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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humorbest_849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오리날다。★
추천 : 31
조회수 : 1750회
댓글수 : 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5/02/24 22:48:54
원본글 작성시간 : 2004/04/04 16:30:18
1995년도의 어느날
나는 잠실 롯데백화점 10층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도장과 주민등록증을 들고서 말이다.
당시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비감에 젖어 계시던 시기였는데
그래도 매일 출근은 양복을 입고 하셨으며 퇴근도 적절한 시각에
하시던터라 회사에 출근하신 아버지를 만나러
내가 왜 아버지 회사가 아닌 롯데백화점으로 가야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그저 심부름 내용만 말씀해주셨을 뿐이지
여타의 말씀은 없으셨으므로
난 가타부타 말 없이 그저 어머님의 명령에 의해
롯데백화점 10층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당시 롯데백화점은 증축공사로 한창이었는데
증축전 맨 마지막 층인 10층은 이벤트 행사나 또는
디스카운트 상품들을 판매하던 일종의 상설매장과도 같은
그런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그 곳에는 스키용품 행사로 사람들이 북적였는데
95년도만 해도 스키는 여전히 대중화 되지 않은
중산층은 되어야 즐길 여력이 있는 기득권계층의 전유물이어서
부티나는 고객들이 행사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버지를 기다리며 서성인지 30분 즈음 기다리던 아버지는
드디어 스키용품 판매점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내셨다.
나무가루가 가득한 머리와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부티나고 번지르한 아주머니들 사이로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로 다가오셨다.
분명히 잘 다려진 정장과 깨끗한 셔츠와 말끔한 넥타이를
보기좋게 차려입고 집을 나섰던
내 인생 최강의 히어로인 아버지가
허름하고 낡은 작업복에 몸을 맡기곤 때가 절은 얼굴로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았을 때
부티나는 아주머니들이 아버지가 지나치자
꺼리며 자리를 비켜주고 물러서는 광경을 보았을 때
매장의 점원이 아버지를 보곤 꺼리는 표정을 짓는 걸 보았을 때
나는... 급기야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일주일에 한 번 정성스레 스무켤레도 넘는 구두에 광을 내며
"사내의 진정한 멋은 구두에서 나온다" 말씀하시던
내 인생 최강의 멋장이 아버지께서는
호텔 화장실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으시고는
아버지가 부끄러워 칸막이 안으로 숨어버린
희대의 악독하고도 싹수 노란 아들을 찾으시며
"태형아~ 이따가 아버지랑 소주 한 잔 하자"며
너털웃음을 짓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셨고
그 싹수 없는 아들 되는 나는 화장실 칸막이 속에서
불도 잘 붙지 않은 담배만 뻐끔 빨아대면서
볼우물 가득 나도몰래 흘러내리는 눈물을 담아두고는
알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주민등록증과 도장은
아버지의 노동에 적합한 급여를 받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멋스럽지만 잠시 멋을 포기한 아버지와
싹수가 노랗고 철이 덜 든 자식인 나는
나란히 서서 급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아버지는 얼굴 가득 흐릿한 미소를 담고 내게 말씀하셨다.
"기다리기 지루하지?"
아버지의 말씀에 댓거리조차 않는 아들을 바라보다 못한 아버진
옆에 서 계시던 어느 인부와 다음과 같이 대화하셨다.
"이봐요 황씨. 급여가 좀 늦는데 내 우리 아들이 찾아왔거든요
내 주머니사정이 그렇고 그런지라 아들하고 소주 한 잔 할래두
여의치 않으니 내게 3만원만 빌려주구려.
내일 급여를 받게 되면 갚으리다."
황씨라고 불리운 중년 사내는 흔쾌히 허락하였는데
나는 우리 아버지가 "김사장"이 아닌 "김씨"로 불리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처음 깨달았고
내 인생의 히어로는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져 갔다.
남의 돈 천원도 빌리는 게 쑥스러워 늘 제 돈으로 사업하고
늘 제 돈 모자라 사업 망하고 늘 갚지 아니해도 될 돈 갚느라
허리가 휘는 경험을 숱하게 했던 아버지가
남에게 돈을 빌리는 광경을 나는 처음 목도하게 되었다.
