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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1월 17일, 친구와의 약속.. [중편]
게시물ID : humorstory_1091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대리
추천 : 3
조회수 : 46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05/11/20 15:31:40
탁구장에서 선배들에게 무참히 터진 것에 대한 분노와 많은 학생들 앞에서 망가진 모습을 보여줘야했던 수치심으로 인해 내 기분은 상당히 저조했다. 그런 감정들을 그 누구에게도 티내고싶지 않아 자리에 앉아 조용히 분을 삭히고 있는데, 일락 티켓 문제로 한참 예민해져있는 나를 더욱 자극시키는 녀석이 한 명 있었다. 나와 같이 어울리는 무리 중 한 명인 창수라는 녀석이었는데, 우리반 아이에게 강제로 일락 티켓을 팔고있는 것이었다. 창수: 좀만아. 오늘까지 2만원 준비하라고 말 안했었냐? 승훈: 미안해.. 요즘 집 형편이 안 좋아서 엄마한테 돈 달라는 말을 못 꺼냈어. 창수: 이런 씹대가리가 자꾸 잔대가리 굴리네. 너 진짜 제대로 아작나고 싶냐? 승훈: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며 고개숙인 녀석에게 창수가 뺨을 날렸고 순간, 떠들석하던 교실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창수: 좀만아! 니네집은 2만원도 없냐? 아빠, 엄마 둘 다 병신이냐? 그러면서 학교는 어떻게 다니냐? 응?? 승훈은 그 심한 말을 듣고도 녀석에게 화 한 번 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의 관계에서 힘없는 자는 항상 이렇게 서럽고 억울해야만 하는 걸까. 그렇게 비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승훈의 모습에서, 선배들에게 당하고만 있어야 했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껴서 인지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 창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삐딱한 자세로 책상에 반쯤 걸터 앉아있는 녀석의 면상에 강하게 주먹을 내리꽃았다. 녀석은 퍽, 소리와 함께 뒤로 나자빠졌고, 놀라움 반, 분노 반의 표정을 지으며 날 쏘아봤다. 창수: 개시키. 지금 뭐하는 거야! 이대리: 왜. 같은 무리에 속해 있는 놈이 주먹질을 해서 황당하냐? 그래 황당하게 해서 미안하다. 근데 전쟁터에서 아군 총에 맞아 죽는 병사들이 왜 생기는지 아냐? 그게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분이 안 갈 때가 있거든. 지금 너가 그 상황이야. 일어나 이 자식아. 눕혀진 녀석을 강제로 일으켜 다시 한 번 면상에 주먹을 강하게 꽃았다. 녀석은 책상 몇개를 우르르, 넘어뜨리며 맥없이 자빠지더니 쉽게 일어나질 못했다. 예전부터 녀석의 행동에 상당히 불만을 품고 있었던 터라 달려가서 실컷 패주고 싶었지만 싸울 기력이 없어보이는 녀석에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대리: 한창수. 잘 들어. 선배들에게 맞기 싫어 티켓을 파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양아치처럼 행동하지는 마라. 남의 부모까지 들먹이며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라고 색햐. 친구라면 친구라고도 할 수 있는 녀석에게 이렇게 몹쓸 짓을 한 건 미안하다 생각했지만 양아치같은 선배들에게 분출하고 싶었던 분노를 그와 동급인 한 녀석에게 풀 수 있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답답하게 꽉 막혀있던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듯 했다. 지금 나의 행동으로 인해 앞으로 친구들과의 관계가 많이 악화될 수도 있겠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열 명의 친구 부럽지 않을 소중한 친구 한 명이 내 곁에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 친구마저 날 외면하면 난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날, 피아노 학원에서 운이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는 시간에도 내 기분은 심히 좋질 못했다. 