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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C 1부 1화.
게시물ID : readers_139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ampo
추천 : 0
조회수 : 96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7/13 11:42:07


새벽 3. 비행기가 순항고도에 올랐다. 해수면 위로 3 3천 피트, 속력 520노트. 귓가를 울리는 엔진소음도 이젠 익숙해졌고,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때 고동치던 심박도 내려앉았다.

여기는 안전하다.이곳에서라면 FBI CIA든 쫓아오지 못할것이다. 이 비행기에 안전요원이 탑승했는지는 당장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문제다. 뭔가 문제가 있다면 여기서 잡히든 다음 공항검색대에서 잡히든 길어야 6시간차이다. 그러니 당장은, 당장은 안도감을 즐겨도 좋겠지.

피곤하다. 지난 24시간동안 계속 긴장상태에서 있었다. 이제는 조금 쉬어도 되지 않을까. 창문을 닫았다. 좌석 아래에서 담요를 찾아냈다. 천장에 달린 조명을 어둡게 했다. 그리고 3시간 정도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일어났을 때, 창문을 향하고 있던 시선은 엄지 손톱만한 해가 지평선 위로 떠오른 것을 보았다. 그는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고 있음을 깨달았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모양이다. 창문 너머로는 아까부터 계속 침엽수림이 펼쳐져 있다. 도시는아직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도로나 기찻길 따위의 교통인프라마저도 없다. 겨울이오면 눈보라 때문에 몇 달씩 고립될 법한 곳이다. 이곳으로온 게 잘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국에 계속 남아있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니다.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이게 낫다.

비행기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며 선회한다. 비행기가 진입방향을 잡는 동안 그는 잠시나마 공항과 그 옆에 딸린 마을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작다. 공항 주위로 드문드문 보이는땅딸막한 건물과 아파트, 그리고 차량 몇 대가 보일 뿐 거의 비어있는 주차장. 이쯤 되면 마을이라기보다 차라리 휴게소라고 생각하는 게 옳다. 사실활주로도 그렇게 크지는 않다. 대형여객기는 제대로 착륙도, 이륙도하지 못할 만큼 좁고 짧다. 그런 활주로가 두 개. 격납고니관제탑 따위가 보였지만 비행기가 방향을 완전히 잡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곧 착륙할 것이다. 그리고 공항검색대를 무사히 지나가고 나면,

그는 러시아에 도착한 것이다.

 

6월이다. 눈도 다 녹았고 얼음도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옷을 가볍게 입고 있다. 하지만 춥다. 비행기는 착륙한 다음 공항 건물로 가는 게 아니라 아예 활주로 한 가운데서 엔진을 꺼버렸다. 공항에서 견인차가 이동식 계단을 끌고 오더니 승객을 내리기 시작했다. 비행기밖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이곳의 계절은 겨울과 겨울 사이의 과도기적 무언가라는 말이 생각났다. 아무런장해물 없이 쭉쭉 뻗은 활주로를 타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기온은 쌀쌀했고, 비교적 얇게 입은 하체가 점점 추워졌다. 앞 뒤에 있는 러시아 사람들은티셔츠에 외투 하나 걸치고도 별로 춥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 정도는 적응해버렸다는 것이겠지.

