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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신당 : 덕은 덕으로 업은 업으로 0. “오데요? 봉신당요? 그기 어디고? 뭐? 삼거리 골목 끝 삼층? 하이고... 내사마 신령님 모시고 잿밥 먹은 지 30년이오. 30년! 근데 이거 하나만큼은 내가 확신 할 수 있소! 그긴 사짠기라! 사짜! 기자님 무슨 말인지 아오?” - 무학역술원 김봉삼(57)
“어허! 신령님이 노하신다 노하셔! 어디서 그런 족보도 없는 것들을 입에 올리느냐! 우리 애기동자님이 호통을 치는 구나 이놈! 신이 뭔지도 모르는 그런 막 되먹은 것들은 천벌을 받을 거여!” -애기보살 장순례(49)
“봉신당? 기도 점집이었어요? 난 몰랐지... 거 뭐... 간판도 제대로 없고, 플래카드 하나 덜렁 붙여놨으니 그게 뭔지 내가 아나? 여튼 내가 여기 토박인데 잘 모르는 거 보면 뜨내기야!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르지만 뭐 주서먹을 것 있나 하고 왔겠지! 뭐 제대로 맞추기나 하겠소?” - 인근 슈퍼 주인 주원교(62)
“봉신당? 아... 거기 잘 생긴 오빠 있는데요? 알죠! 종종 저희 가게에서 밥 시켜 먹어요. 뭐가 그리 좋은지 허구헌날 부대찌개 하나에 선지국 하나, 물리지도 않나봐. 거기는 웬만하면 가지 마세요. 손님도 없고 파리만 날려요. 그나저나 아저씨 진짜 기자 맞아요? 어디 신문사예요? 신문은 아니고 다른데요? 인터넷? 어디요? 이름 한 번 대봐요. 아저씨 말 하다 말고 어디가요?” 엄마 손 분식 아르바이트생 정유정(17) 1. 내 이름은 이청연, 기자다. 지방 사립대긴 해도 신문방송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건만, 현실의 벽은 녹록치 않았다. 정론직필의 이상을 품었으나 짝사랑에 불과했을까? 유수의 언론사는 번번이 내 이력서를 밀어냈다. 하지만 꿈은 이루어진다. 부단히도 거듭된 언론고시와 이력서의 남발 그리고아버지 친구분의 소개는 결국 나를 당당한 기자로 만들어주었다.
“아저씨 어디 기자냐니까요?”
인터뷰 대상의 간단한 사전조사를 위해 들른 ㅇㅇ동 점집 골목 인근의 한 분식집, 아르바이트생이자 이 집 딸이라는 어린 아가씨가 연신 내 신분을 캐물었다. 집요한 것이 장래 훌륭한 기자가 될 자질이 보인다. 하지만 알려야 할 것과 알리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 또한 기자의 미덕, 나는 냉정한 침묵으로 언론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월간 선데이? 여기 무슨 요상한 잡지 아니예요?” “너! 너... 너 그... 그걸 어떻게...” “아저씨 들고 있는 수첩에 적혀 있잖아요! 월간 선데이!”
실수였다. 연 초에 새로 받은 회사 수첩을 알아보다니. 받은 지 얼마 안돼 사명(社名)을 미처 감추지 못했다. 그나저나 회사 홈페이지 이 달의 투표코너를 보면, 직원의 98%가 회사 수첩에서 사명(社名)을 뺐으면 좋겠다고 했다던데, 왜 회사는 올해도 버젓이 사명을 커다랗게 박아놨을까? 반대를 던진 그 2%가 사장님인 걸까? 아무래도 좋다. 난 이 분식집을 나가자마자 커다란 스티커를 사서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국장님이 그러하고, 다른 선배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것도 어서 빨리!
“여기... 연예 찌라시... 뭐 그런 거죠 아저씨?” “찌.. 찌라... 흡! 사... 사장님 계산이요 계산!” 맹랑한 소녀는 무섭다. 뭘 모르기 때문에 가당찮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찌라시]라니, 명백한 언론사를 가리켜 [찌라시]라니, 황당함에 방금 먹은 김치찌개가 콧구멍으로 역류할 듯 어처구니가 없다.
