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언제쯤이나 남들과 원만하게 지낼 만큼 인간관계에 능숙해지게 될까요? 사람들과 행복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있나요? 아니면, 그건 늘 힘겨운 과제일 수 밖에 없나요?
너희는 관계에 대해 배울 게 전혀 없다. 단지 너희가 이미 알고 있는 걸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행복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있긴 하다. 그것은 관계를 꾸려나갈 때, 네가 계획한 목적이 아니라 상대방이 의도하는 목적에 맞추는 것이다.
관계란 항상 힘겨운 과제이기 마련이다. 관계는 늘 너 자신의 고귀한 측면들과 숭고한 전망들과, 그리고 너 자신에 대한 훨씬 더 장대한 시각들을 창조하고, 표현하고, 체험할 것을 요구한다. 네가 관계에서보다 더 즉각적이고, 더 강력하고, 더 완벽하게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실 관계가 없다면 너는 전혀 그렇게 할 수 없다.
네가 우주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까지도(인식할 수 있는 양(量)으로서, 식별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 오직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장소들과 다른 사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면 너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하라. 결국 너란 존재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거주하는 절대계와 반대되는 상대계에서의 존재방식이다.
이 점을 확실히 이해하고 싶이 파악할 수 있다면, 너희의 직관은 체험들 하나하나와 인간의 모든 만남, 특히 개별적인 인간 관계들을 축복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것들을 가장 고귀한 건설로constructive 보게 될 것이기에. 너희는 그것들을 ‘참된 자신’을 건설하는 데 활용할 수 있고, 활용해야 하고, 또 활용하고 있다는 걸(너희가 그걸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알게 될 것이기에.
그 건설은 너희의 의식이 설계한 장대한 창조물일 수도 있고, 또 순전히 우연히 이루어진 구성일 수도 있다. 너희는 그저 우연한 사건들의 결과로 빚어진 사람일 수도 있고, 네가 되려고 했고 하려고 했던 사건들의 결과에서 비롯된 사람일 수도 이다. 자기창조가 의식하면서 이루어지는 건 후자의 경우이고, 자신이 실현되는 것도 두번째 체험에서이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를 축복하라. 모든 관계를 특별한 것으로, 자신을 형성해주는 것으로 보도록 하라. 그러고 나서 이제 어떤 존재가 될지 선택하도록 하라.
그런데 너는 분명 로맨틱한 종류의 인간관계에 대해 묻고 있다. 나는 네가 그런 질문을 하는 까닭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인간관계를 특별히 길게 다뤄보기로 하자. 너를 심히 곤란하게 만든 그 문제를!
사랑하는 관계가 실패할 때(사실 실패하는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관계에서 너희가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의미에서의 실패를 빼고는), 그것이 실패하는 까닭은 두 사람이 잘못된 이유로 맺어진 데 있다.
(물론 “잘못된”이란 용어는 “잘된”것에 대비되는 상대적인 용어다. “잘된”게 무엇이건 간에! 너희 어법으로는 “관계가 당사자들의 생존에 완전히 이롭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들과 만날 때, 그 관계는 거의 대부분 실패하거나 변질된다”고 말하는 게 좀더 정확하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계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보다는 관계에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란 시각으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관계를 맺는 목적은 네가 차지하고 소유하려는 것이 상대방의 어떤 부분인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어떤 부분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관계, 즉 삶 전체의 목적은 딱 하나뿐이다. ‘참된 자신’이 되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
특별한 누군가가 함께 하기 전까지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말하면 아주 로맨틱하게 들리긴 하겠지만, 기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더 나쁜 건 그런 말은 상대방에게 자기 아닌 온갖 종류의 존재가 되라는 극심한 압박이 된다는 점이다.
“너를 실망시키고”싶지 않은 상대방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떄까지 그런 존재가 되려 하고 그런 일들을 해낸다. 그러나 결국 상대방은 네가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완성할 수 없게 되며, 내가 부여해준 역할들을 더 이상 해낼 수 없게 된다. 원망이 쌓이고 분노가 따른다.
마침내 이 특별한 누군가는 자신(과 관계)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진짜 자아를 내세우기 시작하고, 좀 더 ‘참된 자신’의 모습에 따라 행동한다. 네가 상대방더러 “진짜 변했다”고 말하는 게 대략 이 시점이다.
특별한 누군가가 이제 자신의 삶에 들어오고 나니, 자신이 완전해진 것 같다는 말은 아주 로맨틱하게 들리긴 한다. 그러나 관계의 목적은 너를 완전하게 만들어줄 타인을 갖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네 완전함을 함께 나눌 타인을 갖는 데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충분히 체험하기 위해서 특별한 타인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타인이 없다면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인간 체험의 수수께끼이자 경이이며, 불만이자 기쁨이다. 이 역설 속에서 이 역설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깊은 이해와 완벽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렇게 사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너희 대부분은 기대와 충만한 성에너지, 넓게 열린 가슴, 열의와 기쁨으로 가득찬 영혼을 가지고 관계 형성 연령층으로 들어선다.
그러다 너희는 마흔 살에서 예순 살 사이의 어딘가에서 (대개는 후반보다는 전반기에), 자신의 가장 원대한 꿈을 포기하고, 고귀한 희망을 접어두고, 최소한의 기대나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다.
문제는, 지극히 단순하고 지극히 간단하지만 지극히 비극적인 오해를 하는 데서 생긴다. 즉 너희의 가장 원대한 꿈과 가장 고귀한 이상과 가장 바람직한 소망의 실현여부가 너희의 소중한 자아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는 오해. 그리고 너희 관계의 지속 여부가 상대방이 자신의 관념에 얼마나 잘 맞춰주는가에 있다는 오해. 그러나 관계를 좌우하는 단 하나의 참된 시금석은 너희가 얼마나 자신의 관념에 따라 사느냐는 것이다.