선배들에게 맞아야 했던 일, 친구를 때려야 했던 일, 아직 해결되지 않은 티켓 문제, 그것들이 나를 착잡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여선생 지도 아래 악보를 보며 건반을 이리저리 눌러댔지만 내 기분처럼이나 흥겨운 멜로디가 나오질 않았다. 오늘 안 좋은 일이라도 있냐며, 걱정스레 묻는 여선생의 질문에 피아노 건반을 닫고 일어나 조용히 대답했다. 이대리: 오늘 먼저 좀 가볼게요. 그렇게 말하고는 출입문을 향해 걷자, 내 옆에서 같은 곡을 연습하고있던 운이도 기분이 나질 않았는지 모든 손가락을 동원해 건반을 세게 눌러댔다. 그러자, 소음에 가까운 멜로디가 학원 실내를 크게 진동시켰다. 피아노 학원에서 나온 난, 흔히 가는 동네 당구장으로 들어갔다. 마침 같은 학년 애들이 당구를 치고 있었고 그 중에는 오늘 내게 당했던 창수의 모습도 보였다. 녀석을 못 본 채 지나치고, 혼자 빈다이에서 연습을 하고있던 준식이라는 놈에게 다가갔다. 당분간이라도 잡생각을 잊고 싶어 큐대를 하나 골라집으며 녀석에게 말했다. 이대리: 한 판 어때? 준식: 짜샤. 너 창수한테 왜 주먹질 했냐? 너무 한 거 아니냐? 이대리: 한 판 어떠냐고. 준식: 씨불. 요즘 딴 학교에서 자꾸 우리 학교 얕보는데 이렇게 우리끼리 치고박는 거 별로 좋지 않다. 이대리: 한 판 어떠냐고 물었다. 준식: 그 색히. 고집은.. 녀석도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창수와의 일로 기분이 나쁜 듯 했지만 더이상 별 말 않고 공을 새로 가져와 다이 위에 정렬시켰다. 그런데 당구를 치면 아무 생각없이 게임에만 집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못했다. 불안한 심리 때문인지 큐대는 자꾸만 엉성한 소리를 냈고 공은 내가 겨냥한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만 굴러 갔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녀석이 큐대에 초크질을 하면서 건방진 투로 물었다. 준식: 이대리, 티켓 몇 장이나 팔았냐? 동네 선배들에게 늘 받던 질문을 녀석이 대사 하나 안 틀릴 정도로 똑같이 물으니 갑작스럽게 기분이 더 저조해졌다. 아무런 대답없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자 녀석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준식: 운이는 많이 팔았다며? 그 자식은 참 재주도 좋아. 혼자 궁시렁대던 녀석은 이어서 무슨 중요한 말이라도 꺼내려는 듯 기분 나쁜 미소를 보였다. 영화 속에서 선한 역할로 나오던 악당이 본색을 드러낼 때 쓰는 표정처럼. 준식: 우리.. 티켓 밀어주기 한 판 어때? 한 판 당, 열 장씩. 녀석의 제안은 내가 오늘 공이 안 맞는다는 것을 간파한 얕은 꾀나 다름없었다. 자신에게도 짐이 될 수 밖에 없는 티켓들을 정당한 방식으로 친구에게 덮어씌우려는 것이었다. 그런 얄팍한 속셈으로 묻는 녀석의 얼굴에다가 당구공을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난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친구를 상대로 얍삽한 꾀를 부리는 녀석에게 나 또한 같은 방식으로 맞서주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알겠다는 사인을 보내자 녀석이 공을 새로 뿌렸고 이번엔 나도 신중하게 자세를 잡은 다음 큐대질을 했다. 막 공을 치려는 순간, 누군가 내 뒤에서 큐대를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 마." 낯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싸늘한 표정의 얼굴이 내 시선을 막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함께 피아노를 치던 운이의 얼굴이었다. 난 녀석의 손을 밀치며 낮고 굵은 톤으로 말했다. 이대리: 중요한 게임이야. 운: 하지 말라고. 이대리: 중요한 게임이라 말했잖아. 방해말아 줘. 운: 큐대 내려놔. 이대리: 방해 말라니까! 그렇게 화낼 이유는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처음으로 운이한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녀석도 내 멱살을 붙들더니 격해진 감정으로 크게 고함을 질러댔다. 운: 이 자식아! 너 그런 기분으로 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등에다가 짐 하나를 더 올리고 싶어서 환장했어?? 이렇게 운이가 끼어들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상황이 되자, 준식이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운이에게 욕을 퍼부었다. 