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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퇴계 The Great Master
게시물ID : freeboard_7753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나도모르게
추천 : 2
조회수 : 38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7/22 01:54:43

 「오늘의 강론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세.」

퇴계 선생의 말에 제자들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 스승님.」

제자 하나가 손을 들었다.

 「말할 것이 있느냐?」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로
  낮 퇴계(退溪), 밤 토계(兎溪)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야!」

옆에 있던 제자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 제자를 붙잡는 모습을 퇴계는 지그시 보고 있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느냐?」
 「유, 율곡 선생의 제자들에게...」
 「아, 율곡...」

퇴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 왔지만 긴장한 제자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송구하옵니다. 낮에는 점잖으신 스승님께서
  밤에는 흡사 들짐승과 같아
  율곡 선생과 너무도 다르다는 말을 들어서...」

제자의 말에 퇴계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율곡은 뒤가 적적하기 이를 데 없겠군.」
 「무슨 말씀입니까?」
 「대장부로서, 음양을 모두 겪어 인생에 돌아볼 것이 많아져야
  노년이 즐거울 것을... 율곡의 노년이 걱정 되는 구나.
  음양 상생의 이치에 대해서는 차후에 설명할 날이 있을 테니,
  이제 가보거라.」

제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 말에 수긍한 듯 학당을 나갔다.

 「낮과 밤이라....
  말이 나온 김에, 오늘은 거기 가볼까.」

모두 나가고 난 학당에서 퇴계는 혼자 중얼거렸다.

*

낮의 열기가 지워진, 여름 밤의 공기는 선선했다.
도포를 입은 퇴계는 뒷짐을 진 채 서서 보름에서 살짝 기운 달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달 구경을 하기에는 지금 서 있는 정자가 너무 을씨년스러웠다. 거미줄이 끼고 정자 바닥에는 퇴계의 발자국 외에는 하얀 먼지로 덮혀 있었다. 주변에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정자 옆 우거진 수풀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올빼미가 구슬프게 우는 소리가 두어번 들렸을 때였다.

 「오, 왔느냐.」

도포를 입고 뒷짐진 채 주변을 둘러보던 퇴계는 뒤로 돌아섰다.
퇴계 뒤에 선 소년은 허리를 숙여 고개를 조아렸다.

 「말씀하신 대로 인기척을 최대한 죽이며 왔습니다만.」
 「풀 밟는 소리가 두 번 들렸다. 아직 이르구나.」

퇴계의 말에 소년이 살짝 입술을 구겼다가 급히 폈다.
아직 앳띤 얼굴에 댕기를 묶은 소년의 얼굴에 달빛이 드리웠다. 소년의 머리는 은은한 갈색이 감돌고 있었고, 눈동자에는 잿빛이 돌았다. 그래서 낮에 소년을 마주치는 사람들은 도깨비의 상이라며 피하고는 했다.
하지만 퇴계는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오늘 밤 공기가 유난히 맑아 좋구나.
  '자형'이 네가 술을 할 줄 알면 같이
  저 달을 잔에 담아 마시면 좋을 것을.」

퇴계의 말에 소년, 자형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희미한 미소였다.
다들 도깨비의 상이라고 피하는 바람에 아홉살 먹도록 이름도 없던 소년에게 퇴계는 자형이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시종으로 삼았다. 밤에 퇴계가 글을 쓸 때 옆에서 먹을 가는 일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퇴계나 자형이나 이렇게 이름 모를 들판의 정자에 나와 있었다. 도포를 입은 퇴계는 그렇다치고 자형의 차림새가 이상했다. 마치 꿩 사냥을 하는 듯한 차림에, 등에 머리 하나는 더 얹은 듯한 높이의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었다. 검은 천에 둘둘 쌓인 것을 보아 거문고 같았지만, 열일곱이 된 자형의 체격을 생각해보면 유난히 큰 거문고 였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같은 밤은 그만 들어가셔서
  사서나 읽으시다 취침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허, 상투 틀 나이가 됐다고 이제 내게 훈계를 다 하는 구나.
  늦었느니라. 네 눈에는 이미 보일 터인데.」

퇴계의 말에 자형은 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다. 자형의 잿빛 눈동자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과 다른 것을 보았다. 그래서 퇴계와 이렇게 밤나들이를 자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자를 둘러싼 수풀 사이로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 두개가 아닌 족히 수십 개는 되어 보였다.

