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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기사) 한국군의 베트남 위안부 운영의 진실과 박근혜 대통령의 전략
게시물ID : panic_840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천왕동석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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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5096회
댓글수 : 27개
등록시간 : 2015/10/23 10: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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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군, 베트남 여성들로 매춘소 만들어 
– 베트남 위안부 5천 명에서 3만 명 정도로 추산
– 박 대통령, 추락한 인기 회복하기 위해 일본 상대로 피해자 코스프레


This year, at the 96th anniversary of the Korean uprising against Japan in March 1, 1919, South Korean President Park Geun-hye reiterated her call for Japan to admit to the war crimes it had committed during World War Two. Yet, even as she relentlessly seeks an apology from Japan, Ms. Park has conveniently ignored the fact that during the Vietnam War, Korean troops raped, assaulted and barbarically slaughtered thousands of Vietnam comfort women. Ms. Park cannot escape blame and claim unverified reports. Why South Korea still refuses to apologize to the Vietnam comfort women is not as mysterious as it seems.

1919년 3월 1일 일본에 대항해 일어난 한국인의 봉기 96번째 기념일을 맞아 올해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 정부에 2차대전 중 저지른 전쟁 범죄를 인정할 것을 재차 촉구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사과할 것을 가차 없이 요구하면서도 박 대통령은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수천 명의 베트남 위안부들을 강간하고 폭행하고 야만적으로 학살한 사실은 편리하게도 무시해왔다. 박 대통령은 책임을 회피하며 근거 없는 보도라고 주장할 수 없다. 왜 한국이 아직도 베트남 위안부에게 사과하기를 거부하는지의 이유는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다.

Documents from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show irrefutable proof of South Korea’s abuses and wrongdoings during that period. Noriyuki Yamaguchi, then Washington bureau chief of the Tokyo Broadcasting System, mentioned in an article he wrote that in July 2014, the archives revealed a letter from the US military command stationed in Ho Chi Minh City (then Saigon) to Gen. Chae Myeong-sin, the military commander of South Korea in Vietnam. The letter referred to the illegal diversion of US supplies to South Korea, acts of prostitution in a supposedly “welfare center” where Vietnamese women were working, and US troops using that center for a $38 fee per visit.

미국 국가기록관리청의 문서는 당시 한국의 학대와 범죄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한다. 당시의 도쿄방송 워싱턴 지국장이었던 노리유끼 야마구치는 2014년 7월에 쓴 기사에서 국가기록관리청이 호치민시(당시에는 사이공)에 주둔한 미군 사령관이 파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고 말했다. 이 편지는 미국 물자의 한국으로의 비합법적인 전환, 베트남 여성들이 일하고 있었던 “복지 센터”로 사용되어야 할 시설에서의 매춘행위, 그리고 미군들이 매번 38달러를 내고 그곳을 방문했던 사실을 언급했다.

The above report is only one of many accounts of South Korea’s atrocities towards the Vietnamese people during the war. Elderly survivors have recounted their own horror stories of the sex slavery and massacres they went through at that time. In 2001, recognizing the veracity of the reports, then South Korean President Kim Dae-jung met with Vietnam President Tran Duc Luong and offered a direct apology for South Korea’s acts on the Vietnamese people during the war.

위에 언급한 기사는 전시에 베트남인들을 상대로 한국이 저지른 수많은 잔학행위 중 하나를 말해줄 뿐이다. 나이 든 생존자들은 당시에 자신들이 겪었던 성노예와 학살에 대한 공포스런 경험담을 말해왔다. 2001년 이러한 보고가 사실임을 인식하고 한국의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베트남의 트란 둑 루옹 국가주석을 만나 전시 베트남인에 대한 한국의 행위에 대해 직접적인 사과를 했다.

But the day after Kim’s message of apology, Park Gein-hye, then deputy leader of the Grand National Party, the opposition party at the time, criticized Kim’s statement, saying it “drove a stake through the honor of South Korea.” Looking back, it was an omen of things to come if she should lead the country someday.