준식: 씨벨. 왜 끼어 들고 지랄이야! 그렇게 욕질을 하던 준식이는 바로 운이의 주먹에 맞고 옆 다이에 몸을 부딪히고는 저 멀리 나가 떨어져야했다. 엎어져서 고통을 호소하고있는 준식이를 깔아보며 운이가 다시 한 번 열을 냈다. 운: 이 개자식아! 니가 그러고도 친구냐! 가뜩이나 티켓 문제로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자기 몫까지 덮어씌우려는 게 친구냐고!! 니가 진정한 친구라면 친구 등에 올려진 짐을 내 등으로 옮겨와야 하는 거 아냐? 축 쳐진 친구의 등 위에 무거운 짐 하나를 더 올려서 쓰러지는 꼴을 보고싶은 거야! 한 순간에 당구장이 요란스러워졌고 옆에서 게임을 즐기던 친구들의 얼굴표정도 싸늘히 식어버렸다. 그 중, 오늘 나에게 당했던 창수가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화산처럼 폭발해버렸다. 창수: 저 씹새들 둘 다 아주 미쳤나봐! 저것들 가만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거야!! 저렇게 친구한테 주먹질 하는 놈들을 보고만 있어야 하냐고! 그렇게 불똥이 창수에게까지 튀었고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고만 있던 친구들 모두에게 운이가 또 다시 소리쳤다. 운: 씨박색히! 친구 좋아하고 자빠졌네! 그래 좋다! 이 중에 친구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놈 있으면 나와! 아주 반병신 될 때까지 맞아줄 테니까! 나와보라고! 재우: 저 색히 진짜 왜 저러냐! 찬욱: 아! 샹! 오늘 기분 정말 드러워지네! 여기저기서 욕이 터져나오며 한층 더 긴장된 분위기를 만들었고, 당구장 주인 아저씨가 끼어들어 이들을 달래주지 않았더라면 친구들끼리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곳에 더 있어봐야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당구장에서 홀로 빠져나와 집쪽으로 쓸쓸히 걸었다. 그렇게 얼마 걸었을까, 나를 뒤따라 나온 운이가 내 어깨를 잡아돌리며 성을 냈다. 운: 너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갈 거냐? 친구가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니 고집만 세울 거냐고? 그래! 선배들한테 그렇게 맞고만 있으니 속이 시원하던? 친구의 가슴은 찢어지는데도 니 속은 후련하냐고!! 오늘 탁구장에서 있었던 일때문에 녀석의 기분도 상당히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나를 걱정해주는 녀석이었지만 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내뱉은 채 다시 등을 돌려 집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녀석이 이번엔 자신의 오토바이를 타고 내 뒤를 좇아오더니 말하는 것이다. 운: 타. 이대리: 그냥 가라. 혼자 있고 싶다. 운: 드라이브나 하게 빨리 타라고! 별로 내키지 않아 다시 거절하고 싶었지만 나도 갑갑한 마음을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더이상 고집부리지 않고 녀석의 등뒤에 올라탔다. 그러자 녀석은 악셀을 힘껏 잡아당기며 속력을 냈다. 쌩쌩 달려대는 차들과 합류해 목표 없이 무섭게 달리던 녀석이 등 뒤에 있는 내게 소리쳤다. 운: 잘 들어! 너가 고집이 얼마나 센지 모르겠지만 오늘 니 고집을 완전 꺽어 버릴 거야! 그러면서 속력을 더욱 높이는 녀석의 행동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그만 멈추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녀석은 청개구리마냥 오히려 더 속력을 높이며 크게 외쳤다. 운: 표 나한테 넘겨!! 이대리: 세워!! 녀석은 내게 겁을 줘서 항복을 얻어내려는 듯 곡예운전을 시도하며 차들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갔다. 뒤에서는 차들이 빵빵거리며 난리를 쳐댔고 녀석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오토바이처럼 무섭게 달려대기에 바빴다. 속도가 빨라지자 맞불어오는 바람 또한 더욱 거칠게 불어왔다. 피부에 느껴지는 속도감과 녀석의 아슬아슬한 난폭운전때문에 난 공포에 떨어야했다. 이대리: 그만 멈추라고!! 운: 계속 고집 부리다간 둘 다 죽을 지도 몰라! 살고싶다면! 친구 죽는 꼴 보고싶지 않다면! 빨리 나한테 주겠다고 말해!! 이대리: 세워! 이 색햐!! 운: 말 하라고! 이 자식아!! 