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8월, 아버지께서 박정희 정권에게 희생당하신 후, 장례절차를 맡으신 분들은 5일 장을 치루기로 했지만, 당시 우리 집은 정말 가진 것이 없었다. 결국 음식을 대접하지 못하는 사정을 알고는 문상을 오는 사람들이 직접 술과 안주거리를 가지고 와 밤샘을 했었다.
당시 살고 있었던 전셋집의 방과 작은 마당은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 찼고, 대문 곁에는 정보과 형사들과 경찰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하이에나처럼 국민을 물어뜯던 시대였던 지라, 윗대가리들의 군화발에 채여 우리 집으로 사찰을 나오기는 했겠지만, 제대로 얼굴도 들지 못한 채 골목 한쪽 구석에 구부정히 서 있던 형사들의 모습은 오히려 측은하기까지 했었다.
장례 중 하루는 동네 양아치들이 찾아왔다. 요즘은 그런 일이 없겠지만 당시만 해도 동네에 초상이 생기면 양아치들이 찾아와 소란을 피우며 깽판을 부렸고 그러면 상을 당한 집에서는 소란을 피하기 위해 얼마간 돈을 집어주곤 했었다.
그 때도 양아치들은 돈이라도 빼앗을 요량으로 우리 집에 찾아왔던 것인데, 양아치들이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리자, 감히 집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그저 기웃거리기만 했던 형사들이 달려와 양아치들을 막아서고 나가라고 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던 양아치들은 더욱 큰 소리로 소란을 피웠고, 그러자 형사들은 밖에 있던 사복 경찰들을 불러 양아치들에게 수갑을 채워 버렸다.
얼마라도 줘서 보낼 요량으로 조의금 봉투를 뒤적이고 계셨던 어머니에게 형사들은 허리를 굽혀 연신 “죄송합니다.”라고 하고는 양아치들을 끌고 나가면서 뒤통수를 후려치며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 새끼들아! 양아치 짓도 자리를 봐서 해야지!”
그렇다. 양아치 짓도 자리를 봐가면서 해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할 수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지 않고 그저 하고싶은 대로 저질러 대는 것들이기에 '양아치'라고 불리는 것이리라.
황교안이 기념품 시계에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황교안"이라는 문구를 새겨 나누어 줬다고 한다. 정말 그렇게도 하고 싶었는가 보다. 하지만 때와 장소 그리고 할 수 있음과 없음을 가리지 않고 했다.
황교안, 참 양아치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