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코 씨도 담배를 입에 문 채 웃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솔직한 사람 같군. 난 보면 알아. 난 여기에 칠 년간 있으면서 온갖 사람이 오가는 걸 봐왔으니까 알 수 있어. 제대로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과 열 수 없는 사람과의 차이 말이야. 당신은 마음을 열 수 있는 쪽이야. 정확하게 말해서 열려고 마음만 먹으면 열 수 있는 사람.”
“열면 어떻게 되죠?”
레이코 씨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즐거운 듯이 테이블 위에 손을 모았다. “회복되는 거야.”라고 그녀는 말했다. 담뱃재가 테이블 위에 떨어졌지만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p. 152-153)
“그래서 말이야, 때때로 나는 이 세상을 둘러보면 정말 치가 떨려. 어째서 이 사람들은 노력이란 것을 하지 않을까, 왜 노력도 하지 않고 불평만 할까 하고 말이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가사와 선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가 보기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악착같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요?”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일 뿐이야.” 하고 나가사와 선배는 간단히 말했다.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 더 주체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거야.”
“가령 취직이 결정되어 다른 사람들은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한다든가 그런 거 말인가요?”
“그래, 그런 거야. 난 봄까진 스페인어를 완전히 마스터할 거야. 영어, 독일어, 플아스어는 이미 되었고, 이탈리아어도 대충 되어가고 있어. 이런 게 노력 없이 가능할까?”
그는 담배를 피웠고, 나는 미도리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미도리의 아버지는 텔레비전으로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하는 건 상상조차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노력과 노동의 차이가 어디 있는지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기엔 그는 아마도 너무 바빴을 것이다. 일도 바빴을 테고 후쿠시마까지 가출한 딸을 데리러 가기도 해야 했으니까. (p. 292)
“넌 아무래도 내 말을 이해 못하는 것 같은데,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럴 만한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지, 그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야.”(p. 301)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은 십이 년이나 십삼 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나는 어떤 화가를 인터뷰하기 위해 뉴멕시코 주 산타페에 가 있었다. 해질녘 근처 피자하우스에 들러 맥주와 피자를 먹으며 기적처럼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내 손과 접시, 테이블과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런 압도적인 석양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 씨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일으켰던 내 마음속의 소용돌이가 무엇이었던가를 이해했다. 그것은 채워질 수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채워질 수 없을 소년기의 동경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타오르는 듯한 순진무구한 동경을 벌써 까맏그한 옛날에 어딘가에 잊어버리고 왔기에, 그런 것이 한때 내 안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오랫동안 잊어버린 채 살아온 것이다. 하쓰미 씨가 흔들어놓은 것은 내 안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나 자신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거의 울어버릴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이지 특별한 여자였다. 누군가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구원했어야만 했다. (p. 304)
“인생이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
나는 몇 번이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다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마도 내 머리가 나쁜 탓이겠지만, 가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어.”
“비스킷 통에 여러 가지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는데,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만 자꾸 먹어버리면, 나중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거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 (p. 357)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나와 죽은 자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간다. 기즈키는 열일곱 살 그대로이고 나오코는 스물한 살인 채 그대로인 것이다. 영원히. (p. 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