‘아니 거기가 [찌라시]가 아니면 [찌라시]란 말에 화낼 것도 없잖아요. 화내는 거 보니 [찌라시]가 맞네, 아니 [찌라시] 아니면 마는 거지 [찌라시]도 아닌데 아저씨가 왜 화를 내요?’
대적할 가치가 없는 삼단 논법에 나의 어이는 안드로메다행 특급 열차를 타고, 남은 것은 불쾌감뿐, 하지만 본질은 따로 있다. ‘월간 선데이? 거기 [찌라시] 아니에요?’ 이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 자신이 싫은 것이다. ‘치부를 들킨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자격지심인가.’ 수차례 거듭된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의 답은 명료했다.
‘아니다! 나의 월간 선데이는 찌라시가 아니다!’
단지 거듭된 오해와 번민이 나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분명 지난달에도 정치 경제 기사가 한 토막씩 실렸다. 연예인 가십기사와 카더라 성 특집이 다소 끼어 있는 건 군소 언론 매체의 필연적 숙명에 불과하다. 나를 직접 등용하신 친애하는 편집국장님께선 우리 월간 선데이가 민족정론(民族正論)의 얼을 계승한 정통 주간 시사(연예) 잡지라고 강조 하셨다. 이 시기를 잘 이겨내 정통 언론으로써 거듭 나 보자며 어깨도 두드려 주셨다. 물론 아버지 잘 계시냐 안부도 물으셨다. 아버지랑 고등학교 동창이니 편하게 대하라고도 하셨다.
“후우우우...”
긴장감을 이기려 분식집을 나와 나의 첫 취재지 앞에 나서니 호흡을 가다듬었다. 낡고 어두컴컴한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 낡은 건물에서 과연 난 무얼 얻어 갈 수 있을까? 이걸 믿어도 되는 건진 모르겠다만, 듣자하니 한때 언론계의 전설이자, 자칭 특종 잡는 귀신으로 불렸다는 박선배가 친히 기사 소스까지 주며 추천해 준 곳이다.
“야 낚하산! 그래 너! 너 말야 너! 너 밖에 더 있냐! 이청연이! 국장님이 그러는데 다음 달 기획 기사 한 토막은 니가 하기로 했다며? 메인으로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입봉이네 입봉 크크크 한 잔 사는 건가? 근데 왜 이렇게 울상이야? 첫 기획기사 테마가 뭐라구? [신통방통 한국의 무속인 여기가 HOT하다?] 크크크큭 아 잠깐만... 아 나... 간만에 겁나게 웃었네, 딱 좋네 새꺄! 그럼 너 같은 신삥한테 뭐 대단한 거라도 맡길 줄 알았냐? 이 새끼 진짜 실망한 표정이네 크크크! 아 맞다. 내가 좋은 소스 하나 줄까? 근데 말야! 미리 말해두는 데, 바지에 오줌 지려도 난 책임 안 진다! 키킥! 임팩트는 걱정마! 아주 죽여주는 데니까! 내가 최근에 옮긴 주소 알려줄게 거길 가봐! 거기가 진짜야! 푸풋... 자... 잘해라 신삥 크하하하핫”
박선배는 뭔가 흐뭇한 표정이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 건지... 말하는 투가 농담 같지는 않았지만 뭔가 지독한 악취미가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이 계단 오르길 주저하는지도 몰랐다. 시간은 벌써 저녁 8시 하고도 1분 전, 박선배가 손수 잡아준 인터뷰 약속시간에 정확히 1분 남았다. 하늘같은 선배가 약속까지 잡아주었으니 펑크를 낼 순 없지만, 아무래도 들어가기가 마뜩치 않다. 낡아 빠질 대로 빠진 3층 건물, 1층은 슈퍼고, 2층은 당구장, 3층의 조그마한 가건물 같은 곳이 바로 선배가 소개해 준 봉신당이다. 앞 서 했던 사전 조사대로 그럴듯한 간판 하나 없다. 때가 탈대로 탄 플래카드 위에 붓으로 휘갈겨 쓴 듯 한 몇 글자가 다였다.
[덕(德)은 덕(德)으로 업(業)은 업(業)으로, 봉신당]
[똑똑]
경쾌한 노크소리, 허나 대답은 없다. 뭔가 긴장은 되지만, 이대로 얼어 있을 수 만은 없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본다.