 「주자의 뜻을 따르시는 분이 저런 괴력난신을 자꾸 마주쳐도 되시겠습니까?」
 「불손한 요마에게 예의와 도리를 가르치면 안 된다고 공맹이 말씀하신 적은 없다.」

퇴계는 말을 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자리를 부스럭거리며 검은 형체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해골에 살점과 근육이 붙은 듯한 요괴였다. 눈알 없는 눈두덩이로 주변을 황망히 둘러보며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시작해보세!」

퇴계는 외치더니 정자 밖으로 몸을 날렸다. 자형은 손을 뻗어 막으려다가 수풀을 딛고 선 퇴계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요괴 중 하나가 코를 킁킁대더니 퇴계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르신! 받으세요!」

자형은 외치며 등에 매고 있던 거문고?의 천을 풀며 퇴계에게 던졌다. 검은 천이 걷히며 날아드는 물건을 잡은 크게 한바퀴 돌며 받아든 퇴계는 두 발을 땅에 깊게 디뎠다.
퇴계가 양 손으로 꼭 잡고 있는 물건은...신기전이었다.
원래 받침을 놓고 쏘는 신기전을 사람이 들 수 있게 줄인 형태였지만 여전히 크고 무거웠다. 퇴계에게 달려들던 요괴의 머리에 신기전의 화살 하나가 박히는 듯 싶더니, 화약의 추진력으로 공중에 높게 뜬 요괴의 몸통이 연기가 되어 흩날리며 사라졌다.
그것을 신호로 수풀에서 일제히 요괴가 튀어나와 퇴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퇴계가 손에 든 신기전에서 화살이 불을 뿜을 수록 요괴들은 비명을 지르며 연기가 되었다.

 「앗?!」

신기전을 든 퇴계가 달밤에 펼치는 난무를, 몰래 숨겨온 강냉이를 우물거리며 구경하던 자형은 신기전의 마지막 화살이 발사되는 것을 보고는 외마디를 질렀다. 때마침 수풀에서 마지막 남은 요괴 다섯 마리가 퇴계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르신! 검입니다!」

자형은 허리 뒷춤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던졌다. 요괴 다섯 머리가 공중에 뛰어 오를 때 퇴계의 손 안에 검이 들어 왔다. 검집에서 검이 뽑히며 푸른 섬광이 뿜어졌다. 요괴 다섯 마리의 허리를 푸른 섬광이 긋는 듯 싶더니 연기로 사라졌다.

퇴계는 손에 들린 검을 한번 바라보았다. 푸른 섬광이 잦아들자 너무도 검은 검신이 드러났다. 무른 칼날은 살아있는 물체에게 상처 하나 낼 수 없어 보였다.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정확히 쇳물을 부어 만든, 사인검이었다. 인간이 아닌 밤의 세계에 있는 것을 베어내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특히 지금 퇴계가 들고 있는 것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마계로 변한 개경을 수호할 때 썼던 그 사인검이었다.
퇴계는 사인검을 땅에 꽂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우, 괴력난신을 몽환포영으로 되돌리고 나니 마음이 공허하군.
  자형아, 허리춤에 찬 탁주 병을 내놓거라.」

자형이 허리에 맨 호리병을 넘기자 퇴계는 마개를 따고 입에 부으려 했다.

 「어르신, 공기가 이상합니다.」

퇴계는 도로 마개를 닫았다.

 「음, 나도 느꼈다.
  단순한 이매망량이 아닌 듯 한데,
  어떠하냐. 네가 보기에는 놈이 어느 정도 품계(위력)를 가졌느냐?」

자형은 눈을 감고 잠시 서 있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종삼품은 되어 보입니다.」
 「종삼품이라...어허허, 이 일대에서 그 정도 요괴라니,
  몸을 제대로 풀어보겠...」

말하던 퇴계가 뒤로 돌았다. 저쪽 나무 아래에 무엇인가가 일렁였다. 퇴계는 옆에 꽂았던 사인검을 빼고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
여인의 하얀 소복이었다.
하얀 소복을 입은 고운 자태의 여인 같았지만, 머리는 조랑말의 모습이었다.
기이한 그 조화에 퇴계는 헛웃음을 쳤다.
그 순간 조랑말의 양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리고 퇴계의 바로 앞에 무언가 내려앉은 듯 굉음이 울렸다.
퇴계의 한 걸음 앞에, 사람 두세명은 들어갈 크기로 구멍이 움푹 패였다. 구멍의 모습은 흡사 말발굽 같았다.

 「과연, 종삼품이라 할 만 하구나.」

퇴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인검을 땅에 끌며 조랑말 요괴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퇴계의 머리 위로 굉음과 함께 큰 말발굽이 떨어져 내렸지만, 퇴계는 빠르게 몸을 날려 피하며 조랑말 요괴와의 간극을 줄이고 있었다.

