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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결혼합니다.
게시물ID : freeboard_8524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르고14
추천 : 16
조회수 : 312회
댓글수 : 58개
등록시간 : 2015/05/17 15: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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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각이 오전 12시 50분. 오늘 정오에 결혼합니다.

올해 서른 셋인 남자예요. 어떻게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게 됐네요.

혼인신고는 벌써 했습니다. 4월 17일에. 법원 갔다 온 이틀 후에 피임을 안 했는데 한방에 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여친이(그리고 지금은 마누라인 여자가) 생리를 안 한지 한 달쯤 돼 갑니다. 낮에 일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임테기에 두 줄 떴다고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게 기억나네요. 얼떨결에 아빠가 되게 생겼습니다. 둘 다 마누라를 닮은 딸을 은근히 바라고 있는데, 뭐, 누가 나오든 예뻐 죽어하면서 키우겠지요. 하지만 되도록이면 천천히 보고 싶습니다. 둘이서 좀 더 놀고싶거든요.

만난 건 대략 1년 전이에요. 어느 모임에 나갔는데 괜찮게 생긴 여자가 사람들의 대화에 못 끼면서 따분해하고 있는데 눈이 가더라고요. 첫 만남에서는 말을 못 건냈습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 모임에도 또 나왔더라고요. 이번에도 따분해하길래 혼자 있을 때 옆에 가서 이런 저런 말을 걸었어요. 그리고는 슬슬 친해졌지요. 취미삼아 캠핑을 다녔던 시절이라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캠핑에 누나도 불렀습니다. 같이 가자고. 아. 네 살 연상이에요. 근데 보통 제 나이를 더 많게 봅디다들...

그리고는 급격히 친해졌어요. 뭐, 서로 관심이 있었으니까 그랬겠지요. 어디 피크닉도 가고 범퍼카도 타러 가고 하면서 놀았어요. 누나가 나중에 보여준 일기장에 이렇게 적혀있더군요.

"스윽 하고 불어들어온 재미난 녀석. 살짝살짝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하더니 스르륵 어느새 흔들리는 발 사이로 들어와 제 집마냥 머물고 있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할까~"

네 살 연상이라는 게 좀 걸렸어요. 사귀자고 할 당시 제가 서른 둘. 누나는 서른 여섯. 고민을 좀 하다가 마음을 굳혔지요. 밤 열두시에 찾아가서 사귀자고 했습니다. 물론 좋다는 대답을 들었고요. 아 맞다. 여러분. 고백은 도전이 아니라 확인입니다. 고백하면 OK 가 떨어지겠다 싶을 때 "우리 사귑시다." 라고 하는 거예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여자가 먼저 헛점을 보입니다. 그러면 남자는 들어오라고 열어둔 그 헛점으로 '실례합니다~' 하고 입장하면 되는 거지요.

누나: "너는 누구냐."
나   : "누나."
누나: "응?"
나   : "자. 이제 제가 누나가 예상하고 있는 그 질문을 할게요.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5초 후)
"우리 사귑시다."

그렇게 사귀게 됐고 법적으로 부부사이가 됐고 어쩌다 보니 이젠 아기까지 생겼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하셨거든요. 처음에는 여자가 어디가 모자라다고 생각해서 반대한다고 생각해서 그렇지 않다고 설득하는데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집이랑 그렇게 싸우는 동안 못 버티고 떠난 여자도 있었고, 도저히 답이 안 나오겠다 싶어서 제가 포기한 여자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아. 이 인간은 여자의 무엇인가가 마음에 안 들어 결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데려온 여자라 결혼을 반대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결혼하기로 마음을 덕고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는 데까지 잘 구슬려보려고 했습니다만 먼저 의절을 당했네요. 차라리 마음 편합니다. 지금 거의 반년 가까이 연락이 안 돼요. 사정 설명 하고 제 뜻을 강하게 이야기 했더니 어머니께서는 제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동생도 집안 분위기, 아버지 인간성 아는 놈이니 별 말 안 하고요. 하지만 말은 안 해도 다들 저를 딱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저렇게 나오니 결혼식을 할 수가 없잖아요?

제 사정 아는 형님이 결혼식을 해주고싶대요. 그래서 식당 하나 빌려 마누라와 제 지인들 불러모아 대략 70명 참석하는 가운데 주례 없는 결혼식을 오늘 정오에 합니다. 이런 저런 준비 한다고 근 두어달 간을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준비하느라 싸우기도 하고 짜증도 많이 냈는데, 이제 오늘 정오만 지나면 모든 게 끝나네요. 참 길다면 긴 시간이었습니다.

똑바로 살아야겠지요? 막걸리 한 잔만 더 먹고 자야겠습니다. 내일 일어나서 양복 챙겨 입고 식장 데코레이션 하고 손님 받고 해야 하니까요.

오유한지 한... 5년쯤 된 것 같습니다. 그간 외로울 때 위로 많이 얻고 그렇게 살았었는데, 뭐, 안 외로워도 들어오게 됩디다. ㅋㅋㅋ SLR 아재분들도 환영합니다. 저도 2007년 8년 이때쯤 SLR 했었는데. 내공이 많이 딸려 안 하다가 지금은 아이디 비밀번호 다 까먹었네요.

뭐,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댔습니다. 첨수 안 한 집에서 담근 막걸리 한 잔 마시니 취기가 오르네요.

자야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출처 내 손 끝
그리고 내 가슴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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