하지만 김 대통령의 사과가 있었던 다음날 당시 야당 한나라당의 박근혜 부대표는 김대중 대통령의 성명을 비판하면서 “한국의 명예에 말뚝을 박았다”고 말했다. 돌아보면 이것은 그녀가 언젠가 한국의 대통령이 된다면 어떤 일이 있을지를 보여준 조짐이었다.

Seventy years and several apologies later, South Korean officials are still pressing Japan over the WW2 comfort women issue. Like an infant fixated on a vendetta, South Korea’s sense of entitlement is such that no amount of compensation or apology will satisfy them. Or is it really a simple case of overblown egomania? Old and new historical events might provide clues.

70년이 흐르고 몇 번의 사죄가 있은 후 한국 관계자들은 여전히 2차대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을 압박하고 있다. 복수에 집착하는 젖먹이처럼 한국의 자존감은 그 어떠한 보상이나 사죄로도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이것이 정말 과장된 병적인 자기중심적 사고의 사례에 불과할까?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인 사건들이 단서를 제공할 수도 있다.

In a case of karmic retribution for South Korea, the Vietnam comfort women issue has been brought to international awareness 40 years after the war ended. To recall, in 1991 Kim Hak-soon was the first Korean comfort woman living in South Korea to give a testimony about her alleged experience under the control of Japanese soldiers. It triggered a barrage of angry reactions against Japan and put the country under scrutiny for the reparation and atonement it should give to its victims. Now it is South Korea facing the very same situation. Long before the Vietnam comfort women came out and identified themselves, they already knew about their own atrocities but, through cunning and clever manipulation, managed to keep it under the radar of the mainstream media.

한국에 대한 업보 응징의 경우에 있어 베트남 위안부 문제는 종전 40년이 지나서 국제적 인식을 얻게 됐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1991년 김학순씨는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일본 군인들의 통제하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증언한 최초의 한국인 위안부였다. 그 증언으로 말미암아 일본에 대한 분노가 쏟아져 나왔고 희생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배상과 속죄를 위한 철저한 조사가 일본을 상대로 시작됐다. 이제는 한국이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됐다. 베트남 위안부들이 스스로 앞으로 나와 자신을 밝히기 오래전에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잔학 행위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교활하고 영리한 속임수를 통해 주류 언론매체에 포착되지 않도록 했다.

It took a visit to Vietnam by Yoon Mi-hyang in March to uncover the grim truth about the sex enslavement of Vietnam’s women by Korean and American troops. Yoon is president of the Korean Council for the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the non-profit organization formed to look into alleged crimes against women in Asia during World War Two, many of whom were Koreans. In 2012, the Council had set up the Butterfly Fund and extended their mission to help other women victims of war. Congo was the first country they identified. Little did they know that in Vietnam, they would find out about the horrors that their own countrymen, the Korean soldiers, had perpetrated.

윤미향씨는 한국과 미국 군인들에 의한 베트남 여성들의 성노예화에 대한 냉혹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3월 베트남을 방문했다. 윤 씨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 여성들- 다수가 한국 여성들이었다-에게 행해진 범죄들을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비영리 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대표이다. 2012년 정대협은 나비기금을 설립하고 다른 전쟁 피해자 여성들을 돕도록 그 활동을 확대했다. 콩고는 정대협이 찾아낸 첫 국가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베트남에서 자국 한국 군인들이 자행했던 참상들을 밝혀내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Another recent incident that has put Pres. Park in a negative light is the Sewol ferry disaster. On April 16, 2014, the South Korean ferry Sewol, carrying 476 passengers and crew, among them 325 high school students, was on its way from Incheon to Jeju island when it sank, killing more than 300 people, mostly the students. To date, nine are still missing. It was rumored that Pres. Park was nowhere to be found and she was with a former political aide said to be married then. Japanese journalist Tatsuya Kato, chief of Sankei Shimbun’s Seoul bureau, was singled out for printing this piece of information and defaming Ms. Park. He was charged and indicted. This incident has raised howls from international journalists amid concerns on press freedom in South Korea.