관계는 가장 고귀한 자아 개념을 체험할 수 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회-사실은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것이다. 관게를 타인들에 대한, 너희의 가장 고귀한 개념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회로 볼 때, 관계는 실패로 돌아간다.
관계 당사자들이 자신에 대해, 즉 자신이 되고 있고 하고 있고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자신이 원하고 구하고 주는 것, 자신이 추구하고 창조하고 체험하는 것에 대해 마음쓸 수 있게 하라. 그렇게 할 때만 관계는 관계 자체의 목적과 관계 당사자들에게 훌륭하게 봉사할 것이다.
관계 당사자들은 상대방에 대해 일체 마음쓰지 마라. 오로지 단 한가지, 자신에 대해서만 마음쓰도록 하라.
너희는 오로지 상대방에 대해서만 마음쓰는 것이 최상의 관계라고 들어왔을 터이니, 이런 가르침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너희에게 말하노니, 상대방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 상대방에게 몰두하는 것이야말로 관계를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이유이다.
저 사람은 어떤 상태인가? 뭘 하고 있는가? 뭘 갖고 있는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원하는 건? 요구하는 건? 무슨 생각을 하고 이는가? 기대하는 건? 계획하는 건?
선각자는 상대방의 상태와 하는 일과 가진 것과 말과 바램과 요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상대방이 뭘 생각하고 뭘 기대하고 뭘 계획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관계에서 자신이 무엇이냐는 것뿐이다.
가장 잘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다.
아주 과격한 가르침이로군요……
주의깊게 살펴보면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남에 대한 사랑을 매개로 자신에 대한사랑을 추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자기네가 이렇게 하는 걸 깨닫지 못한다. 그것은 의식하면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 속에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너희가 잠재의식이라 부르는 것에서 진행되는 흐름이다. 그들은 생각한다. “내가 남들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들도 나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따라서 나를 사랑할 수도 있으리라.”
이것의 역(逆)에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싫어하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병이다.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사랑해주는데도, 그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상사병”에 걸릴 때, 이것은 일종의 병이다.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얘기해줘도 그들은 흡족해하지 않는다.
첫째로 그들은 상대방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이 자기를 주무르려 한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얻어내려고. (어떻게 당신들이 본래 모습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야, 뭔가 착각을 한 게 틀림없어. 당신들은 분명 내게서 뭔가를 원하는 거야! 자, 당신들이 원하는 게 뭐지?)
그들은 죽치고 앉아 어떻게 자기네를 진짜로 사랑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온갖 생각을 다해보단ㄷ. 상대방을 믿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상대방에게 그 사랑을 증명하도록 만드는 작전을 펼친다. 상대방은 그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이때 그들은 상대방에게 행동방식을 바꾸라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두번째로, 마침내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걸 믿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들은 이내 그 사랑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대방의 사랑을 붙들어두기 위해 자신의 행동방식을 바꾸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문자 그대로 관계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다. 그들은 자신을 찾고자 관계를 맺었지만, 오히려 자신을 잃고 말았다.
관계 속에서 이같은 자아상실이야말로 남녀관계에서 생기는 괴로움의 주요한 원인이다.
두 사람은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더 크리라는 기대를 품고 함께 짝을 이루지만, 오히려 더 못하다는 사실만 깨닫게 된다. 그들은 독신일 때보다 더 못하다고 느낀다. 더 무력하고, 더 맥빠지고, 더 따분하고, 더 짜증스럽고, 더 불만스럽게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예전보다 못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계속에 머무르고 관계를 유지하고자 자신의 대부분을 포기했던 것이다.
관계가 본래 뜻한 바는 결코 이런 게 아니었다. 그러나 너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체험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것이다.
왜요? 어째서요?
사람들이 관계의 목적과 교감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들이 예전에 한번이라도 교감했다고 치면).
너희가 서로를 성스러운 여행길에서 만난 성스러운 영혼들로 보지 않을 때, 너희는 모든 관계 뒤에 놓인 목적, 즉 의미를 볼 수 없다.
영혼은 진화라는 목적을 위해 몸에 깃들고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너희는 진화하고 있다. 너희는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너희는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 결정하기 위해서 모든 관계를 활용하고 있다.
이것이 너희가 이 세상에 와서 할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창조하는 즐거움이고, 자신을 인식하는 즐거움이며, 자신이 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일궈가는 즐거움이다. 이것이 자의식을 갖는다고 할 때의 참뜻이다.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알고 체험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갖고자 자신을 상대계로 끌어들였다. ‘자신’이란 너희가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관계하기 위해 스스로 창조해낸 존재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너희의 개인적 관계들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개인적 관계들은 성스러운 터전이다. 그럼에도 그 관계들은 사실 상대방들, 즉 타인들과는 무관하다. 왜냐하면 관계 자체 속에 이미 타인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타인들과 관련된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성한 이분법이다. 이것은 폐쇄회로다. 그러므로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은 신을 알게 되리라”고 말하더라도 결코 과격한 가르침이 아니다. 너희자신의 가장 고귀한 부분을 알고, 그 속에 중심을 잡고 머무는 것이 아마 그리 나쁜 인생목표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첫번째 관계는 너희 자신과 맺ㅇㅓ져야 한다. 너희는 먼저 자신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하라.
다른 사람을 가치있게 여기려면, 먼저 자신을 가치있게 여겨야 한다. 다른 사람을 축복받은 존재로 여기려면, 먼저 자신을 축복받은 존재로 여겨야 한다. 다른 사람의 성스러움을 인정하려면, 먼저 자신이 성스러운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종교들이 요구하듯이 말 앞쪽에다 수레를 매달고, 자신보다 먼저 타인을 인정한다면, 너희는 그렇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기게 되리라. 너희 중 그 누구도 참을 수 없는 일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자신보다 더 성스러운 어떤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희 종교들은 다른 사람을 너희보다 더 성스러운 존재로 여기라고 강요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렇게 한다. 잠시 동안은. 그러고 나서 너희는 그 사람을 십자가에 매단다.