녀석은 오토바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달리며 내 고집을 꺾으려 했지만 녀석의 난폭함은 끝내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우리 집 앞에서 날 내려주고는 한 마디 말과 함께 녀석은 저 멀리 사라졌다. 운: 개색히. 그 이후로 학교에서나, 피아노 학원에서나, 운동을 하는 곳에서나, 과외방에서나 녀석은 내게 말을 걸질 않았다. 자신의 호의를 저버린 내게 불만을 터뜨리는 것인지 날 외면하려고만 들었다. 그래서인지 운동을 하러 가기 전에 항상 만나게 되어있는 프로스펙스 앞에서도 녀석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혼자 쓸쓸히 전철에 몸을 싣고 잠실로 향해야 했다.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같이 몸을 풀고 트랙에서 달리기를 할 때, 내 옆에서 나란히 뛰고있는 운이에게 몸을 가까이하며 물었다. 이대리: 헉헉.. 백운. 나랑 말 안하기로 작정한거냐? 녀석과의 어색한 시간이 견디기 힘들어 먼저 말을 꺼내보았지만 녀석은 아무런 대답없이 거친 호흡만 내뱉을 뿐이었고 나와 거리를 멀리 하며 힘차게 질주했다. 녀석의 그런 뒷모습을 보고있자 내 고개는 커다란 한숨과 함께 땅으로 숙여지고 말았다. 무관심이 이렇게 무서운 것일까. 항상 웃고 떠들며 다정하게 지내던 친구가 이렇게 말도 없고 낯선 사람처럼 행동하니 너무나 속상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믿었던 친구마저 내 곁에서 멀리 떠났다는 생각이 들자, 마치 어두운 지구 끝 어딘가에서 나 혼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 화가 났다. 우릴 이지경으로 만든 원본인인 그 선배들에게 너무나 화가 났다. 만약 내 손에 총이 있고 살인이 범죄가 아니라면 그 선배들을 모두 쏴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이기에, 얼마 후 또다시 선배들과 마주치게 된 난, 놈들의 아지트로 끌려가 몇마디 대화도 필요없이 때리고 맞는 모습이 되어야 했다. 강형: 너 같은 독종색히들은 아주 다 밟혀죽어야 돼! 윤형: 씨벌놈.. 진짜 살인 저지르게 만드네! 김형: 니가 아주 우릴 화병으로 쓰러지게 만들려고 작정을 했구나! 화병으로 죽기 전에 너부터 죽일테니 계속 개겨라! 개색햐! 그들은 번갈아가며 날 구타했고 난, 그들의 주먹이 이기는지 내 맷집이 이기는지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식으로 오기를 부리며 끝까지 반항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끝까지 표를 안 팔거냐고 묻는 선배들의 질문에 난 북받쳐있던 분노를 순식간에 폭발시켰다. 이대리: 내가 그걸 왜 팔아야 돼! 왜 팔아야 되냐고!! 씨이발.. 눈을 휘번득이며 소리쳤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얼굴은 피로 물들었고 더이상 일어날 기운이 없을 정도로 몰매를 맞아야 했다. 강형: 헉헉.. 이번엔 진짜 명심해서 들어라. 만약 17일날까지 돈 안 가지고 오면 그 땐... 니 친구들도 다 죽는다. 놈들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바닥에 쓰러져있는 내게 침을 뱉고는 놀이터에서 사라졌고 난 바닥을 기며 울분을 토해내야만 했다. 그런데 놈이 마지막에 내뱉은 친구라는 단어가 왜 자꾸만 귓가에서 맴도는 것일까. 만약, 그 놈들이 친구들도 다 죽는다는 말만 꺼내지 않았어도 난 놈들에게 끝까지 반항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나 때문에 운이가 피해를 볼까 두려워 그 날 이후로 난, 이곳저곳 표를 팔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내가 벌인 불장난에 친구의 몸이 화상을 입는건 참을 수 없는 상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티켓을 살만한 애들은 친구들이 다 팔았기에 내가 팔 곳이라곤 단 한군데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선배들이 제시한 날짜는 점점 다가왔고, 표를 팔 시간적 여유가 없어진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돈이라도 마련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30장 값을 마련하기 위해선 60만원의 돈이 필요하지만 그렇게 까진 아니라 하더라도 10장 정도의 돈만 가지고 있으면 별 문제 없이 넘어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집안살림을 끝내고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있는 엄마의 방문을 열고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이대리: 내일 독서실 끊고 문제집 사게 돈 좀 줘. 