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게 말하자면, 목적론(teleology)은 목적을 끌어들여 현상을 설명하려는 반면 인과론(causationism)은 법칙 또는 인과사슬을 끌어들여 현상을 설명하려 한다. 과거에는 목적론적 설명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과학적 세계관이 발달하면서 인과론에 부합하지 않는 설명을 거부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어떤 사람들은 “목적론은 죽었다”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목적론이 인과론에 바탕을 둔 과학적 세계관과 부합하지 않으며 신학적 또는 신비론적 사이비설명(pseudo-explanation)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목적론을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목적을 끌어들여 현상을 설명하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때에 따라서는 그런 설명도 인과론에 바탕을 둔 과학적 설명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목적론을 네 가지로 분류해 보고 어떤 목적론이 과학적 설명이고 어떤 목적론이 신학적 또는 신비론적 사이비설명인지 따져보겠다.
--- 두뇌 목적론 (동물과 인간의 욕망과 믿음) --- 어떤 사람이 냉장고 문을 연다고 하자. 이 현상을 “물을 먹으려는 목적으로”라고 설명한다면 이것은 목적론적 설명이다. 적어도 내가 이 글에서 정의한 목적론에는 부합한다. 이 때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고자 하는 욕망이 개입되며, 냉장고에 물이 있다는 믿음도 개입된다.
과거에는 데카르트처럼 인간의 정신은 물리 법칙을 초월한다고 믿는 과학자와 철학자가 많았다. 그렇게 믿는다면 인간의 욕망과 믿음을 끌어들인 설명은 과학적 세계관에 부합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이 뇌에서 작동하는 물리 법칙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물을 먹으려는 목적으로”도 인과론에 바탕을 둔 과학적 설명으로 인정할 수 있다. “물을 마시고 싶다”라는 욕망도 뇌 회로의 작동이며 “냉장고 물이 있다”라는 믿음도 뇌 회로의 작동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뇌 회로의 작동은 근본적인 물리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TV의 목적 또는 기능은 특정한 전자기파를 수신하여 영상과 소리로 변환하는 것이다. TV의 복잡한 구조는 이 목적에 들어맞게 생겼다. TV가 그렇게 생긴 이유는 TV를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들이 TV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TV를 그런 식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동영상을 순식간에 멀리 보내는 것”이 욕망이며 “TV 제작과 관련된 온갖 과학적, 기술적 지식”이 믿음이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찾아서 마시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믿음에 바탕을 둔 목적론 설명이면서 동시에 인과론적 설명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 신학적 목적론 (신의 욕망과 믿음) --- “인간의 눈과 같은 복잡한 구조가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질문에 “신이 설계했다”라는 설명을 한다면 이것은 신학적 목적론이다. 이 때 “인간에게 눈을 만들어 주어서 신이 만든 자연을 보고 감탄하게 하려는 목적” 또는 “인간에게 눈을 만들어 주어서 생존과 번식을 가능하게 하려는 목적”은 신의 욕망이다. 그리고 “눈의 구조와 관련된 온갖 지식”은 신의 믿음이다.
신의 욕망과 믿음을 끌어들인 목적론은 인간의 욕망과 믿음을 끌어들인 목적론과 닮았다.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지적인 인간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지적인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꽤 많다는 점이다. 특히 과학적 세계관에서는 신이 사실상 추방되었다.
신학적 목적론이 여전히 대중 사이에서는 큰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현대 과학계에서는 사이비설명으로 본다.
--- 신비론적 목적론 (그냥 그랬어...) --- 헤겔은 역사 발전이 이성의 간계(cunning of reason, List der Vernunft)에 의해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일어났다고 이야기했다.
According to Hegel, "World history... represents the development of the spirit's consciousness of its own freedom and of the consequent realization of this freedom."
난해한 헤겔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 가지 해석 방식은 목적론적 해석이다. 이 때 “자유의 확대를 위하여” 또는 “자의식의 확대를 위하여”가 목적이 된다.
만약 그런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신이라면 신학적 목적론이 된다.
만약 그런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를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면 신비론적 목적론이 된다. 신비론적 목적론은 인과론이 될 수 없어 보인다. 그냥 목적이 있고 그 목적대로 세상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왜 그렇게 목적대로 세상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그냥”이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신비론적 목적론도 과학적 세계관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런 목적론은 신학적 목적론보다도 더 나쁘다. 신학적 목적론에서는 신이라도 끌어들여서 목적론과 인과론을 조화시키려고 하지만 신비론적 목적론에서는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이라고 답할 뿐이다.