멍하게 사람들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공항에 들어갔고, 입국심사대에 이르게 되었다. 그 동안 누그러졌던 긴장감이 슬슬 되살아났다. 만약 여객기 안에 있었던 12시간 동안 펜실베이니아 경찰이 긴급수배령을내렸다면 그들은 제일 먼저 용의자가 외국으로 탈출했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여객기를 타고 있다면 같은비행기 안에 타고 있는 항공안전요원에게 연락할 테고. 미국에서 나가 러시아로 향하는 비행기이니 안전요원이없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터폴 같은 국제경찰조직에 경고를 했을 수는 있다. 어쩌면 러시아 경찰조직에 직접 연락했을 수도 있고. 러시아라고 범죄자가자기네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좋아할 리 없다. 이 경우에는 입국 심사 도중에 들통날 것이다. 여기 올 때 타고 온 비행기에 다시 처넣겠지. 수갑이랑 족쇄를 채우고말이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공항 직원에게 여권을 넘겼다. 직원은 여권에 적힌 이름을 자판으로 치고, 화면에 출력된 결과를살핀다. 만약 그 사이에 과학수사대나 펜 경찰이든 인터폴이든 하여튼 뭐든 제 일을 해냈다면 저 결과창에주요 용의자어쩌구하는 경고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저 직원은 공항 경비를 부를 것이다. 직원이 이쪽을 쳐다본다. 그는 여권을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스미스씨, 입국을 환영합니다. 짐 찾아가는 거 잊지 마시고요. 다음 분 이쪽으로 오세요.”

아직은 들키지 않은 모양이다. 아직은.

 

방금 나온 공항의 이름은 므리옐 공항이다.

스미스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이 공항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연구소였다. 그 연구소의 이름은 미국 러시아 기초과학 연구소.

처음 이 연구소의 존재를 안 것은 두 달 전의 일이었다. 몇 천 통씩 쌓인 스팸메일을 일괄 삭제하던 도중 우연히 키릴 문자로 된 메일이 눈에 띄었다. 번역기를 돌려보니 므리옐 연구소라고 불리는 연구소가 인턴 사원을 뽑는데 관심이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연구소가 너무 멀리, 너무 낙오된 곳에 있었고 월급만 높지 다른혜택은 별로 없는 듯 했다. 더 좋은 직장을 여기서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메일을 삭제하지는 않았다. 이건 저 멀리 러시아에서도 그를 찾는다는 증표다. 그만큼 우수한인재라는 뜻이니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메일에는 6개월 내에연락을 주면 가장 가까운 항공기표도 예매해주고 면접을 본 뒤 결과가 좋지 않아도 교통편을 마련해 준다는 내용이 있었다. 물론 세상이 뒤집히지 않는 이상 러시아 행 비행기를 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뒤집힌 것은 스미스 그 자신이었지, 세상이 아니었다.

 

연구소에서 마을 사람 일부를 고용한 모양이었다. ‘존 스미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던 사내가 있었고, 자신이 연구소까지 운전한다는 것이다. 연구소가 차량까지 지원하지는않았는지 차는 낡은 SUV였다. 시트에서 담배에 절은 냄새가나고 엔진이 심하게 으르렁거렸으나 목적지까지 걸어가지 않아도 된다면 뭐가 됐든 좋다.

가는 내내 사내가 계속 떠들었다. 억양이 강하게 섞인 서투른 영어. 쓸데없이 목소리만 크다. 연구소는 처음이우? 젊은 사람이 여긴 웬일이래? 어디, 정부에서 왔수?

공항에서 연구소까지는 자갈로 포장된 길이 나 있었다. 포장하고 꽤 오래 되었는지 타이어가 지나는 길을 따라 흙이 보일 정도로 파였고, 중간중간 웅덩이가 생겨있기도 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차는 심하게덜컹거렸다. 지루했다. 러시아 아저씨는 계속 어눌한 말투로떠들고, 서스펜션은 기름칠을 안 했는지 조금만 출렁거려도 삐걱거린다.풍경은 자작나무로 보이는 나무가 끝없이 이어진 숲일 뿐이다. 앞쪽 풍경이라고 다를 바 없어서, 도로가 이어질 뿐이다. 간혹 교차로나 표지판이 나오지만 그 외에는새로울 것도 없었다.

언제쯤 도착하냐고 물으려는 찰나 운전자가 속도를줄였다.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돌자 갑자기 숲 사이로 거대한 통신탑이 툭 튀어나왔다. 트러스구조 철재로 된 높이 100피트 가량의 통신탑. 꼭대기에는 접시 같은 안테나가 몇 개 달려 있었다. 이윽고 다른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숲과 연구소 경계에는 높다란 철사 울타리가2중으로 세워져 있었다. 입구 근처에는 경계초소도 하나.연구소라기보다는 무슨 군사기지에 가까운 느낌이다.