박근혜 대통령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비치게 만든 최근의 또 하나의 사건은 세월호 참사이다. 2014년 4월 16일 325의 고등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476명의 승객과 승무원들을 수송하던 세월호가 대부분 학생들인 300여 명의 목숨을 앗으며 침몰했을 당시 인천에서 제주도로 운항 중이었다. 지금까지 9명은 여전히 실종상태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당시 유부남이었다던 예전 정치 참모와 함께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산케이 신문 한국 지부장인 일본인 저널리스트인 가토 다츠야씨는 이 정보를 기사화하여 박근혜 대통령을 명예훼손한 것에 대해 유독 주목을 받았다. 그는 고발당하고 기소됐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의 언론의 자유에 대한 우려와 함께 전 세계 저널리스트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Park’s handling of the Sewol ferry disaster was widely criticized. In the seven hours leading to the disaster, she received 18 reports and her only response were two orders that were standard operating procedures. It was the committee secretary who acted as spokesperson before Ms. Park could face the public herself. The investigation into the botched rescue efforts, the cause of the sinking and the violation of safety rules have been assailed by the victims’ families as being controlled by Park’s government. Add to that her unfulfilled promise to raise the ferry from the bottom of the sea. At the first anniversary of the sinking, the families refused to meet the president and promised to stage regular protests.

세월호 참사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대처 방법은 여러모로 비난을 받았다. 참사가 일어나고 있는 7시간 동안 그녀는 18번의 보고를 받았고 그녀의 유일한 대응은 의례적인 처리 규정에 따른 두 가지 지시 사항에 불과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 전 대변인으로 활동한 사람이 위원회 비서였다. 실패한 구조 작업, 침몰 원인 및 안전 수칙 위반에 대한 조사는 박근혜 정부에 의해 좌지우지됨에 따라 희생자 유가족들로부터 비난을 사고 있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인양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도 역시 비난을 받는다. 세월호 침몰 1주기에 유가족들은 대통령과의 만남을 거부했으며 지속적인 투쟁에 돌입하겠다고 말했다.



(혐 주의 : 기사 본문 포함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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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fort Women Memorials and Resolutions Spring Up in the US

위안부 추모비와 결의안들이 미국에서 갑자기 시작되다

Some US politicians have been quick to cash in on the comfort women issue. When House Resolution 121 sponsored by Rep. Michael Honda of Silicon Valley, Calif., was passed in 2007, it was a go-signal for politicians to cater to the wishes of the South Korean community in their electoral areas. In the guise of advancing public awareness to the injustice done to South Korean women, resolutions and statues of comfort women have been put up in cities around the United States. Local Korean-American organizations in the area applied pressure on officials to yield. These particular “voting areas” have a large community of Korean-Americans who can swing votes when elections come around.

몇몇 미국 정치인들은 종군 위안부 문제를 재빨리 이용했다. 지난 2007년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 마이클 혼다 의원에 의해 일본 위안부 결의안 121이 발의됐을 때, 그것은 자신들의 선거구 내 한인 사회가 원하는 것들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정치인들에게 직진 신호가 됐다. 한국 여성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높이는 것을 구실삼아 미국 전역 도시들에서 위안부에 대한 결의안들이 만들어지고 위안부 소녀상들이 세워졌다. 지역 재미한국인 단체는 지역 정부 관계자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들 특정 “선거구”에는 선거 때가 되면 표를 뒤흔들 수 있는 큰 재미한인 사회가 있다.

On August 2014, the Fullerton City Council approved a resolution recognizing the Korean comfort women. In New Jersey, the State Senate passed a resolution to the same effect.

