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서는 동등히 상호 존중해야 하는 인격이다.그런데 현재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권력을 남용하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확 다른 데로 가버려.이런 마인드가 대체적으로 만연하고 있다는 생각인데우리가 돈을 제공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철저히 동등한 관계에 놓인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자세인데우리는 돈을 제공하니까 갑이고 너희는 을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왜냐하면 장사꾼은 돈에 멀어 손님은 왕이다. 라는 자세를 왕은 백성을 수탈하는 존재 이라는 생각과 혼동하면서 자신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돈을 받고 팔아버렸지.
그러니 손님의 가혹한 대우에도 끙끙거리고 손님은 손님대로 소위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라는 말이 어울릴만큼 손님은 왕이다 라는 자세를 혼동하고 있지.그러면 양쪽 입장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감정이 상하는 것이지.
판매자는 인격적인 자세로 기분이 나쁘고 그래서 '유태인'처럼 오해를 사게 되고구매자는 그런 판매자의 모습과 여태의 '습관'에 의해 기분이 기분이 나쁨.서로가 기분이 나쁘니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됨.그렇게 반목이 형성이 되는데.
여기서는 성역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는데 바로 현재 우리나라는민주주의 라는 것 자체가 성역이 되어갈 '위기'에 쳐해 있다.왜 위기냐면 민주주의는 자체로 신성함이 보전되는 절대적인 선이 아니다.말 그대로 최선일 뿐이지. 여기서 그럼 독재가 최선이냐 라는 반문이 나오면 안 된다. 민주주의가 최선이 아니다 라는 말과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우선한다는 말을 혼동한다면그 민주주의 수준은 '미개'라는 의미이다.
물론 혼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적인 원인이 컸을 테지만.
민주주의와 달리 자국인에 의한 자국 국민성 언급은 또 다른 성역 즉 '금기시'를 뜻한다.즉 사회적으로 전혀 합의가 안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이런 것은 흔히 시멘트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시멘트에는 어떤 발자국이든 찍힐 수 있고 그 상태로 굳어 버릴 수 있다.
그렇다. 그럼 어떤 것이 발자국이고 어떤 것이 아닌지 조차도 합의가 안 되어 있는 것이다.성역이란어느 한 사안을 두고 세력이 크게 양분되어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 어느 스탠스를 취해도 필연적으로 사회적 비난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극도의 혼란 상태가 만성화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양시론으로 보면 박쥐 혹은 애매한 녀석이 되고양비론으로 말하자면 그나마 조금은 득세할 수 있겠지만 이건 주로 선동하기가 쉬운 상황일 때 농단, 어부지리인 격의 사람에 의해서가 쉽다. 즉 진정한 리더 대신 개인의 이익에 눈이 먼 소인에 의해 이뤄지기 쉽다는 것이다.이런 상황에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피로감을 느끼게 되고 주로 이 분야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재야 인사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주로 전자는 양비론으로 가고 후자는 관망만 하게 된다.
특히 민주주의와 같이 참여에 의의를 두는 특성을 가진 것이라면 이 경우 반드시 무책임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사실상 해결책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누구나 당연히 깨닫고 있는 것들을 지적하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 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톨스토이와 같은 해결책 제시가 답이 아니라이럴 때는 안톤 체호프같은 문제 의식 지적이 더 큰 의의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안톤 체호프같이 훌륭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해결책 제시를 바라고 있음이라는 것은 강력한 리더쉽을 요구한다는 의미인데 이건 자칫하면 독재로 흘러가기 쉬운데, 왜냐하면 그렇게 규정이 되기가 쉽기 때문이다.이미 민주주의가 도입된 상황이라면 다시 퇴보하길 바라지는 않을 것 아닌가.
퇴보라는 의미가 가진 가치 판단에서 벗어나 그것이 가진 부정적인 뉘앙스를 벗어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이 퇴보가 즉 독재와 같은 의미라고도 생각하지 말아보자.
결국 이 글도 대안없는 무작정적인 비판글이 될 위험이 크다.즉 양비론이 되기 쉽다는 의미이다.정작 대안은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기를 한번쯤 생각해달라.나도 이해만 바라진 않겠다. 나도 모든 입장을 할 수 있는 한 이해하도록 노력하겠다.민주주의 자세란 이렇게 능동적인 방법으로 이뤄지는 게 아닌가.민주주의가 가진 자극성이라는 양날의 칼을 한번 사용해 본 것에 나는 회의가 들고 미리 사과를 하겠 다.
공동체주의에 대한 비판이 한참 제기되는 현실 속에서 공동체주의를 이런 자세로 해체할 수 있지 않을까?공동체주의도 원래는 필요에 의해 등장했겠지만 언제부턴가 잘못 굳어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올바른 수준만큼까지만 해체하는데도 어렵지 않은가? 즉 민주주의와 공동체정신이 묘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즉 개인의 수준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저 빛나는 황금칼을 위대한 영웅이 뽑아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을, 황금칼도 위대한 영웅도 바랄리가 있겠는가. 위대한 영웅이 잠자는 사이에, 야심은 넘치지만 소인인 부하가 그 칼을 훔쳐가지 않도록 하자.
구체적인 대안이 없는 이런 것은 나의 한참 어린 나이와 그에 비롯된 경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죄송스럽다.진정한 깨달음은 이런 기본적인 방향 ㅈㅓㄴ환에서 ㅅ작되지 ㅇᆞㄴㅎ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