슬슬 긴장감이 든다. 아까와는 좀 다른 이유에서다. 저곳은 미지의 세계고 이제 막 들어서려는것이다. 완전히 낯선 사람들과 대면하는 것은 불편하다. 물론한 며칠, 길어야 몇 주 정도 서먹하게 지내면 익숙해지겠지만 그 때까지의 분위기가 꺼려진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도 거슬린다. 여기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든다고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경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 왔수다.”

러시아 사내가 툴툴거렸다.

 

건물 내부에서는 금연입니다.

바닥이 미끄러울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방문객께서는 안내소에서 출입증을 받으세요.

금요 연구세미나는1900B434로 변경되었습니다.

현재 기온 섭씨15. (288K)

“/다이스 박사는 B223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다이스 박사 B223으로.”

모든 것이 영어였다. 복도의 경고표지판부터 방송안내까지. 미국 러시아 합동 연구소 아니었나?

존 스미스 씨? 스미스 씨 맞습니까? 이쪽으로 오십쇼.”

매우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 안내소 직원은 분명 러시아인이었다. 가슴팍에 단 명찰은 이 사람이 Алекс Далетский라고 알려주지만, 도대체 뭐라고 읽어야 하지? 그는 키릴어에 완전히 까막눈이었다.

안내소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타고 B4로 내려갔다. 이 연구소가 왜 이렇게 깊은지는 모르겠으나 아까보니 B6까지 있었다.

신입 직원인가요?”

직원이 살갑게 물었다. 천성에 사회적인 사람일까?

어디로 배속되었나요? 사무쪽으로 오면 잘해줄게요. 아직 안 정해졌나요? , 유지관리부로가도 좋겠지만 보안부는 들어가지 마세요.”

조언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단지 인턴으로 면접보러 왔을뿐입니다. 성함이…”

알렉스라고 불러요. 여긴 어떻게 알게 됐어요?”

회사에서 보낸 메일을 받았습니다. 자리가 났는데 관심 있냐고묻더군요.”

그래서 관심이 있었군요?”

안 그랬다면 여기 있지도 않았겠죠.”

스미스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렉스가 너무 많은 관심을 보여서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표정이 안 좋네요. 너무 긴장하진 마세요.”

노력해보죠.”

그는 짧게 대답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들은 곧장 왼쪽으로 돌았다. 복도가 묘하게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곡률로 짐작하건대 이 복도가지름 40미터 가량의 거대한 원의 일부분인 것 같았다.

이곳 분위기는 삭막했다. 복도는 칙칙한 시멘트 벽과 흔해 빠진 비닐 바닥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에그림을 걸어놓아 분위기를 개선할 시도는 보이지 않았다. 철저히 실용적인 건물. 마지못해 내놓은 것 같은 화분 몇 점에서 시들어가고 있는 화초가 보인다. 뭐라고해야 할까, 군사시설 분위기가 난다. 그 사실을 지적하니알렉스는 예리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연구소는 원래 구 소련 미사일 기지였어요. 그래서 그럴거예요. 좀 대규모 기지였는데, 미사일 말고도 레이더랑 뭐여러 가지 있었죠. 근데 소련 해체 이후에 돈이 쪼들린다고 기지를 폐쇄하고 연구소로 만들어 버렸대요.”

어째서 돈 없다는 사람들이 멀쩡한 군사기지를 연구소로개조했는지는 모르겠다. 스미스는 굳이 캐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화제를돌렸다.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인사부요.”

알렉스는 그를 끌고 지하 4 405호로 갔다. 그방은 무슨 은행 같은 분위기였다. 창구가 몇 개 있고, 벽면에조그만 탁자가 붙어져 있고 그 위에 서류가 몇 종류 놓여 있다. 알렉스가 창구에 가서 뭐라고 말하더니, 서류를 한 다발 들고 왔다.