2014년 8월 플러튼 시 의회는 한국 종군 위안부 결의안을 승인했다. 뉴저지에서 주 상원은 같은 취지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The first comfort woman monument in the US was put up in Palisades Park, NJ in 2010. In 2012, another one was erected in Veterans Memorial in Eisenhower Park, Nassau County, NY. In March 2013, a memorial was opened in Hackensack’s Bergen County, NJ and in July 2013, in Glendale Central Park, Glendale, Calif., a statue of a young girl representing a comfort woman was unveiled. In August 2014, a statue was put up in Southfield, Michigan. There are plans for another statue to be put up in Maryland.

미국 내 첫 번째 위안부 기념비는 2010년 뉴저지주 팰리세이즈 파크에 세워졌다. 2012년에 또 하나가 뉴욕주 나소 카운티 아이젠하워 공원 전쟁 기념관에 세워졌다. 2013년 3월에는 뉴저지주 베르겐 카운티 해켄섹에 기념관이 문을 열었고, 같은 해 7월에는 캘리포니아주 글랜데일 시의 글랜데일 샌트럴 파크에 소녀의 형상을 한 위안부 동상이 제막됐다. 2014년 8월에는 소녀상이 미시간주 사우스필드에 세워졌다. 메릴랜드에 또 하나를 세울 계획이 있다.

The comfort women monuments binge-building has recently spread to Canada, with a well know political blogger calling it “a giant scam whose goal is to alienate Japan from the Western powers.” The City of Burnaby in British Columbia is in the process of studying a proposal to put up a comfort woman statue in the city.

과도한 위안부 기념비 건립 사업은 최근 캐나다까지 퍼졌고 잘 알려진 한 정치 블로거는 이를 “서방 세력으로부터 일본을 소외시키려는 목표를 가진 거대 사기”라고 칭했다.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버나비 시는 위안부 동상을 세우는 계획을 검토 중이다.

With the Vietnam comfort women coming out into public consciousness, can the US expect a deluge of similar memorials installed in the cities and parks anytime soon? And will South Korea protest against them as the Japanese did over the Korean comfort women monuments? The truth is that they won’t, as the Vietnamese communities in the US hold far less political sway and the US itself would rather forget the Vietnam War.

베트남 위안부에 대해 대중이 의식하게 됨에 따라 미국의 도시와 공원에 비슷한 기념관 설치를 곧 기대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국은 일본이 한국 위안부 기념비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이에 반대할 것인가? 진실을 말하자면 미국 내 베트남 공동체는 정치 영향력이 훨씬 덜하고, 미국 자신이 베트남 전쟁을 잊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The Atrocities in the Vietnam War

베트남전에서의 잔혹 행위들

Just as the Japanese had their Comfort Women, South Korea also created brothels with Vietnam comfort women for their and the American troops’ carnal pleasure. Numbering 5,000 to 30,000, stories about them are not easy to come by, thanks to the cloud of secrecy that South Korea shrouded them with.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위안부 여성들에게 해던 것처럼, 한국 또한 그들과 미군의 육체적 쾌락을 위해 베트남 위안부 여성들로 매춘소를 만들었다. 이들은 5천 명에서 3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한국이 스스로를 감싸고 있는 비밀의 장막에 가려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접하기 쉽지 않다.

The massacres that the Korean military committed during the Vietnam War on the Vietnamese took about 9000 lives, not counting the living survivors who had no more lives to speak of. From that time until 2000 when a more liberal administration took over in South Korea, it was taboo to talk about their participation in the war. In June 2002,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declassified documents about the Vietnam War and the massacres at Phong Nhi and Phong Nhat, Hoan Chau, and Phuoc My were made public. There are also the 1966 massacres at Tay Vinh that saw 1200 civilians being slaughtered and at Go Dai with 380 people rounded up and killed. These mass slayings were all done in the same manner. The Ha My account is an example of the way the South Korean Army and Marines butchered and killed innocent men, women and children without remorse.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베트남인 학살로, 더 이상 살아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생존자는 추산하지 않고도 약 9천 명이 숨졌다. 베트남전 당시로부터 한국에 더욱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선 2000년까지 베트남전에 한국군이 연관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2002년 6월 미국 국가기록관리청은 베트남전 문서의 기밀 취급을 해제하고, 퐁니, 퐁넛, 호안 쩌우, 푹미에서의 대량 학살을 공개했다. 또한 1966년 타이 빈에서의 학살에서 민간인 1,200명이 살해되고 고 다이에서는 380명이 집결 후에 살해됐다. 이 대량 학살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미 마을 학살은 한국 육군과 해병대가 무고한 남성,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을 어떻게 사정없이 도살하고 죽였는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A first-hand account from Pamtihoa, survivor of the Ha My massacre is reprinted in The Hankyoreh. It shows the trickery and brutality of the South Korean soldiers towards the Vietnamese. In March 1965, the 3rd US Marine amphibious force landed in Da Nang, Vietnam and took over Ho Ah Bang and Di En Ban. In December 1967, the 5th regiment of the USMC handed over the Con Ninh base to the 2nd Marine brigade of South Korea, called the Blue Dragons.

