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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이 아시아에 미친 영향
게시물ID : sisa_8562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unwood0
추천 : 29
조회수 : 1198회
댓글수 : 37개
등록시간 : 2017/03/01 07:25:02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1919년, 한국의 비폭력 무저항의 3.1운동은 

인도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3.1운동 3개월후엔

자극받은 일본의 중국유학생들의 5.4운동이 발생하고

이 운동의 영향으로 2년후, 중국 최초의 공산당이 생겨납니다


동학의 맥이, 민중이 기축이 된 3.1운동까지 이어지면서

당시 아시아 식민지 국가중 최초의 저항운동으로 기록됩니다


이것은 현재의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평화적 촛불집회의 뿌리와 같으며

평화적인 한민족의 민족성을 잘 보여줄수 있음에도 


지금까지 (간악한 일제의 망령들로) 제대로 의의를 조명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계인들이 간디는 알아도 3.1운동은 모릅니다)




그래서 3.1운동이 정확히 어떤 과정으로 이뤄졌는지도 

정작 우리도 잘 모르는거같습니다


다운로드 (4).jpg          
고종.jpg

몽양 여운형과 고종의 장례식이 시발점 이였습니다


어머니가 태양을 치마폭에 받아 잉태하였다하여 몽양(꿈속의 태양)이라 불린 여운형 선생은


1918년 중국 상해에서 '한국 최초의 정당'이라할만한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영어를 잘하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국가 조선민족의 염원을 세계에 선포하고자 합니다

(신한청년단의 결성 이유는 국제회의 참석이나 공식서한 전달은 개인 자격으로 할수없다는 조언에 따른것)

(파리강화회담은 미국 윌슨의 전후처리 원칙중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자'하는 민족자결주의를 담고있었다)


한편 일본어를 잘하는 장덕수를 조선과 일본에 보내 

조선사절의 국제회의 파견 소식을 전함으로써 

1910년 일제합병으로 절망하던 조선민중에 나라의 건재함을 알림으로써 기미독립운동이 시작되고

여기에 고종의 독살설이 기름을 부어, 고종 장례 인산일인 1919년 3월 1일이 전국적인 봉기 날짜가 됩니다


고종장례.jpg


당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떠나던 김규식이 신한청년당원들에게 남긴 말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



태극기만을 든, 흰옷의 비폭력 조선민중과

말타고 군도를 휘두르며 유혈로 탄압한 왜정의 대비적인 모습은

일본이 세계에 알리고 싶지않은 모습이였습니다 



저항하며 방어한 난징 시민들을 거의 대학살하던 잔인함에서 보듯 

(각 민족을 화보로 만든 중국 청나라 기록에도, 이례적 설명으로 일본인은 인명을 가벼이 여긴다고 기록되어 있다)

3.1운동 이후 민족말살정책의 기조를 이루는건

협박 위협의 일방통행밖에 모르는 지금의 친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않은 종특같다

(당시 스페인 독감으로 약30만명이 죽였다고하는데, 인재로 인해 확산된 메르스,AI등 보는등 이것도 종특같다) 


 


몽양 여운형은 3.1운동에 놀라 유화책을 쓰려는 일본정부의 초정을 받아 1919년 일본에 가서

일본정계를 유연한 언변과 굿곧은 신념으로 탄복시키는 한편. 국제 기자들에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귀국하는데..

이같이 탁월한 면모로  일본정부가 의도한 자치운동을 무마시킴으로써 

일본내에서는 그 책임을 물어 일본 내각까지 교체가 됩니다

이후 민족말살 강경정책 (우익 아베의 일본 일당독재 자유민주당(자민당)의 뿌리되겠다)



한반도의 독립지사들이 탄압을 피해 북쪽 연변, 만주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는 

 이런 독립지사들을 보내는 심정을 담은거라고 저는 봅니다  '역겨운 나'는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조선의 현실이였죠)


