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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라는 국가와 일본이라는 국명이 상관 없는 이유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83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2
조회수 : 1526회
댓글수 : 32개
등록시간 : 2013/04/13 20:09:51




우선적으로 저는 비 전문가로서 전문가들이 연구하고 입증한 내용과 그에 관련된 바탕을 가지고 소재로서 글을 쓸 따름이지 제가 그 것을 생산할 만한 능력과 열정등이 전무하다는 사실은 부정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것을 소재로서 글을 쓸 때 그 글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제 태도가 그 내용에 관한 미약한 근거나 부정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식민사관이라는 역사 게시판에서 곧잘 통용되는 낙인 역시 본 소재와는 무관합니다, 우리가 일본의 문명과 문화의 전반적인 성장에 있어 삼국시대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문명의 기틀을 마련해 준것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중국 등을 거쳐 그러한 성장에 커다란 도움을 받았으며 이를 수용하고 또 독자적으로 성장시킨 것을 그러한 영향과 함께 일본에 전달해 주었을따름이지요,


가령 백제는 고구려 시절 인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들어온 사찰 건축에 있어 커다란 진보를 해냈고 목조 건축에 있어서는 삼국중에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으며 이를 일본에 전파했습니다. 비슷하게 풍수지리 역시 중국에서 처음 발생한것이 전파되었고 이를 다시 일본에 전파했지요,


자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가 하자면 문화의 상대성입니다. 대개 이러한 일본에 관한 문화와 문명의 전파에 있어 많은 분들이 간과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문화나 문명에는 절대적인 격차가 존재할까요? 존재한다는 절대적인 가정 아래 진행된것이 바로 백호주의요, 제국주의 입니다.


그 들은 저열한 검은 상품들과 노란 원숭이들, 그리고 신대륙의 야만인들을 보다 우월한 문명과 문화의 단계로 이끌며 백인이라는 신이 창조한 최고의 월등한 인종인 백인들에게 내려진 의무이자 권리인 정복과 교화를 수행하기 위하여 수많은 그 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하지만 수탈자 입장에서는 악몽같은 일들을 벌여나갔습니다.


대개 일본에 대한 기틀적인 부분을 창조했다는 쪽에 가까운 주장을 하시는 분들의 내용을 보면 단적으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중국을 비릇한 타 국의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이고 수용한것은 상대적인 가치이지만 우리가 일본에 같은 것을 행한것은 절대적인 가치라는 것이지요,


그러한 것에 반하는 주장이 어찌하여 제국주의에 따라 식민지의 저열한 백성들을 이간질 시키고 세뇌시켜 통치를 용이하게 만드는 식민사학이 될수가 있겠습니까,


서론이 길었는데, 본론을 적어보도록 하지요,




일본은 삼국의 이주민들이 상당수 정착하기 시작한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문명과 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한 고훈 시대를 거쳐 아스카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 아스카는 지명의 이름으로 지금의 나라 시 인근 지역이라 보시면 되며 실상 고훈시대와 어느정도 겹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기서는 넘어가겠습니다.


다만 포인트를 하나 짚자면 이 당시 중국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들을 귀화인 내지는 도래인이라 부르는데 정부와 원주민 호족들은 이들을 '대개는' 중히 써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거나 토목, 양잠, 직물 등의 일을 하거나 관공서에서 한자를 사용하여 기록이나 계산,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각지의 요직에 등용될수 있었습니다.


아스카 시대는 원주민과 도래인등 출신에 상관없이 여러 강력한 호족들이 모여 천황을 옹립하고 국가를 통치하는 체제였습니다. 따라서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천황은 불교의 도입을 강력하게 추진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불교라는 것은 당시 동북 아시아의 주요한 종교로서 신분제를 뛰어넘어 만민 평등 사상을 바탕으로 하며 절대적인 구원의 신인 미륵불을 왕에게 대입하여 왕 자체가 부처가 세상에 내려온 것이라는 사상을 백성에게 주입하여 왕권을 신성시 하는등 교리가 절대 왕권적이며 국민 통합에 기여하는 잇점이 매우 강했는데, 중국, 백제, 신라, 고구려 모두 불교 수용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구축했던 당시 국제 트렌드(?)를 감안한다면 정말 매력적이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반면 호족들로서는 이래저래 의견이 갈릴수 밖에 없지만 대체로 부정적일수 밖에 없었고 당시 가장 강성했던 호족중 하나인 모노노베 씨족으로 대표되는 반불파와 백제계 호족으로 추정되는 소가 씨족으로 대표되는 친불파간에 내전이 발발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천황이 스폰서로 붙은 소가 씨족이 승리하였고 일본은 중앙 집권 체제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소가씨는 백제계 도래인으로서 정말 굉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장 관료제와 율령제를 정비하고 중국에서 직접 문물을 도입하려 하였으며 관료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포함한 일본의 정치 체제를 정비한 쇼코쿠 태자만 보더라도 그의 아버지는 소가 씨이고 어머니 역시 소가 씨에 아내도 소가 씨였지만 결국 소가씨와의 정쟁에서 밀려나 쓸쓸히 역사에서 사라져 갔을 정도이니 더 말해야 입이 아플 지경이지요,


일본이라는 국명이 백제에서 도래했다는 주장이 일견 타당해 보일수 있을정도로 소가씨는 5대에 걸쳐 막강한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독주 체제는 다른 호족들의 반감을 불러올수 밖에 없었고 그 갈등의 결과는 그 시작과 같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7세기 무렵 훗날 덴지 천황이 되는 나카오오에는 어머니 고교쿠 천황 앞에서 소가 씨족의 일원이자 권신이던 소가노 이루카를 참살합니다. 그리고 나카토미노 가문의 지원 아래 쿠데타를 일으키는데 소가씨 일족은 가문의 유력한 구성원들이 차례 차례 암살되어갔고 또 소가노 이루카의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가 아들이 참살당한 다음 날 자살하는 등 세력이 위축되어가는 와중에 그나마 규합할 길이 없어 급격하게 몰락하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단순한 호족의 교체라고 볼수 밖에 없지만 상황을 다르게 돌아갑니다. 이 건 좀 더 뒤에 적도록 하고, 아무튼 여기서 백제가 멸망하였고 또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다 라는 사실을 두고 백제와 일본의 아직 끝나지 않은 관계를 주장하실수 있습니다만 뭐 틀린 애기는 아니지만 아무튼  사실과는 다릅니다.