스미스는 탁자 앞에 앉아 서류를 하나씩 채워나갔다. 보안책임 관련 문서였다. 연구소는 어디든 중요한 자료 같은 것을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과정이었다. 한창 연구하고 있는데 인턴이랍시고 스파이가 들어와서 연구자료를 다빼가면 안 되니까. 하지만 이 서류에서 표현하는 처벌 수준이 이상할 정도로 엄했다. 일단 표현 자체가 기밀사항이었고, 그걸 유출했을 때는 국가 차원에서 제제가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처벌수준은 마치 사형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 같았다. 형법에 의거함, 무기징역, 경비책임자에의한 즉결심판, 연구소장의 판단에 따른 무기한 감금 등등. -러 합동 연구가 아니라 USA-CCCP 합동연구소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물론 스파이 행위를 할 생각이 없는 그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하지만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연구소 보안 책임자 가운데 편집증 환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 외 몇 가지 서류를 더 작성했다. 그리고는 창구에 앉아 있는 직원들이 아니라 인사부 책임자 사무실에 가서 직접 제출했다. 인사부 책임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받아들였다. 스미스는 뭔가물어보려고 했지만 관뒀다. 저 입에서 그건 기밀입니다.’ 이상의 답변이 나올 것 같지 않다.

책임자가 서랍을 뒤적이더니 파란색 파일을 꺼내 들었다. 그는 뿔테 안경을 만지작거리더니 짧게 말했다.

면접을 시작합니다.”

인사부 책임자가 갑자기 면접관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행운을 빌어요.”

그가 나가면서 한 말이다.

스미스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첫 번째 질문이 날아왔다.

왜 이 연구소에 들어오려고 했습니까?”

말투가 마치 멕시코 난민을 심문하는 국경수비대 같았다. 스미스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실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너무 뻔한 말을 늘어놓으면 탈락할지도 모른다.

어제까지 12명의 인턴 지원자가 이 연구소에 왔습니다. 그리고 두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원자가 도로 떠나갔지요. 외딴지역에 고립되어 있고, 서비스 업체 따위도 없고, 시설도열악한데다 연구원 절반 가까이는 러시아인이죠. 그래서 떠났습니다. 그런데당신은 왜 이 연구소에 들어오려고 합니까? 그리고…”

면접관은 서류를 뒤적이더니 한 마디 더했다.

학점도 괜찮고, 교수의 추천서도 있고. 당신 같으면 원하는 직장을 가질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일단 뭐라도 말하는 편이 낫겠다.

확실히 이 연구소는 낙후되었고, 편의 시설도 없군요. 이상적인 직장은 아닙니다.”

시작은 좋았다. 하지만다음엔 뭐라고 말하지?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간 면접이 끝났다는 소리만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제게 필요한 딱 한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장점이 뭐죠?”

안전한 도피처라는 것. 그걸 직접 말하면 단박에 나쁜 인상을 심어줄 수 있겠지. 그래서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게 장점인지는 묻지 않으셨으면합니다.”

말을 해놓고 나서야 이것도 그렇게 좋은 인상을 줄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니 어쩔 수 없다. 면접관의 반응을 확인해봤는데 표정이 조금 나빠진 것 같다.

면접관은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파란색 파일을 넘겼다. 첫 장에 그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저 서류는 스미스가 팩스로 보낸인적사항과 포트폴리오일 것이 틀림없다.

연구소에 실습사원으로 있을 지식이나 기술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유지관리부나보안부나. 최소한 서류상으로는 말이죠. 당신이 뭘 저질렀건, 고향에서 나쁜 평판을 쌓았든 트라우마 때문에 이리로 도망쳐왔든, 이연구소 안에서 이상한 일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우리로서는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한가지만 확실히 합시다.”

