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대 권미연의 싸움의 결론은 오직 뻔하다. 단 하나, 이병헌이 제 꼬추에 책임을 져야 한다 라는 것이다.
일부 남성들과 여성들이 권미연이 제 아랫도리에 책임져야 한다는 궤변으로 일관하고 있으나, 그런 식이라면 더더욱, 제일 먼저 나무랄 것은, 남자가 왜 함부로 꼬추를 휘둘렀나는 부분, 즉 이병헌의 꼬추가 한 일에 책임지게 해야 말이 맞게 되는 법이다.
많은 남성들의 이 문제를 보는 시각은, 권미연도 이병헌 덕에 쾌감을 맛보았으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권미연은 나가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여성들은 권미연이 이병헌이란 대스타를 만나 그 명성과 후광을 같이 누리게 되어 기뻤으나 이병헌에게 차임으로써 그 기쁨, 권력을 잃게 되어 발작하는 것이라고도 소감을 달았다.
그런 열등하고 얍삽스럽기 까지 한 저질 남성들, 여성들의 논리를 공박하자면 이렇다 . 첫째, 그들은 섹스를 쾌락으로 본다는 것이다. 오르가즘을 얻기 위해 섹스는 존재한다는 가치관을 가진 동물들이다. 그리고 이런 식이라면 최고도의 즐거움, 쾌락을 얻기 위해서는 아무 짓이든지 하여도 무죄하다는 범죄적 인식까지 가능하게 된다. 그들의 숨겨진 가치관은 인간적 인생론적, 철학적, 고뇌적, 소명자적 삶이 아니라, 자기들이 사는 이유는 그저 즐거움을 얻기 위한 삶이고, 그 즐거움을 얻기 위해 섹스도 필요한 것이고 그러기에 즐거움을 얻기 위해 남성도 여성도 기꺼이 섹스하는 것이기에, 즐거움을 얻은 이상, 헤어지거나 버리우거나 이미 고도의 오르가즘을 너도 맛보았으니 버려짐을 갖고 앙앙댈 이유 없으며 그런 짓 하는 것은 "꽃뱀"이나 저지르는 초잡한 짓이라는 것이다.
둘째, 대스타에게 불림받았으니 감지덕지하라는 여성들, 아마도 이병헌의 팬류에 해당할 법한, 의 논리는 이러하다. 그들은 남성을 만나되 그 남성의 정체성, 본질, 인간됨을 봄이 아니라 남성이 가진 직위, 명성, 돈, 권력, 후광을 보며 남성을 만나고 그것에 의해 자기들을 바치겠다는 의미다. 이런 사고방식은 곧,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섹스하는 것이 아닌, 그 인간의 대스타성, 권력, 직위, 돈봉투 등을 보며 사랑하고 결혼하고자 하는 창녀적 사고방식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다. 창녀들은 섹스를 돈과 바꾸기 위해 한다고 친다면, 권미연에게 대스타와 잠잤으니 감지덕지한 줄 알으라고 외치는 여성들의 울부짖음이야말로, 이병헌이란 대배우의 인물과 스타성만 있으면 자기들도 아랫도리를 벗고 섹스 제공하겠다는 창녀적 발상, 음란한 욕망이 그 안에 숨어있음이나 똑같다.
한 마디로 짐승적 소리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며 외치는 남과 여들인 것이다. 짐승은 책임질 필요가 없다. 짐승은 자기들의 행위에 부끄러움도 책임지려도 하지 않는다. 권미연씨가 요구하는 것은 이병헌에게 특히 그의 꼬추와 입에게, 그가 한 말, 그가 했던 섹스에 대해 책임지라는 것이다. 그 책임의 수준도 많이 하향하여, 이제는 용서를 비는 사죄의 말만 있으면 모두 용서하겠다고 떠나겠다고 하였다. 그러함에도 이병헌은 권미연에 대해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고소까지 하였다고 한다. 참 나쁜 인간성을 가졌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명예는 소중하고 자신과 함께 밤을 나눈 여성의 명예는 소중하지 않다는 짓거리다.
