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정을 떼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사랑하는, 혹은 가까운 부모형제, 친척, 지인 등이 돌아가신 후 귀신, 영혼 등의 모습으로 산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번 이야기는 필자인 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아버지께 일어난 일입니다.
때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 지방 중학교를 다니던 저는 근처 시골의 할아버지댁에 자주 놀러갔습니다.
어리지만 손이 야무지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솜씨가 좋아 할아버지 농사일을 자주 도와드리곤 했죠.
그 때만 해도 학원 등이 많을 때도 아니고 공부에 취미도 없던 저라 아버지께서도 마치면 할아버지댁에 가서 일좀 도와드리고 놀고 있으라는 식으로 많이 보내셨습니다.
할아버지댁은 할아버지께서 젊은 시절에 직접 황토흙과 짚단을 섞어 지으신 흙집이었습니다.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농사일 도와드리고 논, 밭 뛰어다니며 놀던 철없는 시절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정정하시기만 하시던 할아버지께서 농협에서 주관하는 종합건강검진을 받고 돌아오셨는데,
검진상에서 종양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고 큰병원을 가보라고 하더군요.
얼마 후 큰병원에서 폐암 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정정하시던 할아버지께서 일흔의 나이로 먼곳으로 가셨습니다.
사람이 건강하다가도 자신이 중병에 걸렸다는 것을 아는 순간 정신과 마음이 쇠약해지면 몸은 금방 시들어버린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부터 시골동네라 흙집 안방에 할아버지 시신을 모시고 마당에 자리를 펴 동네 어른들을 모셔가며 3일장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어린저는 실감이 안 나서일까요. 슬픔보다는 동네어르신들 오시면 음식갖다 드리고 잔심부름에 치이면서 어영부영 3일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첫째 날, 둘째 날 많은 조문객들이 다녀가신 반면 마지막 3일 째는 멀리사시는 친척분들을 제외하고는 발길이 뜸해지더군요.
저희 가족, 가까운 친지들은 작은방, 아랫방 마당등에 둘러앉아 서로 슬픔을 보듬어 주고 어른들은 술잔을 기울이시며 그렇게 슬픔을 녹여 가셨드랬죠
유독 할아버지께 서운한 감정이 많으셨던 저희 아버지께서는 6남매 중 셋째 아들이셨는데,
어릴 적 공부를 하고 싶으셨지만 할아버지께서는 "형편이 좋지 않아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만 공부를 하고 셋째인 너는 힘이 좋고 손이 야무지니 농사일을 거들라" 하셨답니다.
그게 많이 서운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제 나이 즈음에 가출을 하셔서는 전국팔도를 돌아다니시며 안 해 본 일이 없으셨다 하더라구요. 어머니도 그 때 만나신 거구요.
그렇게 외지에서 가정을 꾸리시고 저희 누나를 낳고서야 할아버지께 용서를 빌며 고향으로 오셨던 거라 하시더군요.
어릴 때 잘 모시지 못하셨던 죄송스러움일까요.. 자신에게 잘해주지 못한 데에 대한 서운함 때문일까요.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 저희 아버지가 유독 슬퍼하셨습니다. 그 좋아하시는 술잔을 몇잔 기울이시지도 못하고 금세 취하셨죠.
소피가 마렵다며 밤 12시 넘어서 집 뒷마당 쪽으로 홀로 가셨던 아버지가 10분, 20분이 되어도 돌아오시지 않기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저와 어머니께서 가보려는 찰나
"으아아아~~~~~악!!!"
소리와 함께 하얗게 질리신 아버지께서 마당으로 뛰어오시더니 기절을 해버리신 겁니다.
기절을 하신 와중에도 계속 "아부지! 잘못했어요, 아부지!!" 하시면서 계속 경기를 일으키셨어요
그 모습을 본 할머니께서 흰 그릇에 물 한 바가지 떠가지고는 뒷마당으로 가시는 겁니다.
깜짝놀란 저는 할머니께서도 어떻게 되실까 싶어 말리려고 뒤따라갔더니
할머니께서 뒷마당 어두운 한켠에 서서는 물을 훠이훠이 뿌리시며,
"자식새끼 보고 싶어 그러우? 저놈 저거 당신 많이 그리워 하지 말라고 정 뗄라고 그러우?
내가 제사마다 맛있는 거 많이 챙겨 드릴테니 여기 시원한 물 한 모금 하시고 어서 가소" 하시는 겁니다.
그 순간 그때까지도 마당에서 발작을 일으키시던 아버지께서 거짓말처럼 한숨을 푹~내쉬며 잠에 드시는 겁니다.
다음 날 아버지께서 일어나신 후에 어른들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봤더니
구석에 소피를 보고 뒤로 돌아서는데 할아버지께서 등 뒤에 바로 딱 서 계시더랍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나랑 같이 가자!!!" 하고 무지막지한 힘으로 이끄시더랍니다.
반갑기도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몇 번을 뿌리치고 한걸음에 달려나오신 것까지만 기억이 나더랍니다.
이에 할머니께서 말씀해 주시더군요.
원래 조상들이 정을 떼지 못하는 자식들에게 다른 귀신들보다 더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못되게 하면 자식들이 크게 놀라서 정을 뗀다고..
아마 할아버지께서도 유독 각별한 마음이었던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못 잊고 오래 슬퍼할까 봐 정을 떼려고 나타나신 것이라 생각되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