면접관이 뿔테 안경을 벗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 연구소에는 훌륭한 과학자도 있고 괜찮은 연구원도 있고 전과자인 기술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과거는 신경 안 씁니다. 그들이 뭔가 나쁜 짓을 저지르지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평범하게 규칙을 잘 지키면서 살도록 해보십쇼. 괜한 일 일으키지 말고. 그러면 우리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면접관은 종이뭉치를 꺼내더니 스미스 앞에 펼쳐놨다. 내용으로 보아 계약서가 틀림없다.

군사 쪽 경력이 있더군요. 20년부터 22년까지. 국토방위청년단이었습니까?소대 지휘관 역할이었군요.”
그게 군복무로 인정되는 거였습니까?”

개인적으로는 보이스카웃과 주방위군 사이 정도로 인정합니다. 그래도최소한 무기를 다룰 줄 알고, 약간의 지휘경험이 있다는 증거는 됩니다.당신이 들어갈 부서에 딱 맞는 경험이군요.”

그는 볼펜을 하나 쥐어주면서 말했다.

읽어보고, 사인하시고,B107호로 가시죠.”

인사부에서 나온 그는 알렉스와 합류했다. 그러고는 곧장 연구소 탐방을 시작했다.

연구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지하 6층은 단지 창고 정도로 쓰이고 실제로 사용하는 층은 지하 5층까지였다지만 그걸로도 충분히 넓다.

구소련 핵미사일 기지라는 전적 때문인지, 수직 미사일 발사대가 8개 있었다.하나 하나의 크기가 거의 지하철 터널만한 발사대였다. 그것들은 모두 엘리베이터나 환풍구로개조되어 있었다. 지상으로 가는 다른 출입구는 두 개 더 있었다. 하나는화물 엘리베이터이다. 본관은 2개 동으로 나누어지는데,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1, 화물하차장과연결된 건물은 2동이었다. 1동과 2동은 지하에서 서로 만난다. 나머지 하나는 10인승 엘리베이터다. 미사일 발사대를 개조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는 연구소에서 지상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다. 연구소에서 지상으로 곧장 나가는 계단조차 없었다. 게다가 지하 1층은 지표면에서 10피트나 아래에 있다고 한다. 왜 이런가 했더니 구소련은 이 시설을 방공호의 역할도 겸행하게 하려 했다고 한다. 최소한 알렉스는 그렇게 말했다.

구소련시절 상주 인구는 거의 400. 지금은 300여명의 연구원과 기술자, 경비원들이 산다. 경비원만 40여 명이라고 했다. 정확히는43. 분명 낭비였다. 경비원 수를 지금의절반으로, 그러니까 21명과 하반신 장애인 한 명으로 교체해도별 문제가 없을 텐데. 그런데 알렉스의 말에 의하면 외부에 경비 중대가 하나 더 있다는 모양이다. 스미스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지 확인차 물었다.

경비 회사라고했어요?”

아뇨, 경비중대요. 군사용어에요. 러시아군과 미군들. 일개 중대 병력이 여기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주둔해 있다고 했어요.”

누가 가서 여긴 핵미사일기지가 아니라 연구소라고 해봐요.”

알렉스는 짧게 웃었다.

그런데 왜 경비 병력이 여기에…”

, 다 왔어요.”

그들이 도착한 곳은 보안부서이었다. 그 앞에도착한 시점에서 알렉스는 일이 있다며 떠났다.

노크를 하고 응답을 들은 뒤 들어갔다. 인사부 사무실이 은행 같았다면, 보안 사무실은 파출소 같은 분위기였다. 인상이 험악한 몇 명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고 다른 일부는 소파에 앉아 있거나 책상에 둘러앉아 카드게임을하고 있었다. 스미스가 들어가자 그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렸다.심하게 부담스러웠다.

누군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뭐 하러 왔냐? 연구원들이 권총 가지고 따지는 이야기라면…”

신입으로 들어왔습니다.”

스미스가 말했다.소파에 누워있던 사람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저게 뭐야. 인사부 놈들이 새파란 애송이를 배정했잖아.”