 「푸힝푸힝!」

조랑말 요괴가 괴음을 내며 뛰어올랐다. 퇴계의 코 앞에 내려 선 조랑말 요괴는 빠르게 뒤로 돌며 뒷발굽으로 퇴계를 걷어찼다. 다행히 사인검으로 발굽을 막았지만 퇴계의 몸이 족히 열 발자국은 뒤로 밀려났다. 사인검에서 전해지는 충격이 손목을 절절하게 울렸다.
다시금 뛰어오르는 조랑말 요괴를 본 퇴계는 급하게 새끼 손가락 끝을 깨물고 거기서 나오는 핏방울을 손바닥에 쓰더니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태산근추급급여울령!」

퇴계의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퇴계의 앞으로 날아오던 조랑말 요괴는 순간 뻣뻣하게 굳는 듯 하더니 바닥에 돌덩이처럼 떨어졌다.

 「어르신! 그건 도가의 주문 아닙니까?」

어느 새 뒤로 달려온 자형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뛰어난 선비는 도가 불가에 대한 지식도 깊어야 하는 법!」

퇴계는 외치며 돌처럼 굳어 있는 조랑말 요괴의 목을 사인검으로 내리쳤다.
하지만 검이 스치는 순간 안개처럼 변해 흩어진 조랑말 요괴는 저편에서 다시 형태를 갖추었다.
집채 두 세개는 될 법하게 거대한 검은 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검은 말은 입을 열어 말했다.

 「퇴계 선생. 내 그대의 명성을 높이 사 목숨은 안 해하려 했소.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 들판을 차지한 나를 해치려 하는가.」

퇴계는 피식 웃었다.

 「저번에 이 땅을 지나다 보니 요기가 너무도 서려 있어 다시 왔을 뿐.
  어찌 인간계와 마계는 분별이 있는데, 법도 없이 이 들판을 강탈하고
  차지라 하는가.
  긍휼히 여겨 기회를 주겠노라. 지금 떠나라. 그러면 내가 굳이 사인검
  을 쓰지 않겠다.」

퇴계의 말에 검은 말은 주변 전체가 울리도록 음산하게 웃었다.

 「아무리 학식이 고명해도 인간은 인간.
  그 약한 허물로 어디까지 견디는지 보자!」
 「자형, 뒤로 물러나라. 여기서부터는 대장부의 몫이다!」

퇴계의 명에 자형은 한참 뒤로 물러섰다.
잠시 퇴계를 보고 있던 검은 말은 박차를 가하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사인검을 꼭 쥔 퇴계는 달려오는 거대한 검은 말을 응시했다.
거대한 검은 말이 직진하는 것을 피하지 않는 퇴계의 모습을 응시하던 자형은, 퇴계와 말의 그림자가 맞닥뜨리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다시 떴을 때, 검은 말은 퇴계의 뒤에 멈춰서 있었다. 퇴계는 검을 꼭 쥔 채 우뚝 서 있었다.
산들바람이 일순간 수풀 사이를 스쳤다.

 「내가...인간의 칼에...단칼에 베이다니!!!!!」

말 울음이 섞인 비명과 함께 거대한 검은 말은 연기가 되어 흩어져 밤하늘로 날아갔다. 그 기세의 뒤에 작은 회오리가 몰아치는 큰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밀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 돌렸던 자형은 다시 앞을 보았다.

 「아!」

자형은 탄성을 질렀다. 도포와 저고리가 너덜해져서 더 이상 퇴계의 상반신을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이 근육이 촘촘히 발달한 퇴계의 몸은, 같은 남자인 자형이 봐도 아름다웠다. 매번 밤마다 요괴를 상대하며 생긴 잔 상처는 오히려 근육의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자형아.」
 「네, 어르신.」
 「아까 탁주병을 놓쳤다. 수풀 어딘가에 있을 테니 찾아보아라.」

자형은 입술을 구기고 말발굽 모양으로 파인 수풀 사이 곳곳을 둘러보았다.
마침내 찾은 탁주병을 퇴계에게 내밀자 마개를 열더니 입에 쏟아붓 듯이 마셨다.

 「사활을 가르는 승부를 끝내고 나니, 양기가 내 육신에 넘치는 구나!
  어서 집에 가자! 안방에 가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육신을 진정시켜야 겠다.」
 「으음...마나님에게 가신다고요?
  오늘은 그저 편히 주무시는 게 어떻습니까?」
 「내가 내 부인에게 회포를 풀겠다는 데 무엇이 불만이냐?」
 「그게 아니오라...
  마나님이 요새 합궁이 잦아서 심신이 피로하시다 하셔서...」
 「어허, 그렇다면 오늘은 부인 대신 네가 위로할 테냐?」

퇴계의 말에 자형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것을 본 퇴계는 호탕하게 웃었다.

 「네 이 놈! 농도 모르느냐! 어찌 군자가 남색을 탐하겠느냐!
  가자, 부인에게 어서 가서 음양을 이루어야 겠으니!
  율곡은 이런 삶의 맛을 모르겠지!」

퇴계의 외침과 웃음에 고개 저으며, 자형은 신기전을 챙겨 등에 짊어지고 급히 퇴계의 뒤를 따라갔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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