이병헌은 그 짓을 하여놓고, 한 여성을 자신의 방에 며칠 간이나 묵게 했다가 차가운 거리로 내몰은 후, 그 짓을 "좋은 추억"이라고 말하였다. 남을 갈가리 찢어놓고 그것이 어떻게 좋은 추억일 수 있는가. 히틀러와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면서 그들은 클래식을 듣고 최고의 교양인으로 자처했다. 그런 것은 교양이 아니다. 무엇보다 남을 타인을 자신의 탓으로 찢어놓고 절망에 빠지게 만들어 놓은 후 그것을 교양이나 좋은 추억이라고 치부하는 일은 인간적인 일이 결코 될 수 없다. 어이없는 것은 저토록 저열한 이병헌의 도덕관, 가치관에 의외로 수많은 남성과 여성들이 동조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뭉그러진 사회인지를 말하여준다. 남을 유혹하여 놓고 내버리는 사람, 대스타성이라면 아랫도리를 벗어도 좋다는 겉은 멀쩡하되 속은 창녀인 것들, 자신의 몸에 하나 달린 꼬추 조차 제어하지 못하여 뭇 어린 처녀들의 삶을 갈가리 망쳐놓는 불한당들이 의외로 이 사회에 많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그런 잘못을 지적당하면 거꾸로 방귀 뀐 자들이 화낸다고 오히려 도덕적인 사람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는 것이다.
섹스는 쾌락용인가. 아닌가. 재판부 판사들도 마찬가지로 섹스를 쾌락의 일종이라고 판단한다면, 권미연씨를 나무랄 것이고 판사들이 이병헌의 꼬추가 궁극 저지른 일이라고 안다면 이병헌의 꼬추에게 책임 묻는 재판을 내릴 것이다. 하기사 판결이 내려질 지라도 이병헌의 꼬추는 건재하고 그저 이병헌의 돈주머니만 약간 아주 약간 타격을 좀 입을 것이다. 그 돈과 22살 난 처녀의 뒤로 던져인 전 인생의 가치와 어느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하나. 인생의 값이 훨씬 크고 비싸다.
이병헌을 변호하는 남성들의 궤변 속에는 그들도 꼬추를 마음대로 굴릴 텐데 거기 당한 여자들이 권미연처럼 물고 늘어지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이 숨었으며, 이병헌을 변호하는 여성들의 궤변 속에는 대스타와 함께 자지 못한 창녀로서의 시기심이 섞이었다. 나아가 본 필자의 글에 적개심을 표하는 일부 남성들의 궤변에는 앞으로 그들의 섹스 파트너링 상대감들이 대거 - 본 필자의 글로 인해 - 줄어들거란 위기의식까지 엿보인다. 옳지 않다. 남을 울리고 쾌락을 얻는 일은 옳은 쾌락이 올바른 삶이 아니다. 추구할 것은 올바른 삶이지, 쾌락이 아닌 것이다.
권미연씨가 당당히 걸어가기 바라며 글을 썼다. 아직 어려서 똥덩이 잘못 밟았구나 생각하고 눈물 닦고 걸어나가기 바란다. 우리들 모두 어릴 때는 돌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것을 딛고 일어서면서 성장하는 법이다. 22살이 성장 다 마쳤다고 완전성숙한 나이다고 여기는 위인이 있다면, 그이 또는 그런 여성이야말로 성장이 22세에서 스톱된 불성숙 인간들이다. 내면에는 짐승의 넋이나 우글대는. 19살 생일만 땡 하고 넘기면 그 순간부터 완벽 성인이다 라고 우기는 위인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19세와 19세 빼기 하루와는 얼마나 다른가고 묻고 싶다. 본 필자의 나이 오십이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매일 하루 하루가 실수 투성이다. 인간은 오십 넘어서도 끝없이 실수하고 성장하는 존재다. 사기꾼에게 당하는 사기 피해자들의 나이는 노소 구분이 없다. 오히려 나이 들 수록 보이스피싱에 더 잘 걸린다. 나를 불쌍히 여기듯 남도 불쌍히 여길 줄 알기 바란다. 대스타에게 아무리 눈이 멀었어도. 쾌락에 눈이 멀었을 지라도, 인간됨은 보여야 할 것이다.
인터넷에 댓글 한개 잘못 올려도 책임져야 하는 경우 수두룩하다. 댓글 한개도 그러할 진대, 영구히 달고 사는 꼬추의 행실이야말로, 얼마나 더욱더 책임져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는가. 평생 함께 하자고 꼬시던 꼬추에게 속아 넘어져 삶이 전부 깨어진 22살 어린 아이를 불쌍히 여기랴. 산전수전, 여자연예인들까지 두루 겪어 두루 노회해진 39살 대스타님을 불쌍히 여기랴. 판단이 너무 뻔하지 않으냐? 어찌 불쌍한 여아에게 돌까지 던지는 몰염치함, 잔인성들까지 고루 지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