그렇게 말한 사람이 러시아어로 몇 마디 더 던졌다.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대체 뭐라고 말한 걸까? 스미스는 그가 질 나쁜 농담을 던졌으리라 생각했다. 양아치 같은놈.

, 그래도. 환영한다, 신입.”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스미스는 악수하면서 명찰을 슬쩍 쳐다봤다. 다행히도 영어였다.

디미트리 크리노프

러시아 사람 같은 이름이었으나 영어 발음은 나쁘지않았다. 폴란드 사람일까? 아니면 러시아계 미국인?

존 스미스입니다.”

, 그래. 그냥디미트리라고 불러.”

그는 40대정도 되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이곳 사람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위생관념이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머리카락은 떡지고 수염도 까칠하게 나 있었으며 근무복에 얼룩과 잔주름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래도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덕에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저기 있는 양아치보다는 나았다.

인사부에서 이 방으로 오라고 했는데 말이죠. 이젠 뭘 합니까?”

저기 있는 방으로 들어가. 보안부 책임자를 만나서 신고해야지.”

디미트리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알려줬다.

칼빵 맞지 않게 조심해라!”

양아치가 외치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디미트리가 해명했다.

신경 쓰지마. 그냥 장난치는 거니까.”

그는 양아치를 무시하고 디미트리가 알려준 방향으로갔다. 어렵잖게 책임자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문들과다르게 나무 재질로 되어 있고 갈색 코팅까지 된 문이었다. 눈높이에 달린 명패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있었다.

 

보안 책임자

크리스 H. 웨인

사무실에 용무가 있다면 노크를 할 것.

 

노크를 했다.

들어오십쇼.”

의외로 젊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보안 책임자랍시고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겨우 30대 초반, 많이 잡아도 30대 중반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아까 빅토르보다 젊어 보이는 사람이다.

신입사원으로 들어오게 된 존 스미스라고 합니다.”

자리에 앉아.”

그가 자리에 앉자 보안 책임자는 클립보드를 하나꺼냈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나?”

아뇨. 전혀 못합니다.”

체크. 이사람은 지금 질문을 하면서 항목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면담이 모두 끝나면 주어질 점수는 부적합정도가 아닐까.

비슷한 직종에서 일해 보신적 있나? 경비업체나, 사설군사기업 같은 기업 말이다.

아뇨.”

비슷한 질문이 열 몇 개 정도 이어졌다. 다행히 총기 사격 경험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답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격 훈련장이 따로 있으니 나중에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얼마나 잘 쏘는지는 우리가 판단한다. 총기 수입은 얼마나능숙하게 하지? 야르긴 권총과 PP2000 기관단총을 분해조립해본 적 있나?”

스미스가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몇 개 없었다.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그는 러시아인이 총원의 40%를 넘는 연구소에 왔음에도 키릴 문자를 읽거나 쓰지 못했고 러시아어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있다고 했던 총기 사격 경험은 4년 전 국토방위청년단에서 소총 60여 발 쏜 것이 마지막이었다. 사격을 즐긴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경비업체나 뭐 그런 곳에서 일한 것도 아니었다. 짐 가지고돌아가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보안 책임자는 짧게 평가했다.

가르칠 것들이 많겠어.”

 

사물함을 배정받았다. 방탄복과 권총이 지급되었고, 근무시간에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라는엄령이 내려졌다. 다만 실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근무복과평상복이 주어지면서 스케줄이 같이 나왔다. 아침 9시부터저녁 6시까지 거의 빈틈없이 훈련과정이 짜였다. 여기가 군대야? 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도저히 불평할 수 없었다. 여기서포기하고 나가떨어지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휴게실에는 무선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로 오기 전에 휴대전화를 처분해 버렸지만 휴게실에 공용 컴퓨터가 몇 대 있었다. 그는 인터넷으로 펜실베이니아 주에 새로운 일이 없었는지 살펴봤다. 2주전에 일어난 그 사건은 고의 보다는 사고로 생각된다고 한다.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다. 아직은 안심할 단계가 아니지만.