하미 마을 학살 생존자, 팜티호아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이 한겨레 신문에 보도됐다. 그 보도는 베트남인들에 대한 한국 군인들의 술수와 잔혹함을 보여준다. 1965년 3월 제3 미 해병 상륙부대가 베트남 다낭에 도착했고 호아방과 디엔반을 장악했다. 1967년 12월 제5해병연대는 콘닌 기지를 청룡이라 불리는 한국의 제2해병여단에 넘겨주었다.

The people of Ha My who had been transferred to Con Ninh base went back to their village, as life was hard at the base. Whether the Korean Marines permitted them or not is not clear. But they did provide the village people with food and supplies and the villagers returned the favor by giving them local delicacies. But, to their horror a month later, the nice Korean soldiers turned into monsters. It was on a morning that they came, entered the village with their tanks and armored vehicles and moved in three different directions. Then they gathered the villagers in three different locations to listen to a speech from the Korean commander while the soldiers gave candies to the children.

콘닌 기지로 보내진 하미 마을 주민들은 기지에서의 삶이 힘들어서, 다시 자신들의 마을로 되돌아 왔다. 한국 해병대가 그들의 이동을 허락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음식과 보급품을 제공하였고 마을주민들은 그들에게 지역 특산품을 주어서 화답했다. 그러나 한 달 후 공포스럽게도, 친절한 한국 군인들은 괴물로 변했다. 아침에 그들은 탱크와 장갑차와 함께 마을로 진입해서 세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후 그들은 세 다른 장소로 마을 주민들을 모으고 군인들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는 동안 한국군 지휘관으로부터 연설을 듣게 했다.

After the speech, the commander walked away and, after a few steps, made a hand gesture. In an instant, M60 machine guns and grenade launchers came out of hiding from the woods and opened fire on the shocked villagers. A total of 135 people were killed. Pamhitoa survived but lost both feet. The dead were a ghastly sight – brains coming out of head, internal organs spilling out of bodies, decapitated limbs. Along with a few survivors, Pamhitoa buried the dead in shallow holes they had dug up. But the next day, the Korean soldiers returned with D-7 bulldozers, dug up the graves and crushed all the dead bodies.

연설 후에, 지휘관은 자리를 물러나며 몇 걸음 걸은 후에 손짓했다. 즉시 숲 속에 숨겨져 있던 M60 기관총과 수류탄 발사장치가 드러나며 놀란 마을 주민들에게 발포했다. 총 135명이 살해되었다. 팜티호아 할머니는 살아남았으나 두 다리를 잃었다. 사망자들의 모습은, 머리에서 튀어나온 뇌, 몸에서 쏟아져 나온 내장, 잘려진 다리 등등 무시무시했다. 몇 명의 생존자들과 함께 팜티호아 할머니는 작은 구덩이를 파서 시신들을 묻었다. 그러나 다음날 한국 군인들이 D-7 불도저를 가지고 돌아와서 무덤을 판 후 모든 시신들을 으깼다.


The Vietnam Comfort Women’s Stories.

