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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2베충들 518에 대한 논리에 대한 반박
게시물ID : history_169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으아니내가..
추천 : 3
조회수 : 72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7/08 05:23:39
요즘은 다소 잠잠해졌지만 언제든 다시 꿈틀거리면서 나올 벌레들을 대비해서 반박 정리해보려고합니다.
파란색은 일12베충논리 갈색은 프랑스 대혁명입니다. 비교하시면서 보세요.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프랑스 대혁명도 폭동으로 규정되어야하는겁니다.
 
1.교도소 습격, 총기무장
광주 민주화운동의 총기무장 약탈 파괴는 민주화운동의 수준을 넘어선다. 전세계적으로 전례가 없음
 
프랑스 혁명이 시작될때 바스티유 감옥습격으로 총기 화약 탈취, 이후 귀족들의 영지의 약탈이 있었음 이 규모는 전국적으로 퍼짐
(아래는 그 근거 자료들)
“네케르의 파면” 소식에 민중과 부르주아들은 격분했고 7월 12일 수만명의 사람들이 앵발리드(Invalides, 보훈병원)로 몰려가, 자기 방위와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무기와 탄약을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7월 14일, 군중이 앵발리드에서 3만정의 소총을 빼앗고 탄약 조달을 위해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다. 이것은 상퀼로트들의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불만이 절대주의의 상징인 바스티유로 향하게 한 것이다.
 
그 이후 약 1천 명이 '바스티유'라 알려진 성으로 행진했다. 바스티유는 전통적으로 정치범을 구금하는 장소였지만, 그날에는 일곱 명밖에 없었으며, 주로 위조범이나 '광인'들이었다. 수비군은 약 60명으로 로네이 후작이 지휘하고 있었다. 오후 1시 30분경, 군중은 정문을 부수었고, 그들이 바깥쪽 구내로 진입하면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네 시간이 지나 습격한 이들 가운데 수십 명이 죽었을 무렵 성문을 부수는 데 쓸 대포가 도착했고 수비대는 항복했다. 로네이 후작은 집단 폭행으로 죽었고 군중들은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폭정의 상징인 바스티유는 신속하게 허물어졌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스티유 습격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2009.8.20, 마로니에북스)
 
2. 518은 김대중 구명운동이었다.
518은 민주화 시위가 아닌 당시 정치적 상황을 전혀모르던 무지함에서온 오직 지역감정에 의한 김대중 구명운동의 일환이었다.
 
프랑스 혁명 또한 재정장관 자크 네케르의 해임이 어느정도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두사람의 정치적 위기는 작은 요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굵직한요인으로는 518은 전두환의 불법적 권력 탈취, 프랑스혁명은 구제도의 모순입니다.

7월 12일, 평민에 협조적이었던 재정장관 자크 네케르를 왕이 해임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점점 더해 가는 불안 상태가 보수주의 반동에 진압당할 것을 두려워한 상퀼로트(글자 그대로는 '반바지를 입지 않은 이들'이라는 뜻으로, 평민을 의미한다)들은 파리의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스티유 습격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2009.8.20, 마로니에북스)
 
3.누가 먼저 공격했는가
시위대의 과격성 공격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일방적인 진압군 매도
진압군의 도청앞 사격전 시위대가 버스로 난입해 진압군 병사들이 깔려죽었다
 
위 자료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프랑스 혁명중 바스티유감옥을 먼저 습격한것으로 나와있습니다. 또한 혁명기의 시민들의 폭력성 또한 잘 드러내 주는 자료입니다.
 
바스티유 사령관 드 로네이는 붙잡혀 시청으로 끌려갔다. 흥분한 군중은 길에서 그에게 린치를 가하려 했지만, 시민 대표가 그에게도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시청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시청에 도착하자 군중 속에 몰린 드 로네이는 그레이브 광장에서 살해당해 목을 잘렸다. 3명의 장교와 3명의 수비병도 사령관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또한 시장 자크 드 플레셀도 이날 사건에 대한 대응을 “배신행위”로 비난받아 시청에서 나온 직후 형식적인 인민재판을 받고 살해되어 팔레 루아얄 광장에서 목이 잘렸다. 군중은 그들의 목을 창 앞으로 찔러 높이 들고 시청 앞 팔레 루아얄 광장을 지난다. 이후 7월 22일에도 고위관리였던 푸론이 험한 취급을 받은 후 살해되었고, 또한 같은 고관이었던 베르치에 드 소뷔니도 이날 창 목에 꿰여 돌림을 당하게 된다.
총으로 무장하고있는 진압군에게 무조건적으로 과격성 공격성을 억눌러라? 세계사적으로 위대한 혁명으로 칭송받는 프랑스 혁명또한 과격성이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이후 프랑스혁명은 전쟁으로, 518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4.또한 일2베충들이 근거로 대고 있는 북한군 개입설
그쪽과 많이 친한 tv조선에서 부정한 근거없는 주장입니다. 아래링크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638
518민주화운동과 프랑스 대혁명에서의 초기 유사성으로 폭동이라는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그리고 남, 북 대립의 특수성을 이용하여 프랑스 혁명의 예와 다르다는 주장을 북한군 개입이 없다는것을 확인함으로써 비슷한 조건이 성립된다는것을 보였습니다.
아직 학생신분이라 자료에 모자람이 있으며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달게 태클 받겠습니다. 추후 일12베충들의 참신한 헛소리가 나오면 보충할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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