너희는 내가 보낸 모든 선각자들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십자가에 매달았다. 단 한명의 선각자(예수를 뜻한다-옮긴이)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너희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들이 너희보다 더 성스러워서가 아니라, 너희가 그들을 더 성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낸 선생들은 한결같이 같은 메시지를 갖고서 세상에 왔다. “나(神)는 너희보다 더 성스럽다”가 아니라, “너희도 나만큼 성스럽다”는 메시지를 갖고서.
이것이 너희가 듣고 있을 수 없었던 메시지이며, 너희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진실이다. 그리고 이때문에 너희가 결코 진실로 순수하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결코 진실로 순수하게 타인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지금 당장,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너희 자신에게 중심을 두어라. 자신이 남들과 어떻게 지내는가가 아니라, 주어진 시기에 자신이 어떤 상태고, 뭘 하고있고, 뭘 갖고 있는지를 주시하라.
너희가 구원받을 길은 남들의 행동action이 아니라, 자신의 반응re-action 속에 있다.
이제 훨씬 잘 알아듣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든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들은 무슨 짓이라도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면, 자신에게 중심을 둔다면, 그리고 그 모든 걸 멋지게 해낸다면, 어떤 것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리라. 하지만 남들은 우리를 건드립니다. 그들의 행동은 이따금 우리를 다치게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은 관계 속에서 상처입을 때입니다. 이럴 때 흔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서 비켜 서. 그게 아무것도 아닌게 되게 하라구.” 하지만 이건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쉽게 상처받곤 합니다.
그렇게 되지않을 날이 올 것이다. 네가 관계의 참된 의미, 관계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실현하는 날이 올 것이다.
네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건 관계의 의미나 이치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그것이 바로 성장 과정의 일부이고, 진화 과정의 일부이니까. 관계 속에서 성장하느냐 여부는 너희 영혼에게 달린 일이지만, 그것 자체가 위대한 깨달음이요 위대한 기억이다. 이것을 기억해낼 때까지, 나아가 관계를 자기창조의 도구로 활용하는 법을 기억해낼 때까지, 너희는 지금 수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이해수준, 지금의 의지수준, 지금의 기억수준에서.
그러므로 남들의 모습이나 말이나 행동에 상처받고 고통받을 때 너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첫째, 자신이 정확히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자신과 남들에게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하기를 두려워한다. 자신이 “좋지 않게 비치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너희의 내면 깊은 곳 어딘가에서는 “그런 식으로 느끼는 게” 십중팔구 어리석은 짓이란 걸 알고 있다. 그것은 십중팔구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일 뿐이요, 자신은 “그보다는 더 괜찮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어쩔 수가 없다. 너희는 여전히 그런 식으로 느낀다.
이럴 때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딱 하나 있다. 자신의 느낌을 존중하는 것. 자신의 느낌을 존중하는 건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기에. 너희는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들을 사랑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존중할 수 없다면 어떻게 남들의 느낌들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겠는가?
남들과 상호작용하는 모든 과정에서 제기되어야 할 첫번째 질문은, “그것과의 관계에서 ‘나는 지금 어떤 존재이며’,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가?” 이다.
너희는 몇 가지 존재방식을 충분히 시험해볼 때까지는 대체로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지 못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려 하는지’ 알지 못한다. 너희가 자신의 가장 참된 느낌들을 존중하는 게 그토록 중요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설혹 너희가 맨처음 느끼는 감정이 부정적인 것일지라도, 그 느낌을 그냥 갖고 있는 게 그런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일 때가 많다. 그 첫 느낌들을 ‘되고 싶지 않은 것들’로서 벗어던질disown 수 있는 것은, 너희가 화가 났을 때와 짜증이 날 때, 혐오감이 일 때, 극심한 분노에 사로잡힐 때, 상대방에게 “감정적으로 복수”하고 싶은 마음따위를 갖고 있을own 때이다.
선각자는 그런 체험들을 충분히 겪었기에 자신의 마지막 선택이 무엇이 될지 이미 알고 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충분히 시험해”볼 필요가 없다. 그녀는 이전에 그 옷들을 입어봐서 그 옷들이 자기 몸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녀는 그 옷들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걸 알고 있다. 그리고 선각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실현에 삶을 바쳐왔기에,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 그런 느낌들을 절대 즐기지 않는다.
선각자들이 소위 재난이라는 것을 만나도 동요하지 않는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각자는 재앙의 씨앗들(과 모든 체험들)이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걸 알기에 재난을 축복한다. 그리고 선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두번째 목표는 언제나 성장이다. 왜냐하면 충분히 자기실현을 경험하고 나면 그 이상이 되는 것말고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영혼의 일에서 신의 일로 되는 것이 이 단계이다. 내가 이른 단계가 이 단계이니까!
여기서는 이 논의의 목적에 맞추어 너희가 아직도 영혼의 일을 지향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너희는 아직도 ‘참된 자신’을 깨달으려(“실현시키려”) 애쓰는 중이다. 삶(곧 나)은 너희에게 ‘참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넘칠 만큼 제공할 것이다(삶은 발견의 과정이 아니라 창조의 과정임을 명심하라).
너희는 ‘자신’을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창조할 수 있으며, 사실 날마다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같은 대답을 가지고 나서지는 않는다. 똑같은 외부 체험이라 하더라도 하루는 참고 아끼고 친절하게 대하는 쪽을 택하고, 또 어떤 날에는 화내고 짜증내고 슬퍼하면서 대하는 쪽을 택한다.
선각자는 항상 똑같은 대답으로 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언제나 가장 고귀한 선택이다.
이 면에서 선각자는 그 자리에서 당장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그 제자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 대응하거나 반응할 때, 어떤 수준의 선택을 하는지만 보아도 그 사람의 깨달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가장 고귀한 선택이란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낳는다.
