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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권,평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도-neuman님에게
게시물ID : phil_85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레고맨
추천 : 3
조회수 : 626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4/03/09 09:56:50
이번에도 댓글로 달기엔 내용이 길어서 게시판에 올립니다.
 
포스트모더니즘학자들이 악의 화신이 아닌 이상, 이들도 자유,인권,평등 같은 개념을 소중하게 여기긴 마찬가지 입니다.
다만 자유,인권,평등이 가진(정확히는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정당성이나 당위성, 절대성에 의문을 표할 뿐입니다.
물론 그 덕분에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나몰라라 한다는 점은 분명 문제입니다.
 
앞에서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던한가?'에서 말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기조는 '본질은 없다.' '현상만이 존재한다.'입니다.
그들의 대표적인 구호가 '반대를 위한 반대'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본질이 없는데, 현상만이 있는데... 자꾸 무언가를 진리라고, 정의라고 주장하니 그게 무엇이든 반대 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니 당연히 자유,인권,평등도 새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이들이 절대적인 가치인가 반문해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해 그 자체에 절대적인 진리나 당위성이 내재된 개념은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를 끝까지 밀고 나가다보면 자기 자신도 부정하게 됩니다.
왜냐면... 자꾸 '반대를 위한 반대'만 외치다 보면, '반대를 위한 반대' 또한 반대해야 되니까요.
이런 상황을 이중구속이라고 합니다.
'자유롭게 살아라!'라고 주장하면 자유롭게 풀어주는 듯 하지만,
문장의 기본틀은 '~를 해라'라는 명령이기에, 자유롭게 살면 명령에 따라 사는 전혀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문장의 의미만 따지게 되면 '자유롭게 살아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고 맙니다.
원래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이란 문화인류학자가 말한건데... 데리다에 의해 유명해진 개념이죠.
 
하지만 바로 이러한 문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문제 때문에 이들은 현실을 도외시하고 맙니다.
포스트모더니즘하면 떠오르는 사람으로 리오타르라고 있죠?
리오타르의 개념 중에 '분쟁'이란 게 있는데 이런 예를 하나 듭니다.
태평양 어느 섬에 원시부족민이 살고 있습니다. 이 섬에는 이들이 신성시하는 숲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날 미국의 개발업자가 들어와 이 숲을 개발하겠다고 합니다. 당연히 원시부족민들은 반대할 겁니다.
하지만 이 개발업자가 허가증을 들이밉니다. 이게 가짜인지 진짜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허가증이 있으니 무조건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걸 막으려면 법원에 가서 허가증의 진위부터 개발의 정당성까지 모조리 따져야 합니다.
바로 이때 원시부족민들은 딜레마에 처하게 됩니다.
왜냐면 이 숲은 이들 원시부족민들에게 너무나 신성하기에 이름조차 부르기 힘든데...
개발업자의 개발을 막겠다고 법원에 가게 되면, 거기서 이 숲이 어떤 숲이고 어떤 비밀이 있고 등등을 꼬치꼬치 하나하나 다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숲이 자신들에게 왜 중요한지를 밝히려면 자신들조차 금기시해 쉬쉬하던 이 숲의 비밀을 만 천하에 공개해야만 하는 거죠.
비겁하고 비열한 개발업자는 이미 이들 원시부족민의 딜레마를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기에 더욱 더 이걸 이용해서 허가증을 위조하고 숲을 밀어버리려 하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법원 같은 기관도 이걸 막을 길이 없다는 겁니다.
법은 체계고 질서입니다. 모더니즘입니다. 객관성, 합리성, 효율성을 가지고 모두에게 정의를 실천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법원도 비겁하고 비열한 개발업자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법에 따르면 우선 원시부족민이 원고가 되어 소송을 제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법이기에... 법은 이러한 문제를 눈 뜨고 보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원시부족민으로서는 소송을 제기할 수가 없고, 소송을 제기하는 원고가 없으니 법원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저 개발업자만 희희락락할 뿐입니다.
 
이런 문제 앞에서 리오타르는 '숭고'를 이야기합니다. 칸트가 이야기했던 '숭고'가 해결책이라는 거죠.
숭고란 쉽게 말해 좁은 골목을 걷다가 갑자기 커다란 광장에 나오게 될 때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마치 만주벌판의 거대함을 보고 피가 머리로 솓구칠 때처럼,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거대한 느낌들을 의미합니다.
리오타르는 그런 숭고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는 거대한 세계이며 때문에 인간은 이 세계의 모든 진실을 다 밝혀낼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절대불변의 진리를 찾아낼 수 없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말할 수 없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건의 당사자들이 답을 찾게끔 있는 그대로 놔둬야 한다는 겁니다.
예술의 의미가 칸트가 주장하듯 '목적 없는 합목적성', '무목적의 목적성' 또는 무관심한 관조에 있듯이,
모든 분쟁도 분쟁 그대로 놔둬야 한다고... 분쟁 당사자들이 해결하게끔 놔둬야 한다고... 스스로 숭고를 찾게끔 놔둬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리오타르는 원주민의 행동이, 법원의 판결이 어떠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단지 ‘분쟁’을 증언하고 이를 다른 언어로 표현해내야 한다고, 사건 당사자들이 알아서 좋은 결론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입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사악한 개발업자와 마주한 원시부족민에게, 거대한 자본과 마주한 영세업자에게 스스로 답을 찾으라니요!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같은 현실을 보면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 알지? 다윗이 이길거야... 그냥 냅둬.'하면... 이게 말이 됩니까?!
공정한 척, 객관적인 척하면서... 슬그머니 강자의 손을 들어주는... 이 얼마나 비겁한 짓입니까!
그래서 푸코 같이 현실참여적인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무지 싫어했습니다.
물론 푸코는 자신에게 달려들어 무조건 비판만 해대던 데리다도 참 싫어했구요.
 
제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러쿵 저러쿵 설명했지만, 솔직히 전문가가 아니기에 제 말이 완벽하다고는 못하겠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그 무엇이든 정당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주장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읽어본 결과... 저로선 포스트모더니즘이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이 사라진 이론...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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