“계... 계세요?”
2. 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소 내가 생각했던 점집과 달리 내부는 극도로 심플하다. 달마도를 비롯한 기괴한 그림도 없고, 연등도 없으며 불단도 없다. 말이 심플이지 그냥 텅 비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작은 책상과 낡은 쇼파 하나, 또 궁색한 내부 분위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터운 철문이 보였다.
“앉으세요. 사진은 안 됩니다. 저 안에도 절대 들어가시면 안 되고, 모든 질문과 인터뷰는 제가 대신 해 드립니다.”
한 사내가 대뜸 나를 보며 말한다. 그런데 이 남자... 굉장히... 굉장히 잘 생겼다. 키도 크고, 다리도 길고, 보니까 손가락도 길다. 얼굴도 약간 긴게 유일한 단점이긴 하지만 피부도 하얀 것이 얼굴 전체의 선이 곱다. 남자 무당은 박수라고 한다던데, 박수를 하기 보단 제비를 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은 외모다. 하지만 분명 박 선배의 말대로라면 인터뷰 대상은 여자였다. 아무리 곱게 생겼어도 말할 때 목젖이 씰룩대는 게 분명히 남자다. 하지만 난 일말의 가능성과 인권 중시의 자세로 질문했다.
“죄송합니다. 박 선배님한테 여자 분이라고 들어서 그만, 저는 성 정체성을 중시합니다. 편하게 이야기하십시오.” “박기자님께서 부탁하셨지만 설희와 인터뷰하시는 건 어렵습니다. 저는 설희 오빠고 봉신당의 사무를 담당합니다.” “아... 따로 계시구나... 뭐 좋습니다. 저기 그러니까 이번에 저희 월간 선데이에서는...” “잠시만!”
약간의 오해가 있었지만 뭔가 인터뷰 비스무리한 걸 시작하려는 찰나, 이 잘생긴 젊은 청년이 갑작스레 나를 만류했다. 서글서글해 보이던 눈매 역시 매섭고 날카롭게 변하는 게 제법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청년은 재빨리 내가 들어온 문 쪽으로 달려가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런 기획취재가 처음이기도 하거니와 첫 취재가 심령과 원혼이 모여들기 딱 좋은 무속인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왤까? 그는 왜 갑작스레 불을 끄고 문을 잠근 것일까? 문득 예전에 주워들은 말이 떠올랐다. 신내림을 받은 무당들은 안 좋은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귀신이나 원혼이 이 곳 주위를 배회하는지도 몰랐다. 어둠속에서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청년의 표정에도 긴장감이 가득하다. 도대체 어떤 원귀인지 묻고 싶었으나 청년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침묵을 종용한다. 박선배의 추천대로 역시 다르다.지금 이 순간 내가 질문을 하려 했다는 걸 어찌 알았을까? 그리고 바로 그때... 무언가 쿵쿵 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계단을 통해 들려왔다. 긴장감에 침 삼키는 소리조차 크게 들린다. 이거 잘 하면 특종인가? 싶은 생각에 난 녹음기와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어이 거기!! 거기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중년 여성의 우렁찬 목소리가 고요를 깨뜨린다. 몹시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기자의 직감이 분명히 말했다. 저건 정말 위험하다고!
“불 끄고, 문 잠그고 있으면 내가 모를 줄 알아! 다 알아! 당장 열어! 안에 있지?”
귀신 같은 통찰력이었다. 우리가 여기 숨어 있다는 걸 어찌 알았을까? 박선배의 호언장담대로 어쩌면 대박 특종을 얻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없나? 지미... 이번주엔 월세를 낸다더니... 망할 것들...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은 받으면 안돼! 비어서 놀리느니 싸게 주자해서 줬는데... 월세를 또 밀려!! 망할!!”
목소리가 멀어지자 어둠 저편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청년의 표정은 비로소 편안해져 있었다.
“뭐야! 저거 뭐... 그냥 건물주가 월세 받으러 오신 건가요?” “쉿! 월세 귀신 모르십니까? 이십년전에 죽고도 아직도 자신이 죽은 줄 모르고, 매월 한 번씩 월세를 받으러 다닌다는 월세 귀신!!!” “헉!! 그... 그런!!!”