신비론적 목적론이야말로 just so story(그럴 듯하기만 한 이야기)라는 비아냥을 들을 진정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The Just So Stories for Little Children are a collection written by the British author Rudyard Kipling.
In science and philosophy, a just-so story, also called an ad hoc fallacy, is an unverifiable and unfalsifiable narrative explanation for a cultural practice, a biological trait, or behavior of humans or other animals. The pejorative[1] nature of the expression is an implicit criticism that reminds the hearer of the essentially fictional and unprovable nature of such an explanation. Such tales are common in folklore and mythology (where they are known as etiological myths—see etiology).
--- 진화 생물학적 목적론 (자연 선택을 끌어들이는 진화 생물학적 기능론) --- “인간의 눈과 같은 복잡한 구조가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질문에 진화 생물학에서는 “자연 선택의 산물이다”라고 설명한다.
진화 생물학에 따르면 눈의 기능(function)은 “가시광선을 이용해서 세상에 대한 정보 얻기”이다. 우리 조상들 중에 눈이 없거나 눈이 나빴던 이들에 비해 눈이 좋았던 이들이 더 잘 본 덕분에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눈이 퇴화하지 않았으며 눈이 점점 더 정교한 구조로 진화했다는 것이 이런 설명의 골자다.
“더 잘 본 덕분에” 또는 “더 나은 시각 덕분에” 또는 “가시광선을 이용해서 세상에 대한 정보를 더 잘 얻는 덕분에”가 자연 선택을 끌어들인 인과론에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자연 선택을 끌어들인 인과론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을 진화 생물학에서는 “기능”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는 “보기”, “시각”, “가시광선을 이용해서 세상에 대한 정보 얻기”가 눈의 기능이다. 기능은 선택압(selection pressure) 분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때로는 진화 생물학적 의미의 기능을 목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식의 용어를 받아들인다면 진화 생물학적 기능론은 진화 생물학적 목적론이다.
짧게 말하자면, “눈의 목적은 시각이다” 또는 “눈은 보기 위해 존재한다”가 된다. 이것은 초보자에게는 아주 헷갈리는 표현이다. 헷갈린다면 “눈의 목적은 시각이다”라는 문장을 보고 “우리 조상들 중에 눈이 없거나 눈이 나빴던 이들에 비해 눈이 좋았던 이들이 더 나은 시각 덕분에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눈이 퇴화하지 않았으며 눈이 점점 더 정교한 구조로 진화했다”와 비슷한 긴 문장을 떠올려야 한다.
이런 설명을 목적론으로 부를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될 수 있지만 어쨌든 진화 생물학적 목적론 또는 진화 생물학적 기능론은 인과론과 부합한다.
게다가 진화 생물학적 목적론은 두뇌 목적론의 기반을 제공하기도 한다. 욕망과 믿음을 품은 두뇌가 존재해야 두뇌 목적론이 성립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두뇌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일까? 진화 생물학계에서는 자연 선택을 끌어들여 두뇌의 존재를 설명한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 중에 두뇌가 더 뛰어났던 이들이 그렇지 못했던 이들보다 좋은 두뇌 덕분에 더 똑똑하게 행동할 수 있어서 더 잘 번식했다. 그래서 두뇌가 퇴화하지 않고 지금과 같은 정교한 구조로 진화할 수 있었다”는 식이다.
누군가 피자를 배달시켰다고 하자.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 목적론에 비추어서 설명해 보자.
두뇌 목적론: 배가 고파서 “먹기 위해서” 피자를 배달시켰다. 이 때 “먹기 위해서”라는 욕망이 목적이며, “피자는 먹을 수 있다”와 “전화로 피자 배달을 시키고 조금 기다리면 피자가 오는 경향이 있다”라는 믿음과 결합해서 피자 주문으로 이어졌다. 식욕과 피자에 대한 믿음은 뇌에서 물리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정보 처리 과정의 산물이다.
신학적 목적론: 왜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프면 먹고 싶어질까? 그 이유는 “인간이 굶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라는 신의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신은 인간이 굶어 죽기를 바라지 않을까? 그 이유는 “누군가 자신을 찬양해 주기를 바란다”라는 신의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은 생리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온갖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배고픔과 식욕을 만들어주었다. 전지전능한 신에게는 이런 일이 식은 죽 먹기다.