컴퓨터를 끄고 아까 보안부장이 쥐어준 업무책자를읽다가 화장실에서 대충 씻었다. 빅토르에게 물어 침실을 찾아 들어갔는데, 그 안에는 이미 몇 명이 곯아 떨어져 있었다. 코 고는 소리가 심했다.

어두컴컴한 침실에서 빅토르가 알려준 자리를 손으로더듬어가며 찾았다. 두 번째 침실 가장 안쪽에 있는 2층침대. 그는 옆에 있는 옷걸이에 옷을 대충 벗어놓고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매트리스가 딱딱하고, 시트에서는 곰팡내가 조금 난다. 담요를 덮는다. 한쪽 구석에 끈적거리는 뭔가가 묻어 있다. 뒤집어서 다시 덮는다.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제 이런 곳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로서는 결코 알 수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는 그렇게 고민하고 생각하다 결국 잠들었다.

 

눈을 떴다. 천장에달린 스피커에서 기상나팔이 울리고 있었다. 다시 드러눕고 싶었으나 나팔이 끊이지 않았고, 동시에 형광등도 밝게 빛나서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화장실에서얼굴을 씻고 역한 냄새가 올라오는 입을 헹군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 지상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다. 식당을 나설 때 오스틴이라는 젊은 남자가 따라붙더니 자기가 오늘 훈련조교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음식물이 제대로 소화되기도 전에 무기고로향해서 탄약을 수령했다. 그 다음 야외에 있는 사격장으로 이동했다. 지급된권총을 분해해서 노리쇠를 닦고, 기름칠하고, 다시 조립하는과정을 배우고 연습한다. 귀마개를 쓰고 전술조끼를 입어 탄입대를 두른 다음 총알 12발을 탄창에 꽉꽉 채우고 탄입대에 쑤셔 넣는다. 표적지 거리는20야드. 버저가 울리면 탄창을 뽑아 총에 장전하고 조준한뒤 발사한다. 장전부터 조준, 명중률까지 모두 한꺼번에 보는연습이다. 아마도.

총을 쏘기 전에 사전교육이 있었다.

하나, 모든총은 장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므로 언제나 안전장치를채워둬야 한다. , 또한 죽일 생각이 없는 대상에게 총구를겨누지 말도록 해야 한다. , 마지막으로 목표물 뒤에 무엇이있는지 인지하고 발포할 것, 가스통 따위를 날려버리면 곤란해지니까.

그렇다고 멍청하게 안전장치도 풀지 말고 조준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야.”

오스틴이 말했다.하지만 스미스는 괜히 사람에게 총을 쏴서 다른 사람, 특히 형사나 조사관의 이목을 끌 생각이없었다.

버저가 울린다. 탄창을뽑고 권총에 삽입한 다음 슬라이드를 당겨 장전한다. 과녁의 정중앙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 총소리는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컸다. 그러나 반동은 의외로 적었다. 총구를손바닥으로 슬쩍 미는 정도에 불과하다. 표적지 어디에 맞았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여기서는 잘 보이지않는다. 기계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며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한다.

철컥, 기계음이나고 슬라이드가 뒤로 젖혀진 채 고정된다. 탄창을 뽑고 총을 선반에 내려놓았다. 표적지가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겉보기에는 제법 괜찮게 쏜 것같았다. 최소한 12발 모두 표적지에 박혔다. 하지만 사격 조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연습하면 나아지겠지만, 지금은 영 아닌데?” 오스틴이 말했다.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지 모르겠다. 표적지에 작은 구멍이 골고루 뚫려있다. 머리부터 배까지. , 한 발 밖으로 빠져 나온 것이 보인다. 저게 문제일까?

조교가 차트에 뭔가 적더니 준비하라고 신호했다.

한 번 더 해보자.”