다시금 몰려온 원혼의 공포에 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해질 즈음 청년은 웃으며 불을 켰다.
“히히히 순진하시네요 기자님” “예? 뭐예요? 귀신이예요 아닌거예요?” “쉿! 잠깐 이번엔 진짜예요.” “진짜? 그럼 조금 전에는?” “쉿! 진짜라니깐 쇼파에 엉덩이 딱 붙이고 앉아 계세요!”
3. 뭔가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또다시 강압적인 눈빛을 하고 있는 청년의 요구를 무시할 순 없었다. 난 그의 말대로 구석의 낡은 쇼파에 엉덩이를 딱 붙인 채 녹음기를 켰다. 그러자 조금 전과는 약간 다른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익]
낡은 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하지만 불이 켜져 있어서인지 긴장감은 덜했다.
“여기가 봉신당이우?” “앞에 걸린 글 못 보셨소? 우리는 댁 같은 손님은 안 받습니다.”
서글서글해 보이던 청년은 어느새 진지하고 냉랭하게 변해 있었다. 왤까? 월세도 제대로 못내는 형편인 거 같은데, 오는 손님 넙죽 절이라도 해야 할 형편인 거 같은데, 어째서 손님을 가려 받을까? 이 중년 손님의 얼굴이 마치 소도둑놈처럼 생기고, 수염도 깍지 않아 거친 것이 영 불한당 같이 생기긴 했지만 그 외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다. 그는 받지 않겠다는 청년의 말에 울화가 치미는 듯 고함을 치며 말했다.
“나가 지금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우! 지발 여기 용하다는 그 무당인지 뭐시깽인지 좀 봅시다!” “덕(德)은 덕(德)으로 업(業)은 업(業)으로... 여기 오실 처지가 아닐 텐데!” “쓰불! 속 터지게 하네! 여기서 나가 돌아 버려가지고 싹 다 뒤집어 엎어부러야 말을 들어 주겄소!!!” “가시오!”
나도 모르게 ‘헉’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자신의 고함에도 청년이 표정하나 변하지 않자 중년의 사내가 갑자기 품 안에서 시퍼런 것을 꺼냈다. 칼이었다. 그것도 날이 잘 선 커다란 칼, 도살장에서나 쓸법한 두꺼운 칼날이 청년이 앉아 있는 책상위에 꽂혔다. 서슬이 시퍼렇다. 나의 이빨이 나도 모르게 달달 거리며 위아래로 요동친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기자다. 어떤 상황도 헤쳐 나갈 용기와 의지가 있다. 이가 덜덜거리며 부딪히는 건 그저 이 곳이 약간 추워서 일 뿐이다. 춥다. 싸늘하다. 다리도 후들거린다.
“이래도 나의 말을 안 듣겄소!”
눈빛과 눈빛이 오간다. ‘듣는다고 해요 듣는다고 하라고!’란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괜히 끼어들었다 불똥이 나한테까지 튈까 무서워 입을 막았다.본능적인 방어기재였다. 절대 겁이 나서 그런건 아니다. 그러기를 수분... 기어코 젊은 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덕(德)은 덕(德)으로 업(業)은 업(業)으로... 상관없다면 하시오, 단 선불이오.”
청년이 말하자 사내는 그제서야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품안에서 꾸깃꾸깃한 지폐 덩어리를 꺼내 놓았다. 만원짜리 몇 장 그리고 천 원짜리 수장... 아무리 봐도 절대 큰 금액은 아니었다.
“나가 지금 가진 것이 요거 뿐이오. 용하다는 얘기 듣고 급히 오느라 많이 못 챙겼소. 이걸로 되겄소?” “우리는 딱 받은 만큼만 합니다. 애석하게도 금액이 적어서 마일리지 카드는 못 드리겠네요.” “그럼 된 걸로 알고 시작허겄소”
중년 사내는 그렇게 말하더니, 청년의 책상 앞에 있는 상담용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상황이 어느정도 타개된 듯 보였지만 여전히 서슬 시퍼런 칼날은 책상위에 꽂혀 있었다. 중년의 사내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긴 한숨을 내쉬고 있지만 하는 꼴이 약간 돌은 인간 같았다. 다소 진정된 듯 해도 언제 불 같이 화를 내며 사단을 낼지 모를 일이었다.
