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한반도사는(史) 짧은 역사가 아닙니다.
활동범위는 좁았지만 그 역사가 무려 2000년이 넘습니다.
활용할 문화적 자원이 부족하다고 하기엔 너무 역사가 방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장에 미국만 떠올려봐도 고작 200, 300년 정도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를 대표할만한 문화 컨텐츠가 꽤 많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서부개척시대의 총잡이들과 금주법시대의 마피아가 그것이죠.
우리와 역사나 활동범위, 문화권이 비슷한 일본에도 사무라이, 닌자 등
서양에 와패니즘(wapanism, 오타 아님)을 뿌리내리게 한 요소들이 있고요.
그런데 누가 말씀하셨다시피 일본의 무사계급도 말하자면 전형적인 봉건시대의 지역 깡패라고 할 수 있고
실제로 서양 중세 기사의 실체만큼이나 잔인하고 탐욕적이며 기회주의적인 속물들에 불과했습니다.
헌데 오늘날에는 일본도 한 자루로 자기 신념을 관철하는 풍운아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잠시 솔직해집시다. 유카타 입고 일본도 찬 무사 캐릭터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전 멋있습니다. 이건 부끄러워하거나 터부시해야 할 그런 게 아닙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기 문화를 잘 전파한 겁니다. 전세계에 그들의 것을 잘 팔아온 겁니다.
우리도 우리만의 독자적인 문화 요소가 있다는 걸 잘 압니다.
물론 몇몇 것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 너무 비슷하고
심지어 일부는 이미 중국이나 일본이 먼저 문화시장에서 선점해버린 것들까지 있죠.
하지만 찾아보면 분명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우리만의 것이 몇가지 있긴 합니다.
얼마전에 베오베에 올라왔던 그 글에 언급된 것들을 참고하자면
저는 여태 활이 메인 무기인 액션 만화를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그런 게 있었다 하더라도 저 정도의 미들(헤비보다 가볍고 라이트보다 무거운) 덕후가 전혀 모를 정도면
솔직히 아직 미개척된 소재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만들어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활이 메인 무기인 액션 만화.
또 하나, 선비를 떠올려봅시다. 선비하면 솔직히 대부분이 난감한 느낌이 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쾌남의 이미지가 있는 일본의 무사나 중국의 무림고수에 비해서
한국의 선비는 너무 조용하고 점잖은 이미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럴 때 고착된 이미지에 구애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기존의 이미지가 당장 써먹기 힘들 거 같을 땐 파괴하고 다른 이미지를 씌워버리면 됩니다.
또 수많은 군웅이 할거하는 봉건사회의 사무라이나 무림의 고수에 비해 하나의 왕조 아래 충성을 다하는 선비는
배경적인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판타지 세계관을 집어넣어버리거나 패러렐 월드처럼 세계관을 꾸며버리면 되죠.
선비는 존재하지만 조선시대는 아닌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버린다는 거에요.
본 적은 없지만 <충사>가 대략 그런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의 닌자는 뭐 진짜로 입으로 불을 뿜고 인을 그어 분신술을 썼겠습니까.
그냥 재밌고 멋있어 보이도록 온갖 괜찮아보이는 요소를 최대한 집어넣은 거지요.
하지만 누구도 그걸 전통의 파괴 혹은 본질(닌자)의 상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지요.
좀 더 다가가기 쉽고 멋있고 재밌게 바뀐 거지요.
바로 이런 게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더 중요한 건 이런 '독자적 소재'라는 것에 너무 억매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피아, 총잡이, 사무라이, 닌자를 소재로한 문화 컨텐츠들도 있지만
그런 캐릭터 소재에 편중하기 보다는 참신한 '주제의식'을 끌어들여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도 많잖아요.
미국 이민자의 아메리칸 드림을 그려낸 GTA4나 현대적 가족문제를 포괄적으로 그려낸 클라나드 같은 것들이요.
단지 어떻게 좀 더 좋은 주제를 찾고 그것을 더 감동스럽게 혹은 더 재밌게 표현할지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국 만화라고 해서 꼭 주인공이 김치를 먹고 한복을 입고 돌아다녀야 되는 게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