이것은 시간이 시작된 이래, 인간의 신학과 철학들이 중심으로 삼아온 질문이다. 진실로 이 질문에 몰두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깨달음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다른 질문들에 몰두하고 있는게 현실이니까 말이다. 어떤 것이 가장 고귀한 선택인가가 아니라, 어떤 것이 가장 이로운 선택인가, 혹은 어떻게 하면 가장 적게 손해를 볼 것인가란 질문에.
손해 안보기나 최대한의 이익이란 관점에서 삶을 살면, 삶의 참된 이익은 놓치고 만다. 그럴 기회를 놓치고 그럴 가능성을 잃는다. 이런 식의 삶은 두려움으로 사는 삶이다. 이런식의 삶은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너희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떤 보호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은 잃어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너희가 앞의 두가지 질문 가운데 두번째 질문(어느것이 이로운 선택인가라는 질문-옮긴이)에만 계속 답한다면, 너희는 결코 체험으로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얻거나 잃을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두번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을 이와 다른 식으로 보는 사람, 자신을 좀더 고귀한 존재로 보는 사람, 이기거나 지는 것이 인생의 시험이 아님을 이해하는 사람, 시험은 사랑하는가 아닌가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첫번째 질문을 던진다.
두번째 질문을 던지는 남자는 “내 몸이 나”라고 말한다. 첫번째 질문을 던지는 여자는 “내 영혼이 나”라고 말한다.
그러니 들을 귀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들어라. 너희에게 얘기하노니, 모든 인간 관계의 결정적인 대목에는 딱 한 가지 질문만이 존재한다.
지금 사랑은 무엇을 하려 하는가?
이 외에 너희 영혼과 관련 있고, 의미 있고, 너희 영혼에게 중요한 다른 질문은 없다.
이제 우리는 해석이라는 아주 미묘한 지점에 이르렀다. 사랑에 뒷받침된 행동이라는 이 원칙은 너무나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게 했다. 사람들이 삶을 원망하고 삶에 화를 내는 것도 이런 오해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너희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남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려 하고, 그런 일을 하려 하고, 그런 것을 가지려 하는 데서 사랑에 뒷받침된 행동이 나온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가장 고귀한 선택이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 즉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심오한 영적 진리가 다 그렇듯이, 이런 주장은 그 자체로 즉석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이 무엇인지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오해의 소지는 훨씬 줄어든다. 그리고 그 가장 고귀한 최고의 선택이 절대적인 것일 때 수수께끼는 풀리고 순환논법은 완결되며, 너희를 위한 최고의 선이 남들을 위해서도 최고의 선이 된다.
이런 진리를 이해하는 데만도 몇생애가 걸릴 수 있으며,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생애가 걸릴 수 있다. 이 진리는 훨씬 더위대한 진리, 즉 ‘너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곧 남들을 위해 하는것이고, 남들을 위해 하는일이 너 자신을 위해 하는것’이라는 진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와 남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 행성을 걸었던 모든 선각자들은 이 진리를 가르쳐왔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내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40-옮긴이]”).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현실에서는 거의 적용될 수 없는 비전(秘典)상의 위대한 진리로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적용할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비전상의” 진리다.
이 진리가 없다면 관게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된다. 따라서 관계의 문제에서는 이 진리를 기억하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
자, 이제는 이 지혜의 순수하게 영적이고 비전적인 측면에서 물러나 실제 적용의 문제로 돌아가보기로 하자.
좋은 뜻과 좋은 열의를 지닌 사람들, 또 꽤 강한 종교성을 지닌 사람들은 흔히 낡은 지혜의 가르침에 따라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많은 경우(대개의 경우) 이런 행동은 계속해서 남용(濫用)과 푸대접을 낳고, 고작해야 관계의 역기능을 가져올 뿐이다.
결국 남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 한 그 사람은, 즉 쉽게 용서해주고, 연민을 나타내며, 문제 있는 행동을 계속 눈감아준 그 사람은 심지어 신에 대해서조차 억울해하고 분개하고 불신한다. 설사 사랑이란 이름을 걸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신이라는 작자가 그처럼 끝없는 고통과 불쾌함과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신은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은 단지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 너희 자신도 포함시키라고 요구할 뿐이다.
신은 한 걸음 더 나가, 자신을 우선시 하라고 제안하고 권한다.
나는 너희 가운데 일부가 이것을 불경이라 말하고, 따라서 이건 ‘내’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리란 걸 잘 알고 있다. 또 다른 일부는 거기서 한술 더 떠, 이것을 내 말로 받아들이되, 신적이지 못한 행동들을 정당화하려는 자기네 목적에 맞게 그것을 멋대로 해석하고 왜곡할 것이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가장 고귀한 의미에서 자신을 우선시 하는 건 결코 신적이지 못한 행동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일을 한 것이, 신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결과로 드러난다면, 문제는 자신을 우선시 한 데 있는 게 아니라,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지를 잘못 이해한 데 있다.
물론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이냐를 판단하려면 먼저 자신이 하려는 게 무엇인지도 판단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중요한 단계를 간과하고 넘어가곤 한다. 너희는 무엇에 “이르고자” 하는가? 네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다면,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비전적 측면들은 제쳐놓고 현실 문제로 들어가서, 너희가 남용당하는 상황에서도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인지만 알아낸다면, 적어도 너희는 그 남용만은 그만두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와 가해자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남용해도 좋은 상황에서는 가해자 자신조차도 남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용할 수 있는 상황은 가해자를 치유해주는 게 아니라 망치게 만든다. 가해자가 자신의 남용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개달을 때, 그는 거기서 뭘 배우겠는가? 반대로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이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음을 깨우칠 때, 그는 무엇을 깨닫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남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게 반드시 남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허용해준다는 뜻은 아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다루면서 일찌감치 이런 진리를 터득한다. 어른들이 다른 어른들을 상대할 때는 그렇게 빨리 이 진리를 터득하지는 못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들을 상대할 때 역시 그러하고.