그런 식으로 오전은 사격연습으로 끝났다. 연습이 끝날 때 즈음되니 자극적인 화약냄새 때문에 코가 얼얼해질 지경이다. 유황의냄새가 흡사 계란 썩는 냄새와 같다고 한다. 화약의 냄새도 그와 비슷했다. 계란 썩는 냄새에 코 점막을 자극하는 따끔따끔한 무언가가 섞여 있다. 곧점심을 먹게 될 텐데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 같다.

하루는 길었다. 사격연습이끝난 후 점심을 먹고, 이번엔 연구소 순찰 대열에 합류했다. 같은조에는 처음 보는 보안요원과 그 때 그 양아치가 있었다. 양아치는 평균 이상의 사교성이 자신의 성격과결합하여 조금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한 것 같았다. 하지만 최소한 그를 잡아먹으려고 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스미스는 양아치라는 멸칭을 골칫거리로 정정했다.

저녁시간에는 근무수칙 따위를 외웠다. 별의별 희한한 수칙이 다 있었다. 화장실은 1, 2, 4층 복도 계단참에 있는 화장실만 이용할 것. 지하 5층보다 아래로 내려갈 경우 보안부장의 인가를 받을 것. 연구소에고양이를 데려올 경우 보안부장, 인사부장, 유지관리부장과연구소 소장의 서면동의를 받을 것 등등.

무기와 적대인물 제압부분에서는 조금 지나치다는 느낌도받았다. 실탄화기와 비살상무기를 언제나 소지하고 있을 것, 출입증이없는 인물은 모두 체포할 것, 대상이 정당한 지시를 거부하고 보안에 위협을 끼친다고 판단되면 비살상무기의발포를 허가한다. 비살상무기를 사용해도 제압되지 않을 경우 실탄화기를 사용한다.

육체적인 피로는 크지 않았지만 책을 펼치고 침대에누우면 잠이 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깜박한 채 책을 펴고 있던 그는 얼마 안가 졸기시작하다가 어느새 자고 있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예의 기상나팔이 울리고 있었고, 근무수칙 53, 54페이지와 55페이지일부는 침에 절어 있었다.

 

각종 총기류에 대해서 배웠다. 연구소에 있는 모든 총기류는 사용탄약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9mmX19mm 탄을 사용하는 권총과 기관단총이 있고 12게이지 산탄을 사용하는 산탄총이있다. 도대체 연구시설에 산탄총과 기관단총이 왜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밖에 테이저라는, 일종의 원거리 전기충격기도 있었다. 이게그 비살상무기. 2만 볼트 전압의 전기충격을 주는, 게다가 전극이살을 파고들게 만들어진 제품이 비살상무기라는 점이 조금 의심스럽긴 했지만, 적어도 사용설명서와 근무수칙은그렇게 주장했다.

근무중인 보안요원들은 모두 권총 한 자루와 테이저한 자루, 그리고 묵직한 삼단봉을 한 자루씩 차고 다닌다. 권총은비어있지만 탄창을 하나씩 소지하고 다닌다. 테이저는 안전장치를 풀면 언제 방아쇠를 당기든 나가게 되어있다. 그 외 연구소 내의 모든 총기류는 실내에 있는 무기고에서 보관한다. 총탄도그곳에 보관한다. 무기고에서 보관하는 것은 총기류와 총탄뿐만이 아니다.전술조명, 무전기, 방탄복과 전술조끼까지. 웬만한 군부대 못지 않은 장비를 보관하고 있다.

과무장이다. 이정도 무장은 웬만한 국가연구시설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경비원이 평상시에도 실탄을 장비하고, 경비 중대 20Km밖에서 주둔할 정도로 삼엄한 경비가 필요한 시설.

이 연구소, 뭔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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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미국 사람이라 인치법을 씁니다. 하지만 글을 읽는 사람들이 미국인이 아니다보니 야드니, 피트니 하는 단위가 확 와닫지 않을 것 같더군요. 인치법으로 쓰인 수치를 죄다 미터법으로 바꿔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인치법으로 쓸까요. 전자는 알아듣기 쉽고 후자는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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