신비론적 목적론: 왜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프면 먹고 싶어질까? 그 이유는 그래야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에너지를 얻어야 죽지 않기 때문이다. 생존이라는 목적 때문에 인간에게는 배고픔과 식욕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생존이라는 목적이 인간에게 배고픔과 식욕을 선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질문을 하면 신비론적 목적론자는 “그냥”이라고 답한다.
진화 생물학적 목적론: 옛날에 우리 조상들 중에 배고픔과 식욕을 적절하게 느꼈던 이들이 그렇지 못했던 이들에 비해 배고픔과 식욕 덕분에 에너지를 얻어서 더 잘 번식했다. 그래서 배고픔 기제와 식욕 기제가 퇴화하지 않았으며 지금과 같은 정교한 구조로 진화했다. 이 때 “에너지 얻기”는 배고픔 기제와 식욕 기제의 기능이다. 그리고 가끔 진화 생물학자들은 “에너지 얻기는 배고픔 기제와 식욕 기제의 목적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는 “에너지 획득이라는 목적을 위해 배고픔 기제와 식욕 기제가 진화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제 피자 배달보다는 좀 더 사회학적으로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어 보자. 왜 규범이 존재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제시하는 설명은 맛보기일 뿐이다. 온갖 다른 방식의 설명들이 가능하며 실제로 그런 설명들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구체적인 설명이 아니라 목적론의 기본 구조다.
두뇌 목적론: 옛날에는 규범이 없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을 한다. “규범이 있으면 세상이 더 평화로워질 것이다”라는 의견이 인기를 끌게 된다. 이 때 “평화에 대한 열망”은 인간의 욕망 또는 목적이다. “규범이 있으면 세상이 더 평화로워질 것이다”는 인간의 믿음이다. 욕망과 믿음이 결합하여 “규범을 만들어서 실천함”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신학적 목적론: 신은 인간 사회의 평화를 욕망한다. 그리고 규범이 있으면 인간 사회가 더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신의 욕망과 믿음이 결합하여 규범이 탄생하게 된다. 신이 규범을 석판에 새겨서 인간에게 알려주었다는 설도 있고, 신이 인간의 두뇌를 설계할 때 규범도 “새겨” 넣었다는 설도 있다.
신비론적 목적론: 규범이 있으면 더 평화로워진다. 그래서 규범이 생겼다. 평화라는 목적이 어떻게 규범을 탄생시켰느냐고 물으면 신비론적 목적론자는 “그냥”이라고 답한다.
진화 생물학적 목적론: 우리 조상들 중에 양심이 있어서 규범을 어느 정도 자발적으로 지키고, 규범을 어겼을 때 죄책감을 느껴서 피해자에게 보상하고, 규범을 어긴 자에 대한 도덕적 분노를 느껴서 가해자를 처벌하려고 했던 이들이 양심, 죄책감, 도덕적 분노 덕분에 착하지만 만만하지도 않은 사람으로 평가 받아서 양심, 죄책감, 도덕적 분노가 부족했던 이들에 비해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양심, 죄책감, 도덕적 분노 등이 퇴화하지 않았으며 지금과 같은 정교한 구조로 진화했다. 이 때 “착하지만 만만하지도 않은 사람으로 평가 받는 것”이 양심 기제, 죄책감 기제, 도덕적 분노 기제의 기능 또는 목적이다.
규범의 진화에 대한 진화 생물학적 목적론이 규범의 최초 기원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우리 조상들 중에 눈이 없거나 눈이 나빴던 이들에 비해 눈이 좋았던 이들이 더 나은 시각 덕분에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눈이 퇴화하지 않았으며 눈이 점점 더 정교한 구조로 진화했다”라는 설명도 눈의 최초 기원은 설명하지 못한다.
최초 기원에 대한 설명, 점점 복잡한 구조로 진화한 이유에 대한 설명, 퇴화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설명 각각이 모두 의미가 있다. 물론 모두 다 설명하면 가장 좋겠지만...
--- 왜 신학적 목적론과 신비론적 목적론이 인기인가? ---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다른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진화했다. 따라서 다른 동물들과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번식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동물과 인간에게는 욕망과 믿음이 있다. 따라서 인간이 동물과 인간의 욕망과 믿음을 상당히 잘 이해하도록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되었을 것 같다.