그러나 독재자들이 제멋대로 활개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만, 독재자임을 그만두게 하려면 거꾸로 그들에게 독재를 행사해야 한다. 너희 자신에 대한 사랑과 독재자에 대한 사랑이 그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존재하는 게 오직 사랑뿐이라면 어떻게 인간들이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까?” 라는 너희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따금 인간들은 자신의 참모습, 즉 전쟁을 혐오하는 존재라는 가장 위대한 진술을 하기 위해 전쟁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다.
이따금 너희는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선각자들 가운데는 너희가 그 모든 걸 기꺼이 버릴 때까지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고 가르친 이들도 있다.
그러므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자아를 “갖기”위해서, 결코 전쟁에 나서지 않는 사람이라는 자아상(像)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역사는 인간들에게 그런 결단을 요구해왔다.
가장 개인적이고 사적인 관계들에서도 똑같은 것이 적용된다. 인생을 살다보면 ‘자기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아님’의 측면을 보여야 하는 경우를 한두번 이상씩은 겪기 마련이다.
이런 얘기는 이상주의자인 젊은이들에게는 대단히 모순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어느 정도 세상을 산 사람들이라면 그다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성숙한 사람들이 회고해보면, 신성한 이분법으로 비칠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에게서 상차받았을 때, 상대방에게 “상처를 되돌려”줘야 한다는 건 아니다(국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고). 이것은 단지 누군가가 계속해서 해를 끼치도록 내버려두는 게 너희 자신을 위해서나 그 사람을 위해서나 가장 사랑에 찬 행동은 아니란 이야기다.
이런 주장은, 지고한 사랑이라면 소위 악이란 것에 대해 어떤 강제도 가할 필요가 없다는 일부 평화주의 이론들을 무색하게 만들 것이다.
여기서 논의는 다시 한번 비전(秘典)으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을 진지하게 탐구하자면 “악”이라는 용어와 그에 관련된 가치판단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객관현상과 체험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삶의 목적 자체가 점점 더 커져가는 무수한 현상들의 무더기 속에서, 소위 악이라는 몇가지 산재된 현상들을 가려내길 너희에게 요구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자신도, 또 다른 어떤 것도 선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자신을 인식하거나 창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너희는 소위 악이라는 것과 소위 선이라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악이라 규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 최대의 악이다.
너희는 이 삶에서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상대계 속에 살고 있다. 이것, 즉 너희가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규정하며, 그렇게 하고자 할 때는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하는 체험의 장을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관계의 기능이자 동시에 목적이다.
신처럼 되는 것이 순교자가 되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희생자가 되는 걸 뜻하지 않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상처와 위험과 상실의 모든 가능성이 제거된 상태인 깨달음으로 가려면, 상처와 위험과 상실을 너희 체험의 일부로 인정하고, 그런 체험과 관련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다, 너희는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때때로 남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 때문에 상처받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를 이곳에서 그곳으로(상처받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으로-옮긴이) 가장 빨리 데려다 주는 것은 완벽한 정직이다. 즉 어떤 것에 대해 너희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기꺼이 보여주고 인정하고 밝히고 선언하는 것. 네 진실을 말하라. 부드럽게, 하지만 그러나 완전하고 일관되게. 그리고 체험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면 쉽고 빠르게 자신의 진실을 바꾸도록 하라.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어도 신이라면 네가 관계속에서 상처받을 때 “거기서 비켜 서. 그게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게하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네가 상처를 입고 있다면 그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게 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제 네가 할 일은 그 관계가 네게 무엇을 뜻하는지 판단하고, 그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너는 ‘되고자 하는 자신’을 선택하고, 또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저는 제가 속한 관계들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나, 저를 신의 눈에 흡족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참을성 많은 아내나 왜소한 남편, 혹은 제가 속한 관계들의 희생자가 될 필요는 없는 거군요.
맙소사, 물론 그럴 필요가 없지.
그리고 저는 제가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기 위해, 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제 의무를 다했다”는 걸 보이게 위해, 상대가 제 권위나 자존심을 공격하고, 제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주는 걸 그대로 참고 견딜 필요도 없구요.
한 순간도 그럴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제발 신이시여, 제가 관계에서 해야할 약속들은 무엇이고 제가 지켜야 할 규칙들은 무엇입니까? 관계에는 어떤 의무들이 따르나요? 제가 추구해야 하는 지침들은 어떤 것입니까?
너로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대로 한다면 너는 아무 지침도 가지지 못할 것이고, 네가 하는 모든 약속은 그 즉시로 무의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답은 이렇다. 너는 아무 의무도 없다. 관계에서도, 삶 전체에서도.
아무 의무도 없다구요?
어떤 의무도, 어떤 제한이나 한계도, 어떤 지침이나 규칙도 없다. 어떤 환경이나 상황도 너희를 구속하지 않고, 어떤 법전이나 법률도 너희를 제한하지 않는다. 너희는 어떤 죄로도 벌받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너릐를 벌줄 수 없다. 신의 눈에는 “죄지음”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건 “규율없는” 종교의 일종이군요. 그건 영혼의 무정부상태입니다. 그래 갖고서야 무슨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너희가 자신을 창조하는 일을 하고 있는 한. 하지만 이와 반대로 너희가 다른 사람이 바라는 존재가 되는 걸 자신의 일로 여긴다면 규칙이나 지침 없이는 만사가 어려워지리라.
그러나 사려깊은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만일 신께서 제가 특정 유형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면, 어째서 애초부터 저를 그런 식으로 창조하지 않았습니까? 신께서 바라는 존재가 되기 위해, 지금의 자신을 “극복”하려고 왜 이토록 고생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진지하게 탐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점을 알려할 것이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당연히 떠오를 의문이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은 내가 너희를 나보다 더 열등한 존재로 창조했다고 믿게 만들려 한다. 온갖 부조리에 맞서 싸우면서,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부여해줬다고 가정하는 온갖 천성들과 맞서 싸우면서, 나처럼 될 기회를 너희에게 주고자 그렇게 창조했다고.
이른바 이런 천성들 가운데는 죄짓는 성향도 들어 있다. 너희는 죄 속에서 태어났고, 죄 속에서 죽을 것이며, 죄짓는 것은 너희의 본성이라고 배웠다.