아들이 공부한다며 돈을 달라고 하자 엄마는 별 말 없이 액수를 물었다. 엄마: 얼마나 필요한데. 이대리: 20만원.. 20만원은 어른들에게도 분명 큰 돈이었다. 만약 다른 용도에 쓰이는 돈이었다면 분명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을 엄마였지만 자식이 배우는데 필요할 돈이라 그런지 엄마는 곧바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더니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런 엄마에게 죄책감이 들어 눈빛 한 번 마주치지 못하고서 돈만 챙겨들고 내 방으로 건너왔다. 그런데 그 날 밤, 난 눈물을 터뜨려야만 했다. 개인택시를 하시는 아버지가 요즘 손님이 너무 없어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며 술을 드시고 들어오신 것이었다. 그런 아빠와 엄마는 밤새 한 숨을 터뜨렸고 내 침대까지 들려오는 그 한 숨소리에 내 눈에선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이런 힘든 상황속에서 엄마를 속인 미안함때문인지 내 눈가에선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 눈물은 배갯잎을 촉촉히 적셔만 갔고 다음 날 아침 그 돈을 그대로 엄마에게 다시 내밀게 되었다. 이대리: 돈 없어도 될 거 같아. 엄마: 왜? 어제까지만 해도 돈 필요하다며? 독서실 안 끊을 거야? 이대리: 그냥 이모네서 공부할게. 문제집은 친구꺼 같이 쓰면 될 거야. 힘없는 투로 말하고는 신발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신발을 신고있는 내게 엄마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엄마: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리 어두워? 엄마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니? 이대리: 아냐. 아무 것도 아냐. 그렇게 돈을 구할 수 없었던 나는 방과 후, 그동안 저금통에 모아둔 돈을 들고 또다시 당구장으로 들어서야했다. 이모네 집에 공부를 하러 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지금 내겐 돈을 마련하는 것이 급급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운이도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지 한 녀석과 당구를 치고 있는게 보였다. 그런 녀석은 내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당구에만 열중했고 난 그런 모습을 보고서 너무나 속이 쓰려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아끼던 저금통을 털면서까지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인데도, 녀석은 그런 나를 끝까지 외면으로 맞서고 있으니 속이 안 상할 수가 없었다. 난 씁쓸한 마음으로 준식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이대리: 줏방 한게임 치자. 준식: 줏방이라.. 얼마빵? 이대리: 쿠션 천원, 가락 이천원! 준식: 좋았어. 친구를 위해 내가 이곳에 온 것이고, 그 친구를 위해 다른 녀석들의 돈을 모두 딸 각오로 게임을 하고 있는 거지만 내 주머니 속의 돈은 늘어나지 않고 정신없이 나가느라 바빴다.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평소실력도 안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돈을 마구 잃고있는데 옆 다이에서 게임이 끝난 운이가 다가오더니 말했다. 운: 나랑 치자. 나 오늘 돈 좀 필요하거든. 무표정으로 냉정하게 말하는 녀석에게 난 거절을 했다. 녀석을 위해 돈을 벌러 온 내가 녀석의 돈을 가져갈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절하자 우리 다이에 놓여진 공 세개를 모두 밀어제친 운이가 준식에게 말했다. 운: 많이 따먹은 것 같은데 바톤 터치 좀 하자. 운이에게 한 번 맞았던 준식이는 녀석과 대화도 하기 싫은지 재수없다는 듯 뭐라고 꿍시렁 거리며 뒤로 빠졌고 운이가 새로 공을 뿌렸다. 이대리: 꼭 이래야 하냐? 