상대의 욕망과 믿음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상대의 행동을 이해하거나 예측하려고 할 때 목적론적 설명이 큰 도움이 된다. “저 녀석이 배가 고파서 먹기 위해서 내 고기를 빼앗으려고 한다”, “내가 한 달 전에 크게 골탕 먹인 저 녀석이 복수를 하기 위해서 몽둥이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와 같은 목적론적 설명은 과거에 번식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뱀 공포 기제처럼 목적 탐지 기제도 과도하게 민감하게 “설계”되었는지도 모른다. 설사 뱀 중에 독사의 비율이 30%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도 뱀을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왜냐하면 뱀을 피하는 데 드는 비용은 작지만 뱀에게 물려서 치르는 비용은 막대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목적(욕망)을 과도하게 탐지하는 것이 적응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여자가 남자인 나와 짝짓기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었는데 모르고 지나친다면 짝짓기 기회를 날리게 된다. 반면 그 여자가 나와 짝짓기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지 않았는데 나한테 흑심을 품고 있다고 내가 착각한다면 약간 민망해지는 상황이 발생할 뿐이다.
어떤 남자가 나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었는데 모르고 지나친다면 나의 목숨이 더 위험해진다. 반면 그 남자가 나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지 않았는데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착각한다면 조심하기 위해 받는 스트레스라는 비용을 치르게 된다. 스트레스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다.
만약 인간이 상대의 목적 또는 욕망을 과도하게 탐지하도록 “설계”되었다면 과도한 목적론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 목적론과 신비론적 목적론에 빠지기 쉬운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기독교의 야훼 같은 신들은 인간과 매우 닮았다. 야훼는 인간처럼 도덕적 분노를 느끼고, 도덕적 분노를 느끼면 죄인을 처벌하고 싶어한다. 야훼는 인간처럼 시기를 하고 자신을 칭찬(찬양)해 주면 좋아한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을 읽기 위해 진화했다는 마음 이론 모듈(ToMM, Theory of Mind Module)이 작동하여 신학적 목적론이 생겼다는 설명이 그럴 듯해 보이는 이유다.
--- 사회학의 목적론 (사회학의 기능론) --- “규범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회의 조화를 위해서다”라는 기능론적 사회학의 설명, “지배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다”라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설명,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는 이유는 가부장제 유지를 위해서다”라는 여성주의자(feminist)의 설명은 기능론 또는 목적론이다.
이런 설명은 두뇌 목적론인가, 신학적 목적론인가, 신비론적 목적론인가, 아니면 진화 생물학적 목적론인가? 아니면 제 5의 목적론이 있나?
기능론적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자, 여성주의자가 사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신을 끌어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신학적 목적론은 배제해도 될 것 같다. 또한 그들 대다수는 진화 심리학을 거부한다. 따라서 진화 생물학적 목적론도 배제해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그것은 두뇌 목적론인가? 옛날에 사람들이 모여서 TV를 설계하듯이 규범을 설계한 적이 있나? 자본가들이 모여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설계한 적이 있나? 남자들이 모여서 “강간을 해서 여자를 남자에게 종속시키자”라고 모의한 적이 있나?
동물 세계에도 어느 정도 규범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동물들이 모여서 동물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규범을 설계했단 말인가?
신과 인간의 상하 관계에 대한 신학이 계급 사회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은 소위 원시 공산 사회인 사냥-채집 사회의 신학에서도 신은 인간 아래가 아니라 인간 위에 있다는 사실에 의해 반박된다. 사냥-채집 사회 구성원들이 수천, 수만 년 후의 지배 계급의 지위를 걱정해서 그런 신학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강간은 사냥-채집 사회에도 존재한다. 사냥-채집 사회의 구성원들이 수천, 수만 년 후의 가부장제 사회의 남자들의 지위를 걱정해서 강간을 하기로 모의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또한 강간을 당한 여자의 아버지, 오빠, 남편이 몹시 분개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에도 남자들의 공모는 힘들어 보인다.
만약 기능론적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자, 여성주의자가 신학적 목적론도 거부하고, 진화 생물학적 목적론도 거부하고, 그럴 듯한 두뇌 목적론적 설명도 제시하지 못하고, 여기에서 제시하지 않은 제 5의 목적론도 제시하지 못한다면 남는 것은 신비론적 목적론뿐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신비론적 목적론은 최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