너희 종교들 가운데 하나는 심지어 너희가 이것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가르치기까지 한다. 너희의 행동은 다 쓸데없고 무의미하다. 너희의 어떤 행동이 너희를 “천국에 갈” 수 있게 해주리란 생각은 오만이다. 천국(구원)에 이르는 길은 딱 하나뿐이다. 그것은 너희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의 아들을 너희의 대리인으로 받아들일 때 신이 너희에게 내리는 은총을 통해서이다.
일단 은총이 내리면 너희는 “구원받는다”. 하지만 은총이 내리기 전까지 너희의 모든 행동은, 삶과 선택과 자신을 향상시키고 가치있게 만들고자 의지를 가지고 시도하는 모든 일들은, 아무 효과도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너희는 가치없는 존재로 태어났기에 자신을 가치있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너희는 그런 식으로 창조되었다.
어째서? 그건 오직 신만이 아신다. 아마도 신이 실수를했으리라. 아마도 신은 그 실수를 바로 잡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신은 그 모든 걸 다시 하길 바랄지도 모르지. 하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으니, 어떻게 한다지……
저를 놀리시는군요.
아니 너희가 나를 놀리고 있다. 너희는 신인 내가 애초에 불완전한 존재들을 만들어놓고 나서는, 완전한 존재가 되라, 안 그러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협박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너희는 세상 체험을 몇천년간 하고 난 어느 시점에서 내가 마음을 누그러뜨리고는, 이제부터 너희가 꼭 선해져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자신이 선하지 않을 때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항상 완벽한 한 존재를 너희의 구원자로 받아들여 완벽에 대한 내 갈증을 해소시켜주면 된다고 말한다. 또 너희는, ‘단 하나의 완벽한 존재’인 ‘내 아들’이 너희 자신의 불완전함, 즉 내가 너희에게 부여한 불완전함에서 너희를 구원해주었노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신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저지른 짓에서 너희를 구원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너희들 다수가 내가 이뤄낸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 과연 누가 누구를 놀리고 있는가?
이 책에서 당신이 기독교 근본주의(20세기 초 미국에서 모더니즘에 반발하여 일어난 신교운동으로 여기서는 진화론을 배척하고 성서의 창조설을 굳게 믿으며, 처녀 잉태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에 의한 속죄와 그리스도의 재림 등에 대한 믿음을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것으로 본다-옮긴이)를 정면으로 공격한 건 이것이 두번째인 것 같군요. 저로서는 놀랍습니다.
너는 “공격”이라는 용어를 골랐구나. 난 단지 그 주제에 몰두하고 있을 뿐인데. 게다가 주제는 네가 말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다. 주제는 네가 말한 신의 본성 자체, 신이 인간과 맺는 관계의 성격 자체이다.
여기서 그 문제가 제기된 것은, 우리가 관계와 삶 그 자체에서 의무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참된 자신’ 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의무가 따르지 않는 관계란 걸 믿지 못한다. 너는 완전하게 자유로운 삶을 “영혼의 무정부상태”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신의 위대한 약속이라 부르겠다.
오로지 이 약속의 맥락 속에서만 신의 위대한 계획은 완성될 수 있다.
너는 관계에서 어떤 의무도 지지 않는다. 기회만을 가질 뿐.
종교의 주춧돌이나 모든 영성의 토대가 되는 건 의무가 아니라 기회다. 네가 이와 다르게 생각하는 한 너는 핵심을 놓칠 것이다.
관계, 너희가 맺는 모든 관계는 너희 영혼이 사용할 완벽한 도구로서 창조되었다. 모든 인간관계가 성스러운 터전인 것은 그 때문이며, 모든 인간관계가 신성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점에서 많은 교회들이 결혼을 성스러운 일(聖事)로 여기는 건(혼배성사-옮긴이) 잘하는 일이다. 결혼에 따른 신성한 의무들 때문이 아니라 결혼이 제공하는 유례없는 기회 때문에, 그것은 성사가 된다.
관계를 맺고 유지할 때 의무감에서 뭔가를 해서는 절대 안된다. 네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관계가 ‘참된 자신’을 판단하고 ‘참된 자신’이 되게 해주는 영광스런 기회란 점에서 그렇게 하라.
그 말씀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상대방과의 관계가 잘 돌아가지 않을 때면 자꾸 그 관계를 포기하곤 합니다. 그로인해 어린애처럼 딱 하나의 관계만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지점에 있는 관계의 끈들만을 잡아왔습니다. 저는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그것에 대해 알게 될까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너는 마치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것이 성공인 양 말하는구나. 오래 유지하는 것과 일을 잘 해내는 걸 혼동하지 마라. 이 행성에서 네 직무는 네가 관계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 알아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판단하고 체험하는 것임을 잊지 마라.
이것은 수명 짧은 관계를 옹호하는 얘기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꼭 관계를 오래 유지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럴 필요는 없으나, 수명 긴 관계 중 다수는 상호 성숙과 상호 표현, 상호 성취를 이룰 좋은 기회가 된다는 점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런 관계는 나름의 보상을 갖고 있다.
압니다, 알아요! 저도 늘 그럴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럼 그런 관계를 맺으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올바른 이유를 가지고 관계를 맺는지 확인하라.
(나는 여기서 상대적인 의미로 “올바른”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내가 “올바르다”고 하는 건 너희 삶의 더 큰 목적과 관련하여 올바르다는 뜻이다.)
전에 내가 지적한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된” 이유로 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면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공허감을 채우고, 사랑하거나 사랑받기 위해서. 이런 이유들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기심을 충족시키고,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성생활을 충족시키고, 과거의 관계에서 벗어나고, (혹은 내 말을 믿든 안믿든)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관계를 맺는다.