“나의 문제는... 뚱그런 것이요.” “동그란 것이요?” “그렇소 뚱그란 것이요. 그 육시랄 뚱그런 것들이 아주 나를 미치게 한단 말이오!”
도대체 뭔소린가 싶은 소리를 뱉으면서도 시종일관 중년 남자와 청년의 표정은 심각했다. 나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무언가 있겠다 싶은 생각에 두 사람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환(環)공포증은 정신과에서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끝.” “누가! 무섭다고 혔소? 공포는 지기미!” ※ 환 공포증 : 고리나 둥근 모양등이 반복된 문양에 공포를 느끼는 증세 날 선 분위기가 감지됐다. 중년 사내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책상에 꽂힌 칼을 뽑아 들 것만 같았다. 박선배가 소스라고 주면서 내내 웃던 것이 이런 것이었나 싶었다. 기획취재 하다 골로 간 선배들 있다는 얘긴 들었지만 내 첫 취재부터 이런 살 떨리는 광경이 연출되다니... 나는 숨을 죽인 채 무릎을 움켜 쥐었다. 뭔가 사단이 날 듯 하면 냅다 문 쪽으로 뛸 요량이었다. 물론 나의 안전만을 위해서가 아닌, 신속한 제보와 경찰 출동을 사전에 염두해 둔 기자로서의 의지였다. 매... 맹세코 정말이다.
“과일 좋아하우? 과일 말이우! 사과, 수박, 참외...”
다행히 중년 사내는 손을 다시금 제 무릎 위에 얹었다. 허나 그가 주절거리는 말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나가는 차 바퀴를 보면 수박처럼 보이고, 안경 쓴 머시깽이들 보믄 그것이 자두처럼 보이고, 댁에 눈깔은 앵두처럼 보이는 구먼 크크크큭” “계속 말씀드리지만 그런 문제는 정신과로 가시기 바랍니다. 상담 이걸로 마무리해도 되겠습니까?” “아따! 그 양반 성격 참 급허네!!!!”
계속 말을 끊으려고만 하는 청년, 그의 냉랭한 태도에 결국 화가 난 것인지 중년 사내가 버럭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핏발이 곤두 선 눈, 부르르 떨리는 손... 누가봐도 제 정신은 아닌 듯 보였기에 나는 한층 더 긴장한 상태로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무... 문제는 말이오! 나가... 그 과일을 참 좋아한다마시... 사과는 우리 마누라쟁이가 좋아 혔고, 참외는 우리 얼라들이 참으로 좋아혔지... 그려서 과일장수 고 쌍놈의 새끼가 우리 집에 자주 들락날락했었고!!” “그래서요?”
“나는 뭘 좋아했는지 아슈? 수박이유! 수박! 크~다란 것이 칼로 요로코롬 푹 찔러넣어서 그으면 벌건 과실이 허벌나게 맛좋게 생긴 수박 말이우! 나가 참으로 좋아혔소. 그 수박을... 어려서부터 동네 원두막이고 뭐고 다 댕기믄서 여튼 동네 수박은 다 내꺼였지라... 크크큭 아직도 좋지라... 수박! 수박! 그런디 말이오!” “네!” “지나다니는 사람새끼들 대그빡을 보믄... 그것이 다 수박처럼 보이는 거라... 큰 수박 작은 수박, 그란디 내가 어찌 그걸 참겄소? 안 된다 안 된다 하믄서도, 아무도 모르게 한 두개씩 깟지라... 드셔보셨소? 수박! 참으로 단 것이 물이 쭉쭉 나오지라, 딱딱한 그 수박 위를 칼로 톡톡 뚜둥기다가 푹!! 하고 쑤셔불믄... 이거슨 어릴 적 먹던 수박하곤 완전히 다른기라... 버얼건 수박 국물이 쭉쭉 흐르는디 그것을 쩍하고 잘라내서 한 입 베어물믄!”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분명 저 중년 남자는 똘아이가 맞는 듯 했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에도 똘아이들이 많이 찾아와서 곤란하다던데, 점집이나 무당집은 오죽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지가 수박 좋아한다는 얘기를 왜 여기에 와서 하는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크 맛이 시원허고, 찰진 게, 참을수가 없는거지라, 그렇게 한 통 두 통 따서 먹다보니 나도 모르게 맛이 들었지라... 남은 건 밭에 묻고, 또 묻고... 흐흐흐 수박을 계속 먹으믄 어떤지 아쇼? 수박 고놈이 말을 허요! 칼로 요로코롬 톡톡 두드리믄 살려주쇼 살려주쇼하고 말이오. 어떤 때는 아가씨 목소리도 내고, 어떤 때는 어린애 목소리도 나고, 소리도 각양각색이요! 이제 뭔 말인지 아시겄소? 아시겄냐고!!”
