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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는 어떤사람인가를 보여주는 일화들
게시물ID : sisa_8582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승부사L
추천 : 0/2
조회수 : 1685회
댓글수 : 31개
등록시간 : 2017/03/05 11:24:54

안철수 교수 일화 모음

V3의 탄생


안철수가 군대에 가게될 즈음 미켈란젤로 바이러스가 유행했다. 미켈란젤로의 탄생일인

3월 6일에 활성화되는 바이러스로 컴퓨터의 기억 자료를 파괴시킨다.

안철수는 자신이 장교 훈련을 받는 3개월 동안 백신을 만들지 않으면 피해가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1991년 2월 6일 혼자서 밤새 백신을 만들어 PC통신을 통해 배포했으며 이것이 V3이다.

그리고 이날 아침 장교 훈련을 받기 위해 대구로 내려가 입영했다. 그러나 백신 제작에 몰입한 나머지

입대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가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안철수연구소안철수는 사업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 4년 간은 많은 고생을 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의 월급날은 매월 25일이었는데 월초부터 직원들의 월급 걱정을 해야 하는 지경이었고

자신이 월급을 받지 않고 직원들의 월급을 줄 때도 있었다.

그렇게 회사가 적자로 힘들던 시절인 1997년, 회사 창립 2년 만에 미국의 거대 백신업체 맥아피에서

1000만 달러에 인수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안철수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갔다.

보통 재벌그룹 회장 정도가 되면 직접 발표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당시 인수에 의욕을 가졌던

맥아피 회장은 안철수 앞에서 직접 발표를 하며 인수를 제안했으나 단번에 거절했다. 그러자 회장은 이전에

자신에게 회사를 매각했던 일본인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시켜줬다.


일본 대표는 “당시 회사가 적자나서 힘들었으나 많은 돈을 받고 회사를 팔고난 후 걱정도 없이

잘 지낸다”라며안철수에게 회사를 팔라고 설득했으나 안철수는 끝내 거절했다.

당시 맥아피는 전세계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안철수연구소 때문에 한국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인수한 후 안철수연구소를 폐기하고 미국 백신으로 한국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서 이러한 인수를 제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철수는 회사를 매각한다면 그 후에 직원들이 해고되어 실업자가 된다는 사실을 직시했고 그런 결과를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던 것이었다. 그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감정을 소비하는 후회는 원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장 소중했던 기억

CEO를 그만두고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벤처 비즈니스 과정을 거쳐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MBA 2년 과정을 밟았다.

같은 시기에 딸도 미국에서 유학했는데 그 이유는 안철수의 부인이 나이 마흔에 ‘법’을 배우고 싶다며 의사를

그만두고 미국 로스쿨에 유학을 갔기 때문이었다.

5년을 공부한 아내는 캘리포니아 주와 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안철수도 뒤늦게 미국 MBA

석사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마치고 가족이 도서관에 모두 모여서 저녁 늦게까지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그 때가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라고 말했다.

아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어머니

부부싸움을 할 때도 존댓말로 하는 편인데 다른 사람들에게 반말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시절에도 병사들에게 반말을 하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다.

이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는데 어머니는 안철수에게 매번 존댓말로 대해주었으며 혼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안철수는 그동안 어머니의 존댓말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고등학교 1학년 때 늦잠을 자 택시타고

등교할 때 어머니가 “학교 잘 다녀오세요”라고 하자 택시기사가 “어떻게 어머니가 존댓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하는 것을 듣고 어머니의 존댓말이 평범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제자의 증언
“안 교수에게 기술경영 수업을 들었는데, 나는 A플러스를 자신했다. 그런데 B마이너스를 받았다.

연구실로 찾아가 항의했더니 아무 말 없이 컴퓨터 모니터를 보여 줬다. 거기에는 모든 수강생들의 발표 횟수,

출석 일수, 수업 태도, 과제 완성도, 시험 성적 등이 빼꼭하게 적혀 있었다.

한 번은 새벽 3시에 교내 횡단보도 앞에서 안 교수가 혼자 서 있더라.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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