이런 이유들 중 그 어떤 것도 바라던 걸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관계 자체도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저는 그런 이유들 때문에 관계를 맺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 내 보기에 너는 무슨 이유로 관계를 맺는지 모르는 것 같다. 내 보기에 너는 관계를 내가 말한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목적을 의식하면서 관곌ㄹ 맺은 게 아니다. 내 보기에 네가 관계를 맺은 건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바로 맞히셨습니다.
그리고 내 보기에 너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왜 “사랑에 빠졌는지” 돌아보지 않았다. 너는 뭣 때문에 그 관계에 반응을 보였는가? 어떤 욕구, 혹은 욕구들이 충족되기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욕구충족에 대한 반응이다.
사람은 누구나 욕구를 갖고 있다. 너는 이걸 바라고 상대방은 저걸 바란다. 너희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욕구를 충족시킬 기회를 본다. 그리하여 너희는 암암리에 교환조건에 동의한다. 만일 네가 가진 걸 내게 준다면, 나도 내가 가진 걸 주겠다.
그것은 일종의 거래다. 하지만 너희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너희는, “난 너와 아주 많이 거래한다”고 말하지 않고, “난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면 서로에 대한 실망이 시작된다.
전에도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랬지. 그리고 너도 전에 이런 걸 물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가끔 이 책이 같은 자리를 맴돌면서 같은 문제를 몇번이고 다루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인생살이처럼 말이지.
이크, 당했군요.
너는 묻고, 나는 그저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여기서의 과정이다. 네가 같은 질문을 세 번 다른 방식으로 묻더라도 나는 그때마다 그 질문들에 대답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제가 당신이 다른 대답을 해주리란 기대를 품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제가 관계에 대해 물으면 당신은 거기서 낭만성을 왕창 빼버립니다. 관계에 대해 골치아프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사랑에 흠뻑 빠져드는 게 뭐가 잘못인가요?
전혀 잘못이 아니다. 네가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런식의 사랑에 빠져라. 그러나 만일 그 사람들과 평생동안 관계를 가지려 한다면, 너는 아마 좀 생각을 해보고 싶을 것이다.
좋습니다, 좋아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다구요. 그런데 당신은 참냉혹한 분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건 진실과 관련된 문제다. 진실은 냉혹하다. 진실은 너희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면서 사방에서 너희를 향해 포복해 들어온다. 진실은 때론 지겨운 것일 수도 있다.
좋습니다. 그래서 저도 관계를 오래 유지해줄 수 있는 방안들을 찾고 싶습니다. 당신은 목적을 가지고 관계를 맺는 것이 그런 방법들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다. 너와 네 짝이 목적에 동의하는지 확인하라.
만일 너희 둘 다가 너희 관계의 목적이 의무가 아니라 기회를 창조하는 것, 즉 성장할 기회, 자기표현을 충분히 할 기회, 자신의 삶을 그 최고잠재력으로까지 끌어올릴 기회, 너희가 자신에 대해 지금껏 가져왔던 모든 잘못된 생각과 열등한 관념들을 치유할 기회, 너희 두 영혼의 교류를 매개로 신과 궁극적으로 재결합할 기회를 창조하는 것임에 의식적으로 동의한다면, 너희가 이제껏 해왔던 식의 맹세가 아니라 내가 방금 말한 식의 맹세를 한다면, 그 관계는 아주 멋진 음조(音調)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은 박자가 잘 맞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할 것이며, 대단히 순조로운 출발이 될 것이다.
그래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요.
만일 너희가 삶에서 보장을 원한다면, 너희는 삶을 원하는 게 아니다. 너희는 이미 쓰여진 각본대로 시연(試演)하고 싶을 뿐이다.
삶은 그 본성에서 어떤 보장도 가질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삶의 목적 전체가 훼손당할 것이다.
좋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제 관계가 “아주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칩시다. 이제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러가지 도전과 어려운 순간들이 따를 것임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그것들을 피하려 들지 마라. 감사하면서 환영하라. 그것들을 신에게서 받는 소중한 선물로 여겨라. 너희가 관계와 삶 속으로 들어와서 이루고자 했던 바를 할 수 있는 영광스런 기회로 여겨라.
이런 어려운 시기 동안에는 네 짝을 적이나 방해물로 보지 않도록 무척 조심해야 한다.
사실 누구도, 그리고 무엇도 적으로 보지 마라. 심지어 문제로도 보지마라. 모든 문제를 기회로 보는 기술을 기르도록 하라. 자신이……
……압니다, 알아요. “‘참된 자신’ 이 되고, ‘참된 자신’을 결정할 기회”로 보란 말씀이시죠.
맞았다! 이해해가고 있구나! 이해해가고 있어!
저한테는 아주 따분한 삶으로 보이는데요.
그렇다면 네가 시야를 너무 낮게 잡고 있는 것이다. 네 시계 범위를 넓혀라. 네 전망을 더 깊게 하라. 네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신에게서 보라. 네 짝에게서 더 많은 것을 보라.
상대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상대에게서 본다고 해서, 그 관계에 해가 되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상대가 네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두려움 때문이다. 만일 네가 상대에게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있음을 상대가 깨닫는다면, 상대는 마음놓고 네가 이미 명확하게 보고 있는 것을 네게 보여줄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지요.
그 비슷한 면이 있지. 하지만 나는 여기서 “기대”라는 용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대는 관계를 망치기 마련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한테서 보는 걸 자신에게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표현하자. 우리의 전망이 높아질수록, 상대방은 우리가 보여주는 자신의 일면에 접근하거나, 그 일면을 드러내려는 의지도 강해질 것이다.
진실로 축복받은 관계들은 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치유과정, 곧 그들이 자신에 관해 품고 있던 모든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과정의 일부가 아니겠느냐?
그것이 바로 내가 여기 이 책에서 너를 위해 하고 있는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신의 일이다. 영혼의 일은 너 자신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신의 일은 그밖의 모든 사람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남들을 ‘그들 자신’으로 보는 것, 그들에게 ‘그들 자신’을 기억해내게 하는 것으로 이런 일을 하는거군요.