운: 말했지. 나 오늘 돈 필요하다고. 준식이 이곳에서 내 돈을 따먹으려고 했을 때 녀석이 외쳤던 말이 있다. 친구란 친구의 등 위에 있는 짐에다가 짐을 하나 더 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내 등으로 옮겨오는 것이라고. 그랬던 녀석이 지금 내 등위에 짐 하나를 올릴 계획으로 말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녀석의 눈동자를 보면 방금 전 한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다. 정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돈을 다 따먹고 말겠다는 의지가 실려있는 듯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그런 녀석에게 실망해서 기꺼이 오케이를 외쳤다. 이대리: 그래 좋아. 해보자. 운: 쿠션 이천원. 가락 오천원이다. 괜찮냐? 학생인 우리에겐 무리한 금액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고 곧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불편하고 어색할 정도의 침묵과 행동들이 날 너무나 쓸쓸하게 만들었고 그 심정은 당구대 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준식이와 칠 때보다도 더 공이 안 맞는 것이었다. 그런데 녀석은 무슨 뜻에서 내 돈을 따가려고 결심을 한 것인지 내 기분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실수없이 공을 잘 쳐댔다. 그렇게해서 내 돈은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녀석은 내 돈이 바닥날 쯤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녀석이 계속해서 실수를 하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내가 잃었던 돈과 녀석의 돈까지 내 주머니로 올 수 있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일부러 실수를 하는 것처럼 어이없는 실수가 계속 이어지게 되고, 내가 치기 쉬운 공의 위치가 자꾸만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이 당구를 치자고 했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운이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내가 녀석의 그런 의도를 잠시동안 의심하며 실망하고 있었으니 내 자신이 참 부끄럽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대리: 그만 하자. 김샜다는 듯이 큐대를 내려놓자 녀석이 언성을 높였다. 운: 무슨 소리야! 지금 따고배짱이냐! 나 돈 잃었어! 큐대 잡아! 이대리: 너가 잃은 돈 돌려주면 되는 거냐? 운: 그딴 식으로 받는 거 싫어! 계속해! 녀석에게 딴 돈을 당구다이 위에 올려두고 한 숨을 푹 내쉬며 계단 쪽으로 걸었다. 그런 내게 녀석은 울먹이는 듯이 크게 외쳤고 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운: 개자식아!! 이제 며칠 안 남았는데 어쩔 거야!! 한 장도 못 팔았으면 돈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거 아냐!! 돈이라도!!!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녀석은 처음부터 나에게 돈을 잃어주기 위해 게임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녀석에게 고마움을 느끼는건 당연했지만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녀석에게 냉정한 투로 말을 꺼냈다. 이대리: 스스로 알아서 해결할게. 나 신경 쓰지 마. 운: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친구는 내 재산이야! 그 재산에 금이 가고 있는데 어떻게 모른 척 하냐고!! 넌 내가 남들한테 당하게 되면 모른 척 가만 있을 거야! 대답해봐! 색햐!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답보다 눈물이 먼저 나올 것만 같아 담배를 물며 다시 계단 쪽으로 걸었다. 녀석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내 등을 향해 외쳤고 난 그 슬픈 목소리에 마치되어 눈물을 쏟으며 당구장에서 나와야 했다. 운: 그래! 가! 색햐! 얻어터진던지 뒈지던지 맘대로 해!! 대신 하나만 알아 둬! 