년 무노조 경영에 금이 갔다. '임금 및 단체협약'이 체결된 것. 합의안에는 △고 염호석 관련 사과 △노동조합 활동 인정 △임금 및 수당 체계화 △폐업센터 고용 승계 등의 내용이 담겼다. 원청인 삼성전자서비스는 공지사항을 통해 "협력사의 교섭타결을 환영하고, 고인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사과했다. '협력사'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교섭에 '삼성 사람'이 앉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번 합의에 따라 삼성서비스 노동자들은 '기본급'을 받게 됐다. 그간 이들은 기본급여 없이 건당 수수료만으로 임금을 받아왔다. '넥타이 맨 거지'라는 말은 헛말이 아니었다. 염 분회장의 4월 월급은 40만 원대였다. 노사는 기본급을 월 120만 원으로 하고 실수리 건수가 60건을 넘어가면 건당 2만5000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제서야 동료들은 정동진을 찾을 수 있었다. "호석아! 형이다. 형이 네 앞에 이곳 정동진에 서게 되면 쪽팔릴까봐 두려웠단다. 이제 후련하다. 너를 마주 대할 수 있다. 조합원 동지들과 연대투쟁해주신 분들 모두 모시고 이곳에, 네가 우리를 마지막으로 보자던 이곳에 왔다. 어머니도 모시고 왔다. 잘 가래이." 지난달 30일 오후, 정동진에서 염 분회장의 노계가 열렸다. 김기호 동래센터 분회장이 제문을 읽어나가자 곳곳에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생모는 정동진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을 울었다. 그는 "너무 고마워서 운다. 행복의 눈물"이라며 "우리 호석이가 혼자서 외롭게 갔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호석이를 위해 정동진에 왔으니 얼마나 고맙냐"고 말했다. 그는 앞서 열린 영결식에서도 "마지막 우리 석이 가는 길 훨훨 날아가게 도와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며 동료들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염 분회장은 1일 오후 경남 양산 솔밭산 열사묘역에 안장됐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6&aid=0000070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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