수도를 천도하면서 까지 백제 부흥군에 원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은 사이메이 천황으로 이 분께서 즉위 7년만에 돌아가신뒤에 나카오오에는 지원을 사실상 바로 중단하게 됩니다.


나카오오에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국경 수비대를 증설하고 성곽을 축성하였으며 백제 유민들을 이용해서 방어 라인 증축에 나섭니다. 앞서 백제 부흥군에 원조를 아끼지 않은 까닭에 재정과 인력이 파탄난 상황 탓에 나당 연합군이 넘어올 경우 정말 이건 답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 뿐 만 아니라 관제를 재 정비하는 한편 수도를 천도하여 이전과는 새로운 나라임을 천명하며 마침내 천황의 자리에 오르는데 


여기서 자신을 밀어준 호족들의 뒤통수를 맛깔나게 올려칩니다.


바로 다이카 개신을 선포하게 되는 것으로 이른바 경오년적 공지공민제라 불리는 내용이 가장 큰 문제로 모든 땅은 천황의 땅이며 호족들은 토지와 백성의 소유를 엄금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이지요,


간단하게 더 이상 백성들은 호족들에게 병역이나 노역을 하거나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국가에 병역과 노역, 조세의 의무가 있었으며 국가는 그 들에게 토지를 살아 생전이라는 조건이 있지만 지급해줄 의무가 생긴것이지요,


또한 이 다이카 개신으로 지방관 제도가 생겨났으며 호족들은 관료로서 편입되게 되었습니다.



자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에서 제가 좀 두서 없이 필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작성은 했습니다만 아무튼 살펴볼때 몇가지 사실을 알수가 있습니다.


백제계 도래인이던 소가 씨족은 일본의 권신이지 백제의 대변자가 아니라는 것이 첫째이며 천황은 백제의 종속국이 아닌 독자적인 중앙 집권 체제의 일본을 다스렸고 친백제적 성향의 천황이 있었으나 다이카 개신 이전에 이미 백제와의 관계는 종식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이메이 천황은 사실 고교쿠 천황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앞에서 혈육을 떠나 천황으로서의 권위도 무색하게 자신이 아끼는 권신을 참살한것에 충격을 받고 권좌를 이양했다가 다시 즉위하게 되었지요, 그 사이에 그녀의 사위인 고토쿠 천황이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넘어가고 아무튼 사이메이 천황이 백제를 도운것에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가깝게는 가장 타당한 가능성인 동맹국이나 일전에 정변을 일으킨 나카오오에의 지지세력을 소모시키려했다거나 좀 먼 이야기이지만 백제의 왕족설 까지 말입니다.


이렇듯 돌발적인 면모를 보이며 사이메이 천황은 막대한 전비와 재정을 탕진하면서 백제를 지원했습니다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녀의 사후에는 일말의 재고도 없이 오히려 백제 유민들을 노역에 동원하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후의 부흥 운동이나 신라나 당에 대한 외교적인 측면 모두 친 백제성향과는 거리가 먼 단정적으로 손을 끊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상 사이메이 천황의 백제 지원에 관해 여러가지 이설이 발생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발생합니다. 독자적인 율령제와 기초적인 법률까지 발표하던 사실상 백제과는 별개의 국가로서 동맹국 이상 이하도 아닌 관계임에도 무리하게 원정을 추진한 이유가 불명확 하기 때문입니다.


5대에 걸쳐 일본 조정을 종횡한 소가씨 일족이 백제계 도래인으로 추정은 된다지만 비단 소가씨 말고도 신라나 고구려 계통의 호족이나 유력한 인사들은 많습니다. 더군다나 그 들은 친 백제의 성향은 커녕 일본의 독자적인 체제를 지원했지요,


반 호족적인 정책을 벌인 탓에 정쟁에서 밀려난 쇼코쿠 태자만 보더라도 정책적 노선은 백제와는 무관합니다. 어디까지나 그의 외교적인 측면에서 볼때 백제는 견당사를 파견한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단순한 우호적 동맹 관계일 뿐으로 이는 당시 일본 천황들의 노선 역시 비슷한 것에서 앞서 언급한 사이메이 천황의 행보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결론적으로 과연 정치 개혁을 통해 천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꾀하던 일본이 굳이 백제와 관련이 있는 역사에는 if가 없다지만 다시금 소가씨와 같은 사태에 명분을 줄수도 있는 중앙 집권 체제를 추구함에 있어 누가 될만한 이름을 꺼내야 할 필요가 무엇이 있을까요?


또 조선이나 고려와 다르게 아예 남남인 이미 멸망한 외국의 어떤 국가의 이름을 빌어야 할 그 어떠한 이유나 명분은 무엇이 있을까요? 


당장 주요한 근거가 되는 도래인 출신자들은 출신자일뿐입니다. 그 들은 외국인 선조를 둔 일본인일뿐이지 외국인이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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