내 소중한 재산에 금가는 거 앞으론 절대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거라는 걸! 11월 17일, 시간은 그 날을 향해 어느때보다 빨리 흘러가고 있는 듯 했다. 만약, 그 날이 내가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었다면 반대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날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더욱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젠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일을 수습하기 위해 돈을 구해보려고 이곳 저곳 알아봤지만 나에겐 끝까지 운이 따르질 않았다. 결국 11월 17일이란 날짜가 달력에서 지워졌으면 하는 터무니없는 바램으로 마지막 며칠을 근심 속에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나에게 반갑지 않은 날이라 해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있을지도 모를 하루를 건너뛰게 되는 건 나의 지나친 억지였을까. 11월 17일, 그 날이 찾아왔다. 오늘 하루만 몸으로 때우게 되면 놈들에게서 해방이 될 수도 있는 날이었지만, 운이까지 개입이 돼있는 문제였기에 뾰족한 대책이있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렇게 신중함 속에 내려진 막다른 결론은, 내 자존심을 구기고 선배들에게 무릎꿇고 비는 일 뿐이었다. 마지막에 와서 그 선배들에게 무릎꿇고 비는 것이 내겐 정말 있을 수 없는 치욕이지만 친구를 위해서라면,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내게는 그것만이 친구를 불길 속에서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 날 저녁에 선배들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을 것을 각오한 나는 방과 후 먼저 피아노 학원을 찾았다. 선배들이 놀이터에 모이는 시간이 보통 저녁 6시 이후이기에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고 또한 복잡하고 어지러운 내 마음을 피아노소리로 편안하게 풀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이곳에 운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동안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 배우던 녀석인데 뭔가 이상했다. 내 옆에 텅 비어있는 녀석의 자리가 날 자꾸 신경쓰이게 만들었지만 마음을 비우고 1시간 가량 아무 생각없이 피아노 건반만 눌러댔다. 평상시엔 두 개의 피아노 연주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대며 흥겨운 멜로디를 만들어냈지만 홀로 외롭게 울리는 음악은 허공을 쓸쓸히 돌아 내 귀에 슬프게 담겨왔다. 그래서인지 한결 가벼워져야 할 마음은 더욱 우울해졌고 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야했다. 피아노 학원에서 나와 시계를 내려보니 어느새 6시가 지나있었다.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난, 긴장과 불안으로 뒤섞인 길고 긴 한숨을 토해낸 뒤, 선배들의 아지트인 놀이터 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반 정도 이동했을까. 길 건너편에서 한 녀석이 내 이름을 부르고는 내쪽으로 빠른 걸음을 하며 건너왔다. 준식이었다. 녀석은 내게 다가오자마자 비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준식: 이 자식 완전 벼락치기에 일가견이 있네. 너 며칠 만에 그 티켓들을 다 판 거냐? 녀석의 말이 무슨 뜻인줄 몰라 멍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준식: 뭘 모르겠다는 듯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냐. 너 티켓 다 팔았다며? 이대리: 티켓을 다 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준식: 이자식 끝까지 발뺌하네. 근데 운이 그 자식은 초반에 좀 팔던 거 같더니 어떻게 된 게 두 장밖에 못 팔았냐? 팔지도 못했으면서 왜 그동안 거짓말을 해 왔는지 정말 이해 안 가는 색히란 말야. 결국 거짓말 한 것 때문에 형들한테 존내 엊어터졌잖아. 븅신색히. 나한테 주먹질 하더니 아주 쌤통이다. 