내 주머니에도 있는 3만원이 없어
싹수 노란 자식 술 한 잔 먹이려고 돈을 빌리는 아버지를 말이다.
롯데백화점 지하 식품부에서
아버지와 나는 갖가지 회를 미리 썰어두고
이모저모 골라 그램으로 계산하는 냉동회집을 찾았고
곧 관광소주 4병을 시켰다.(참이슬 8~9병 되는 분량)
"아버지는 말이다. 네게 미안하다."
"뭐가요 아버지"
"지갑만 들고 나왔어도 네게 들키지 않는건데..."
"..."
"네게 조금도 아픈 마음을 갖게 하기 싫었다"
그랬다.
아버지는 당신이 생각하는 집안의 등불이자 희망인 내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낙오자의 인생으로서
막노동판에서 일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일부러 귀찮고 또 귀찮고 무시무시하게 귀찮게도
매일 옷을 갈아입는 번거로움과 같이 일하는 인부들의
비웃음을 참아가면서 정장차림으로 출근하셨던 것이다.
싹수 노란 아들놈이 기죽는 게 싫어
싹수 노란 아들놈이 아버지 걱정하는 게 싫어
싹수 노란 아들놈이 고생하는 아버질 보고 맘 아픈 게 싫어
이 시대 최강의 히어로인 나의 아버지는
모든 귀찮음과 고됨과 아픔을 뒤로 했던 거다.
나는 대답했다
"아버지. 내일부터는 그냥 편하게 입고 출근해요"
"그래... 그래도 되겠지?"
"아버지 앞으로는 제가 열심히 할께요"
"그래 고맙다. 아버진 네게 늘 고맙다"
무엇이 그렇게 고마운지 묻고 싶었지만
마음이 아파 여쭤볼 수 조차 없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네 어머니께 잘 해라. 아버진 그거면 부탁 다 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와 나는 어깨동무를 하고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둘이 함께 아는 트로트를 불러제끼며 동네를 뒤집었었다.
아버지는 흥에 겨워 즐거워하였지만
내 눈에는 절절하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으로
나는 그날 밤을 기억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지금의 나는 가끔 마마보이 소리를 들을 만큼
어머니라면 만사 제쳐두고 우선 순위로 칠만큼 열성이다.
배고프시다면 직접 볶음밥을 만들어 드리고
잡숫고 싶으신게 있다면 임신한 마누라 음식 사다 바치는 것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서울 전역을 뒤져서라도 찾아내어 잡숫게 한다
이유란 게 어머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말씀하신
"어머니께 잘해라"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나를 "마마보이" 언저리로 아는 분은
생각을 바꾸시라고 권고하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의 표독스럽고 독하고 강성위주의 내 성격은
대부분 스무살 내 대학 초년병 시절의 그 때
아버지와 함께 술잔을 기울인 그 날 만들어졌는데
아버지를 아프게 한 세상에 대한 내 분노의 표출이었고
아버지를 고생하게 하는 세상에 대한 내 마음가짐의 하나였다.
스무 살의 그날 이후로 난
어떠한 일도 어떠한 역경도 어떠한 아픔도
내게 부담스럽고 고되고 힘들다 여긴 적이 없다.
나이트 클럽에서 웨이터를 하다 손님에게 따귀를 맞을 때에도
집을 떠나 반년도 넘게 막노동을 하며 돈을 모을 시절에도
새벽을 하얗게 지새우며 신문배달을 할 때에도
단 한 번도 말이다.
29세의 나이에 법인기업 부장 자리를 따내면서
이제는 조금은 안정된 내 생활
그러나 쉬지는 아니할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고
아버지가 그러했듯 나도 그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리자.
난 스키를 싫어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스키를 탈 만큼 부자였건만
나는 지금 스키를 싫어한다.
그 날
스무 살의 어리고 여린 마음에
롯데백화점 10층의 어느 부티나는 여인이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를 보곤
길거리의 "쓰레기"마냥 마주하지 말아야 할 물건인 듯
황망히 비켜서며 아버지를 저어했을 때
나는 스키가 싫어졌다.
내 모든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내 스스로 만족하는 정상에 서는 날
나는 스키장에 서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히어로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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