너희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네게 하는 것(그들이 너희를 믿지 않을 것이기에 대단히 어려운 방법이다)과, 너희 자신이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는 것(그들의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만 있으면 되므로 훨씬 더 쉬운 방법이다)으로. 너희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하다 보면 결국 그들도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네게서 자신을 보게 될 것이기에.
나는 영원한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이 땅에 많은 선각자들을 보냈다. 그리고 세례 요한 같은 이들을 사자(使者)로 보냈다. 그들은 강렬한 언어로 진리를 전달했고, 생생하게 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특별한 사자들은 비범한 통찰력과 영원한 진리를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권능에 더해, 복잡한 개념들을 일반 대중이 이해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네가 바로 그런 사자다.
제가요?
그렇다. 너는 이걸 믿느냐?
정말로 받아들이기 어려운데요. 제 말은, 우린 누구나 다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너희는 누구나 다 특별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에는 자만이 깃들어 있습니다. 적어도 제 경우에는요. 그런 자만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놀라운 임무를 수행하도록 “선택받은” 사람이란 느낌을 어느 정도씩 갖는 거죠. 저는 항상 그런 자만과 싸워야 했습니다. 자만에서 벗어나 자신을 다지려고, 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정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걸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씀은 제 자만을 부채질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고, 또 저는 평생을 제 자만과 싸우는 데 써왔으니까요.
나도 네가 그랬던 걸 알고있다.
그리고 그다지 신통한 결과를 거두지 못한 것도 알고 있지.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신에게로 올 때면 너는 항상 자만을 버렸다. 너는 부자가 되거나 명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알고자 하는 깊고 순수한 갈망에서 명확함을 달라고 간구하고, 통찰력을 달라고 하늘에 간청하면서 많은 밤을 보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너는 몇번이나 되풀이해서 내게 약속했다. 진리를 깨우치게 해주면 남은 평생 동안, 깨어 있는 모든 시간 동안, 불변의 진리를 전하는 일을 하겠노라고…… 영광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 아니라, 네 내면 깊고 깊은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그치게 하고, 그들에게 기쁨과 환희를 맛보게 해주고, 그들을 돕거나 치유해주고, 네가 항상 체험해온, 신과 동업하고 있다는 느낌을 남들이 다시 지닐 수 있길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노라고.
맞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나는 너를 내 사자로 택했다. 너와 다른 많은 사람들을. 이제부터 세상은 드높이 울려퍼질 수많은 트럼펫들을 필요로 할 것이기에. 이제부터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진리와 치유의 말을 전할 수많은 목소리들이 필요해질 것이다. 세상에는 영혼의 일에 동참하고 신의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수많은 심령들이 필요해질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보라. 정말로 네가 이것을 모른다고 하겠느냐?
아뇨.
솔직하게 말했을 때, 너는 이것이 바로 네가 세상에 온 이유임을 부정할 수 있는가?
아뇨.
그럼 너는 이책을 가지고 너 자신의 영원한 진리를 판단하고 선언하며, 내 영광을 온 세상에 명확히 밝힐 준비가 되었는가?
제가 당신과 방금 전에 나눈 대화들도 이 책 속에 꼭 포함시켜야 합니까?
네가 꼭 해야 하는 일은 없다. 명심하라. 우리 관계에서 너는 어떤 의무도 지지 않는다. 오직 기회만을 가진다. 이것은 네가 평생 고대해온 기회가 아닌가? 너는 아주 젊었을 때부터 이런 소명과 그것을 제대로 수행할 준비에 몸과 마음을 바쳐오지 않았던가?
그랬지요.
그렇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말고, 할 기회가 주어진 일을 하도록 하라.
어째서 너는 우리 책에 이 모든 내용을 빠짐없이 실으려 하지 않는가? 내가 너를 비밀스런 사자로 삼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신의 사람으로 선언하자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너는 세상이 신의 사람이나 신의 참된 사자가 아닌, 사실상 다른 어떤 존재로 너를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보낸 사자들은 하나같이 모욕당해왔다. 영광을 얻기는커녕 그들이 얻은 것은 마음의 고통뿐이다.
너는 그럴 용의가 있는가? 나에 관한 진실을 말하느라 마음의 고통을 당할 용의가? 네 동료인 인간들의 조롱을 감수할 용의가 있는가? 완전히 자각한 영혼이라는 더 위대한 영광을 위해 지상에서의 영광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신이시여, 당신은 갑자기 이 책을 아주 무겁게 만드는군요.
이런 이야길 농담으로 하길 바라는 거냐?
이쯤에서 좀 가볍게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좋다! 나야 깨우쳐주는 건 언제나 환영이지. 우리가 이 장(章)을 농담으로 끝내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좋은 생각이십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아니. 하지만 네게는 있다. 그림 그리는 어린 여자애 얘기를 해봐라.
아, 예, 그거요. 좋습니다. 그러니까, 하루는 엄마가 부엌으로 들어왔다가 어린 딸이 식탁 위에 크레용을 잔뜩 어질러놓은 채 뭔가 열심히 그리는 걸 보고 물었지요. “얘야, 뭘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있니?” 그러자 그 예쁜 딸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을 그리고 있어요, 엄마.” 엄마는 도와줄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아주 근사하구나.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하느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진짜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그러자 어린 딸은 이렇게 조잘댔습니다. “내가 다 그리게 가만 내버려두기나 하세요.”
그건 정말 아름다운 농담이다. 너는 어떤 점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아느냐? 그 어린 여자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자신이 나를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죠.
이제 나도 네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마. 이걸로 이번 장을 끝내면 될 것이다.
좋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갑자기 책 쓰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는 날마다, 때로는 한밤중에도 새로운 영감을 잡아내려고 책상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그에게 무엇을 하느랴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신과 나누는 아주 긴 대화를 적고 있는 중일세.”
친구는 너그럽게 말했지. “그거 아주 근사하군. 그런데 자네도 알다시피, 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그러자 그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다 적을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기만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