사내의 고함 소리가 고요를 깬다. 내 머릿속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수박을 먹었다. 수박을 좋아한다. 수박을 가르니 속이 빨갛다. 다 먹은 수박껍데기는 밭에 묻었다. 수박을 계속 먹다보니 수박이 말을 한다. 여자목소리도 나고, 어린애 목소리도 난다. 이게 뭔 소린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수박이야 다들 좋아하는 과일이고, 수박을 가르면 속이 빨갛다는 건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안다. 확실한 건 수박이 뭔 말을 한다는 걸로 보아, 이 남자가 살짝 돌았다는 거 정도였고, 젊은 청년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앞으론 수박을 먹지 마세요. 다른 과일도요. 그럼 다 해결됩니다. 자 상담 끝났으니. 돌아가십시오.”
우문현답! 사내의 개소리를 듣고 간단 명료하게 답을 내리는 젊은 청년의 기개가 감탄스러웠다. 수박이 뭔 요상한 말을 하면, 안 먹으면 그만 아닌가? 실로 우문현답이고, 명쾌한 대답이었다.
“쓰불! 나 돌아버리는 거 보고 잡소? 나가 지금 말허는 거 헛으로 듣지 마쇼! 나으 눈에는 지금 댁에 대그빡도 수박으로 보인다 이말이오! 저기 앉아있는 저 치도 수박으로 보이고, 내 당장 이 칼로 그 대그빡을 쪼개서 수박물을 쪽쪽 빨아 먹어야 내 말 알아 듣것소!!!”
침묵이 흘렀다. 수박 얘기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됐지만, 내 머리통을 쪼개겠다는 이야기는 결코 흘려들을 수 없었다. 내가 본능적으로 머리통을 손으로 감싸 쥐는 사이 청년은 사내를 두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혹 나를 두고 혼자 도망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그는 한쪽 벽에 있는 철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들어가세요. 액수가 적어서 손해인거 같지만, 가끔은 쓰레기도 치워야 하는 법이니까! 설희야 손님이다.”
철문이 벌렁 열리자 사내는 그제서야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간다. 아주 잠깐이지만 문틈 사이로 얼굴이 눈처럼 하얀 소녀가 잠시 보였다. 나는 박선배가 이야기한 인터뷰 대상이 아마 그 아이였을꺼란 생각을 해봤지만, 젊은 청년의 표정이 심각했기에 따로 묻진 않았다. 그저 떠오른 것은 저 불한당 같은 사내를 그 작은 소녀와 한 방에 두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하는 것이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정신 나간 사내가 안으로 들어가 안전해졌다는 안도감이 뒤섞여 묘한 기분이다. 하지만 난 기자정신에 입각해 슬며시 휴대폰을 꺼내 112를 눌러놓는다. 여차하면 통화버튼을 눌러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시끄러운 호통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중년 사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걸어 나왔다. 아니 오히려 사내의 얼굴은 활짝 핀 것이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흐흐흐 이제 제대로 보이는 구만, 제대로 보여, 젊은 친구 얼굴도 이제 사람 얼굴로 보이고, 저기 당신도 사람 얼굴로 보이네... 흐흐흐 이제 됐네, 이제 됐어! 이거이 도대체 뭔 빌어먹을 병인가 했는데, 이제 나았구먼, 이제 다 나았단마시!”
사내는 그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도대체 무슨 변고가 있었기에 저 사내는 기뻐하며 나간 것이고, 철문안의 소녀는 도대체 무얼 했기에 저 정신 나간 사내가 저리 기뻐하는 것일까? 나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뭡니까 도대체.” “뭐요?” “방금 왔다간 저 미친 인간이요.”