갑자기 심장이 격렬히 뛰어대는 걸 느끼며 준식에게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대리: 운이가 맞다니!!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준식: 방금 전에 동네 형들 만났었는데 너 피아노학원 가는 바람에 운이가 대신 너 티켓 값 전해주러 왔더라고. 형들이 아주 너한테 놀라서 쓰러지려고 그러더라. 한 장도 못 팔았던 놈이 어떻게 며칠 사이에 다 팔았는지.. 근데 운이랑 너랑 어떻게 상황이 거꾸로 된 거냐?? 그리고 어떻게 그 많은 티켓을 한꺼번에 다 팔았냐?? 순간, 운이가 한 말이 떠오르며 가슴속에서 찡하는 아픔이 밀려왔다. 그리고는 이내 눈동자에 물기가 번졌다. ---------------------------------------------------------------------- 그래! 가! 색햐! 얻어터지던지 죽던지 맘대로 해!! 대신 하나만 알아 둬! 내 소중한 재산에 금가는 거 앞으론 절대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거라는 걸! ----------------------------------------------------------------------- 백운. 그 때 너가 한 말이 이런 거였냐? 지켜보고 있지만 않겠다던 너의 말이 이런 거였냐?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고통의 댓가를 대신해서 받아들이는 이런 거였냐고. 그랬구나.. 그래서 오늘 학원도 안 나온 거였구나.. 백운.. 넌 정말 내게 소중한 친구야.. 그리고 넌 정말 얄미운 녀석이야.. 내 가슴은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고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나 대신 아픔을 느껴야했던 그 녀석을 지금 당장 봐야지만 다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동안 떨궜던 시선을 다시 준식의 두 눈에 고정시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대리: 이 자식 어딨어. 어딨냐고. 준식: 그야 뭐. 만신창이가 됐으니 집에 가 있겠지. 그 꼴로 돌아다니기라도 하겠어? 만신창이가 됐다는 녀석의 말에 내 가슴은 대 못이 박히는 듯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공중전화 박스로 힘없이 걸어가 녀석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녀석의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고 난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리: 나야. 이대리.. 운: .... 이대리: 잠깐 나와라. 운: 오늘 피곤하다. 나중에 보자.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녀석의 목소리였지만 내 뺨에선 촉촉한 물기가 흘러내렸다. 이대리: 너... 보고 싶다. 놀이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녀석은 이번에도 못 나오겠다는 말을 꺼내려 했지만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난 수화기를 내려버렸다. 그리고는 방향을 바꿔 우리가 사용하는 놀이터를 향해 쓸쓸히 걸었다.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뿌옇게 흔들거렸다.
이 글의 주인공인 제 소중한 친구 운이가 어제 부친상을 당하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운이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있던 도중에 이런 일이 생겨 참으로 가슴이 아프네요. 어제 강남 영동세브란스병원에 가서 운이를 만나고 왔습니다. 갑작스런 사고라 많이 놀라기도 하고 힘들어하기도 하고 크나큰 슬픔에 잠겨있는 모습에 제 마음도 한 구석이 시려오네요. 제 친구 운이가 힘낼수 있도록 그리고 운이의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기도를 부탁드리는 마음입니다. 내일이 발인을 하는 날인데 발인을 마치고 돌아와 심적인 여유를 찾게 되면 마지막 하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대리 유머공장 - http://cafe.daum.net/2da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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