베트남 위안부 이야기

Unlike South Korea under Pres. Park, the Vietnam government advises its citizenry to put the past behind them and move on to the future. But, if only to make Ms. Park realize her inconsistency and how the resolution of war issues lies in her own hands, the Vietnam comfort women must be made known in the same manner as the Koreans want their stories to be shared. Surviving Vietnamese women speak of serial rapes several times a day, brutal sexual assaults and killing them after the rapes. One woman who was nine months pregnant had her stomach slit open and her entrails along with her baby hanging out.

박 정권하의 한국과 달리, 베트남 정부는 시민들에게 과거는 뒤에 남기고 미래의 삶을 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자신의 자가당착을 깨닫고 전쟁 관련 이슈의 해결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지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베트남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가 공유되길 바라는 같은 방식으로 대중에게 알려져야 한다. 베트남 생존자 여성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이뤄졌던 연속적인 강간, 잔인한 성폭행과 강간 후의 살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임신 9개월 차였던 한 여성은 복부가 칼로 잘려서 아기와 함께 내장이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Korean comfort women survivors Kim Bok-dong and Gil Won-ok as well as the Korean Council for the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have called on the South Korean government to acknowledge the country’s wrongdoings and atone for them by way of an official apology and compensation. It was an emotional moment and an eye opener at the House of Sharing last April when Yoo Hee-nam, a comfort woman for the Japanese Army met with Nguyen Tan Lan (64) and Nguyen Thi Thanh (55), massacre survivors.

한국인 위안부 생존자 김복동씨와 길원옥씨 그리고 한국 정대협은 한국 정부에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으로 속죄하도록 요구했다. 지난 4월 일본군위안부역사관에서 일본군 위안부였던 유희남씨가 대학살 생존자 누엔 탄 란(64)씨와 누엔 티 탄(55)씨를 만난 것은 감동적인 순간이었고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해주는 경험이었다.

What makes the Vietnam comfort women issue worse are the consequences of the rapes are the children born out of these barbaric acts- called the Lai Dai Han, a term for mixed blooded children who are viewed as contemptible and shunned by society. There are about 5,000 to 30,000 of them, unacknowledged by their Korean fathers.

베트남 위안부 여성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이 야만적 행위의 결과로 태어난 라이따이한이라고 불리는, 사회로부터 멸시당하고 기피되는 혼혈 아이들이다. 베트남에는 한국인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약 5,000명에서 30,000명의 라이따이한들이 있다.

In fairness, Korean soldiers were not alone in raping the Vietnamese women. From August 1964 to May 7, 1975, there were more than 9 million military men who served in the Vietnam War. Accounts and research have proven that American GIs also participated in the rapes. But they were kept hidden and if they did reach army court-martial trials, convictions were few and sentences were light. The US government cannot deny that it shares accountability for the war crimes in the Vietnam War along with South Korea. While the official stand is always not to condone such acts, it’s a different matter out in the battlefields. Commanders and generals turn a blind eye to the truth. But the war ended decades ago and the time has come for both countries to face their responsibilities and cease the hypocritical finger pointing at Japan.

공정하게 말해 한국 군인들만 베트남 여성을 강간한 것은 아니다. 1964년 8월부터 1975년 5월 7일까지 베트남 전쟁에 투입된 군인은 900만 명이 넘었다. 보고와 연구들은 미군 병사들도 강간에 참여했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숨겨져 왔고, 육군 군법 재판까지 간 경우에도 유죄 판결은 거의 없었으며 처벌은 가벼웠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한국과 나누어 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언제나 공식적으로는 그런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전쟁터에 나가면 문제가 달라진다. 지휘관과 장군들은 진실을 외면한다. 하지만 전쟁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끝났고, 두 나라 모두 책임을 직면하고 일본을 가리키는 위선적 손가락질을 중단해야 할 시기가 왔다.




한 줄 요약 : 이 모든 소동은 정치적 목적이 개입된 '쇼'다

출처 https://thenewspro.org/?p=12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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