내가 묻자 청년은 아직도 책상에 박혀 있는 칼을 뽑아 들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마누라하고 과일장수하고 바람이 났다고 생각했었나 봐요.” “아? 아내분이 사과를 좋아하고 그랬다더니... 그래서 과일장수가 들락날락?” “네. 화가 났겠죠.” “에이 그건 당연하죠.” “그래도 죽이면 안됐어요! 바람 난 건 아니라고 하던데...” “누가요?” “그 사람 마누라가요.” “마누라가요? 언제요?” “그 사람 등에 붙어 있더라구요. 한이 깊으면 못 떠나거든요.” “네?” “저만 죽었으면 괜찮은데, 애꿎은 애들까지 죽였다네요. 그래서 한이 깊데요. 하지만 마누라 문제는 아니예요. 죄 없이 과일 팔러 왔다 죽은 과일장수가 문제였죠.” “과일장수요?” “네... 과일장수... 딸린 자식이 좀 있고, 병든 노모도 모셨다나봐요. 객지에 비명횡사하니 돌봐줄 사람도 없고, 노모도 돌아가시고, 자식들도 줄줄이 다...뭐 그래서 화가 났겠죠. 그래서 그랬데요.” “그... 그게 도대체 무슨?” “안에서 설희가 잘 타이른 모양이에요. 한스러운 건 알겠으나, 엄한 사람들 고통 받게 하지 말고 그만 하라고!” “아... 그래서 이젠 동그란 게 과일로 안 보인다고?” “네! 하지만 저희는 다 풀어주진 않아요. 덕은 덕으로, 업은 업으로 풀죠. 그게 저희 원칙이니까!” “그건 또? 무슨?”
아까 그 정신나간 남자도 그러더니 젊은 청년도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아리송한 것이 마치 무슨 수수께끼라도 푸는 심정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어쨌는지, 잠시 뜸을 들이던 청년은 마지못해 말했다.
“그 사람한테 남은 수박은 딱 하나... 그건 우리도 말리지 못했죠. 과일장수도 한은 풀어야 하니까, 부디... 그 사람... 거울을 보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취미가 스무고개일까? 여전히 알 수 없는 말만이 남았다. 의아함은 남았지만, 책상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서슬 퍼런 칼 때문에 난 부랴부랴 녹음을 마치고 잡지사 사무실로 돌아왔다. 박선배는 나를 보자마자 괜찮았냐? 오줌은 지리지 않았냐 물었지만, 난 그럭저럭 괜찮았노라고 답했다. 정신 나간 사람이야 어디든 있는 거고, 칼은 조금 무서웠지만 오줌을 지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그 사람? 수박 좋아한단 얘기를 왜 그리 박력 있게 했던 걸까? 으... 하지만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 4. 여담이지만, 며칠 뒤 지방에선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 살인마가 발견 됐다는 기사가 났다. 젠장 나는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녀도 잡지 못하는 특종인데... 개 부러웠다. 살인마는 수명의 여자와 아이를 죽였고, 땅에 묻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죄책감 탓인지 제 방 거울 앞에서 제 머리통을 제 스스로 자르고 최후를 맞았다고 했다. 참 별난 세상이다. 수박 좋아하는 미친.놈부터, 제 머리통 가르고 죽는 또라이 연쇄 살인마까지... 아깝다. 그 특종 내가 발견 했으면 좋았으련만... 난 어디서 그런 연쇄 살인마 한 번 만날 기회 없나? 나도 그런거 한번 만나기만 하면 제대로 특종 뽑아낼 자신이 있는데! 난 왜 하릴없이 수박 좋아하는 미친인간들이나 꼬이는 걸까? 참 그리고 이번 달 기획기사... 이건 또 어찌 마무리하나? ‘안전의 사각지대에 빠진 무속인들’이란 타이틀로 내민 나의 첫 기획기사는 일언지하에 빠꾸를 먹었고, 조미료까지 쳐 넣은 수박 돌아이에 관한 기사를 보신 국장님은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젠장! 그 봉신당인지 뭔지에 또 가봐야 하나? 고민에 고민이 거듭된다. 나 신입 기자 이청연, 이것은 봉신당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취재 일지다.
끝. |
출처 |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