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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 꼬마
게시물ID : panic_857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gerrard
추천 : 21
조회수 : 287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6/01/21 11: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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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단순 자작입니다.  글이 좀 길어요.>
 
지금부터 제가 작년 일본 유학중에 경험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일본은 자판기의 나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딜가든 자판기가 많은 건 모두들 알고 계시죠?
제가 살던 XX마을은 자그만한 시골마을인데 논밭이 많고 큰 건물이 거의 없어 푸른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런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여기는 무와 당근이 유명한데 밭에는 자기가 먹을 만큼만 가져가고 알아서 돈을 나무상자에 놔두고 가는 형식의 
아날로그 자판기(?)가 아직 남아있을 정도로 마을사람들은 때뭍지 않은 순박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게 이런 시골에도 골목 곳곳에 자판기가 있는데 그중에도 저희 집에서 500m정도 떨어진 놀이터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만난 꼬마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는 회사에서 숙소와는 꽤나 떨어진 곳으로 전철로 30분거리에 있습니다.
퇴근시간은 보통 20시 정도인데 집에서 추가로 해야 할 일도 있고 피로도 풀 겸 해서 집 근처 놀이터 앞 에 위치한 음료수 자판기에서 거의 매일 캔커피를 뽑아 먹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판기 옆 구석에 조그만한 남자애가 웅크리고 앉아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첨엔 깜짝 놀랐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언제나 처럼 자판기에 동전을 넣습니다.
캔커피를 뽑은 후 잔돈을 챙겨 갈 때쯤 꼬마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 합니다.
 
“형. 10엔 만 주세요.”
 
뭐…귀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해서 10엔을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꼬마에게 일단은 밤이 늦었으니 집에 들어가라고 타일렀고, 꼬마애는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자판기를 떠났습니다.
 
다음 날도 커피를 뽑으러 가니 꼬마애가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이번엔 아는 척을 해봐야겠다 해서 제가 먼저 인사를 하니, 별 반응없이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뭐… 상관없나.. 하고 캔커피를 뽑고 잔돈을 챙겨 갈 때쯤 또
 
“형. 10엔 만 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뭐 저에겐 그리 큰돈도 아니고 크게 잔돈에 신경쓰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 또 별 말없이 줬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선 또 꼬마는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어딘가 모자란 꼬마가 아닐까 하며 또 별 생각없이 그냥 집으로 향했죠.
 
그렇게 한달 정도는 매일같이 그 꼬마애가 있는 겁니다.
 
별 대화는 하지 않았지만 정이 들었는지 언제부터 10엔씩 계속 챙겨 줬고, 그렇게 계속 하루하루가 지나갔죠.
 
그러나 눈 바람이 새차게 불던 겨울날.. 저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서 회사를 쉬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자판기 쪽에는 가지 않았죠. 아니 갈 수가 없었기에 그 아이와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감기몸살과 싸우며 버틴 게 무려 일주일. 이제서야 제 몸도 어느정도 가벼워지고 두통도 사라져서 다음 날 출근을 하기 위해 목욕과 세탁을 하며 이런저런 준비를 하다가 커피라도 마실까 해서 자판기가 있는곳으로 가 봤습니다.
 
자판기 앞에는 언제나 있던 꼬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이렇게 추운날씨엔 없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별 생각없이 언제나 처럼 커피를 뽑아서 주워 들기 위해 자판기 배출구를 향해 허리를 숙여 손을 뻗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배출구에서 흰 손이 나오더니 제 손목을 덥석 잡고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형.. 잠깐만..”
 
라는 꼬마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기겁을하고 온 힘을다해 뿌리쳤고, 그대로 줄행량을 쳤죠.
집에 도착한 저는 제 팔에 남아있는 손자국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이건 몸이 안 좋아서 헛걸 본 게 아니라 진짜구나…하고.
 
그리고는 직감적으로 알게 됐습니다. 그 꼬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그렇게 무서운 경험과 기괴한 의문만을 남긴 그 날 밤 저는 복잡한 생각에 잠기다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충열된 눈으로 나선 출근길에 골목 어귀에서 만난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야기인 즉슨
최근 이 동네에 40대 초반의 남자가 7살 정도의 아들로 추정되는 꼬마와 함께 이사를 왔다고 합니다.
그 남자는 일은 하지 않고 인생을 비관하여 매일같이 술만 마시고 지냈고, 술을 마시면 어김없이 아이를 폭행하며
“니네 엄마한테나 가버려” 라고 소리치며 밖으로 쫒아내곤 했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엄마를 찾아가는 것 밖에 없겠구나 해서 도쿄로 갈 수 있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모을려고 했으나 7살배기 꼬마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판기 앞에서 추위를 피하며 쭈그리고 앉아있다가 저랑 만났고, 저한테 받은 10엔으로 희망을 얻었는가 봅니다. 그 동네 아주머니들에게도 몇 번 받기도 했구요.
 
계속 그런 식으로 돈을 모을 수 있겠다고 생각 했는가 봐요.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니까 가능한 판단이겠죠.
 
그러다 어느 날 객지에서 온 불량한 녀석들이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얼큰하게 취해서 자판기 앞에 앉아 있는 꼬마에게 괜히 시비를 걸다 별 반응이 없으니까 화가 난 나머지 힘껏 발로 차버렸는데 아무래도 영양실조에다 추위 때문에 약해진 몸이 버티질 못했나 봐요.
 
그렇게 쓰러져 있던 꼬마는 갑작스런 지독한 추위와 겹쳐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길가에서 얼어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살기 좋은 마을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생긴 거죠.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꼬마는 다음 날 눈을 치우던 동네 아저씨에게 발견되어 경찰차가 오고 난리 났었는데 전 몸살감기와 싸우느라 상황을 전혀 몰랐었습니다.
 
전 갑자기 눈물이 핑돌았습니다. 그 불쌍한 녀석을 뿌리치고 도망쳤다는 죄책감에 다시 그 자판기로 달려 갔죠.
 
역시나 꼬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나타난다는게 말이 안 되지만 먹먹한 마음에 다시 한 번 꼬마를 소리쳐 불러 보았습니다.
 
「꼬마야!!」
 
그러자 자판기 옆 구석진 공간에서 슬그머니 꼬마의 형상이 나타났습니다. 보일듯 말듯 옅은 형체로 나타났지만 그 꼬마가 확실했습니다.
그리고는 꼬마는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 그동안 고마웠어. 엄마랑는 벌써 만나서 이젠 이돈 필요없어.
 이거 줄려고 부른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자판기에서는 10엔짜리 잔돈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꼬마는 웃는 표정을 뒤로하고 점점 희미해져가더니 이윽고 사라졌습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꼬마의 아버지는 그 후 행방불명이 되었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경찰이 수배를 하여 쫒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유인 즉슨 심한 부부싸움 끝에 부인을 칼로 죽이고 아들만 데리고 이곳으로 야반도주 한 듯 합니다. 당연히 꼬마는 잠결의 비몽사몽이었으니 그 사정을 몰랐겠죠. 그리고는 계속해서 엄마를 찾는 아들로 인해 그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계속해서 술만 마셨다고 하네요.
 
안됐지만 지금에서라도 꼬마는 엄마를 만나게 돼서 다행인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에 돌아왔지만 그 돈들은 도무지 쓸수가 없어서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그 10엔짜리 동전을 볼 때마다 그 꼬마와 만났던 그 날 하루하루가 생각나네요.
출처 루리웹 붸스트 님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community/327/read?articleId=28609604&bbsId=G005&itemId=145&page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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