박정희가 활동했던 간도특설대에서 보듯, 왜정은 독립지사들 살해에 열을 올립니다 



신흥무관학교, 김좌진 장군등 조직적인 독립운동 세력이 형성되고 활발히 활동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여운형 선생은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자신이 활동하던 상해로 집결시켜 상해 임시정부의 시발점을 만듭니다 


신한청년당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건물과 집기등의 기반을 내어주고 자연적으로 해체되고

그 자리에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집니다


대한민국.jpg

대한민국은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를 국가의 시작점으로 헌법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몽양 여운형이 건국에 결정적 역활을 한것입니다




이렇게 몽양 여운형은 상해 임시정부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자신은 임시정부 외무부위원장으로 대외선전을 맡았고 


1921년에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나 조선독립을 의논하며 200만불의 지원을 약속받고

중국 손문,장개석,모택동,왕정위등 국민당과 공산당의 중국 지도층과의 유대를 강화하는등 

조선독립운동에 국제적 외교력으로 활발히 활동합니다 (그는 영어도 잘했다 엄친아다) 



한편 숟가락 얹듯, 조선왕조 이씨라는 으시댐으로 

스스로 대통령이라 명함박고 다닌 이승만은 (이때는 부정선거도 없었다 선거가 없어서)

동포들의 막대한 독립자금을 호화생활과 계집질로 사적 유용하여(이것도 선의?)

상해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됩니다 ~ 그러다 결국 하와이로 




상해에서 격투끝에 일제에 잡혀, 한반도로 끌려와 옥고를 치르고 

국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여운형 선생이  (그래서 해방을 시점으로 그를 국내에서만 활동한 운동가로 오해하기도) 

해방을 예견하고 일찍부터 국내에 조선건국위원회라는 비밀조직을 조직합니다


출옥후 국내 생활기반이 없던 그는 중외일보(중앙일보)의 사장으로 일하며

(유명한) 마라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사진을 지워 신문에 개재하기도 합니다

 


일제 치하의 한반도에서 독립에 대비한 정치조직이라는 

대담하고도 확고한 목표로 결성된 건국동맹 산하에는

농민동맹, 노동군, 보광당,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산악대, 군사위원회, 노동자와 부녀자와 사무원의 조직결성등이 있었고

정치적활동, 무장투쟁에 대비한 군사적 준비, 조선독립의 국제적 승인에 대한 준비작업까지 이뤄지고 있었다



왜정이 빠져나간 자리를 충분히 채울수있었음에도 권력욕의 화신 이승만의 방해친일파들이 생존

패전국이자 전범국인 일본이 분단되어야 했음에도 언론의 조작등 외세의 입김으로 한국이 분단되었고

...




1.2차 대전이 있었던 세기말적 20세기 

한번도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와 그 찌꺼기들이 있었음에도 

대한민국은 유구한 인문역사국민의 노력, 전세계 고도성장에 힙입어 한강의 기적을 이뤄

원조받은 극빈 수혜국에서

신민지 없이도 선진국의 대열에 이르는 유일한 나라가 됩니다



2쳔년간 이어지던 말세적 시기를 지나서 

새로운 밀레니엄 2000년을 맞이하며,
김대중 대통령의 IT 대중화 정책으로 모든 가정에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개벽을 맞이하고월드컵...jpg
2002년 월드컵으로 세계인으로써의 자아가 폭팔하고 

노무현 대통령때 세계11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합니다

여러 격변들로 자칫 물질만능주의로 흘러가려했으나 우리는 지금 사람과 정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6CK.jpg

그리고 
새로운 밀레니엄 빛의 주기에 





함께하지 못하는 20세기의 악령들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C4hrVTTUEAECl7n.jpg



차마 일장기 대신에 성조기를 흔드는것은 매국노의 본질입니다








아름다운 태극기가 우리의 손에 휘날리던 3월 1일을 맞이하여 

태극기...jpg


여운형 선생과 고종 장례식으로 어떻게 촉발되었으며 
어떻게 대한민국 정부로 이어졌는지 
어떻게 인류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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