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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먼지가 묻었다
게시물ID : panic_858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솔잎사이다
추천 : 13
조회수 : 2306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6/01/24 01: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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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자네, 먼지가 묻었군."

 나는 말 없이 옷을 털었다. 노인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내 업무 수첩을 읽기 시작했다. 읽는 중간중간 펜으로 수첩을 긋는다. 지금은 밑줄을 그어 주고 있군.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한 선이지. 손이 한 군데 멈춰서 움직인다. 이건 우아한 싸인을 해주는 것이다.

 노인은 수첩에 종이를 끼워 내게 주었다.   

 "이제 시작하게. 현장에 5분 늦게 도착하는 거 잊지 말고."

 "예."

 그러고선 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내게 눈길을 더 주지 않고 무언가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번화가로 나왔다. 쪽지에 적힌 숫자는 1044. 장소는 카페 앞 신호등. 지금이 10시 37분이니까, 좀 빨리 온 셈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약속 장소에서 떨어져 있다가, 5분 지나서 도착해 일을 하면 된다. 이번엔 5분 동안 다른 곳을 향해 걷다가, 다시 5분 동안 돌아오면 될 것이다. 왜 약속 장소에 5분 늦게 도착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시 사항이니 만큼, 지킬 필요가 있겠다.

 49분이 되었을 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거기엔 젊은 남자가 쓰려져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당황과 걱정으로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누구는 전화로 구급차를 부르고, 누구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를 당장이라도 업고 병원으로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나는 신호등 옆에 놓인 자루를 집었다. 내용물을 부어야 하는 위치는 신호등에서 남쪽으로 12센티미터. 나는 조금 망설이다, 내용물을 그곳에 부었다.

 자루에서 쏟아져 나온 새까맣고 작은 거미들이 남자의 온몸을 뒤덮었다. 

 "꺄아아아아악!"

 그는 거미가 코와 입에 들어갈 때까지 비명을 질렀다. 거미들이 얼굴 전부를 덮었을 땐, 그는 조금의 경련도 없었다.

 나는 자루를 잘 개어, 있던 자리에 두고 떠났다.

 사무실엔 여전히 노인이 무언가 자신의 업무 수첩에 적고 있었다. 

 "자네, 먼지가 묻었군."

 나는 말 없이 옷을 털었다.

 노인은 내 업무 수첩에 싸인을 해주고 종이를 넣어 내게 주었다. 그리고 쓰던 것을 마저 쓰기 시작했다.

 "시작하게. 이번엔 현장에 5분 빨리 도착하는 거 잊지 말고."

 "예."

 쪽지에 적힌 시간은 1322. 나는 근처 편의점에서 사탕을 하나 샀다. 얼굴이 있는 경찰차 모양 플라스틱 장난감에 잘 포장된 사탕이었다. 이번 일은 아까 것만큼이나 간단했다. 이 사탕을 5분 빨리 도착해 횡단보도에 두면 된다. 시계를 보니,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들른 김에 출출하기도 해서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먹었다. 따뜻한 국물이 마음까지 데워주는 듯 하다.

 나는 먹다가 그만 웃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전의 일이나 이 일이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은 똑같은데, 왜 나는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웃고 말았다. 생각난 김에 소시지를 하나 사먹었다. 매번 편의점에 오게 될 때마다 먹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먹지 못했던 건데,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먹겠는가. 이 소시지는 참 재밌는 장난이 가능하다. 나는 입술로 소세지의 껍질을 문질러 뽀득뽀득 소리나게 하며 놀았다. 이건 이 소시지로만 가능한 장난이다. 점원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 이런 소소한 재미를 위해서 사는 것 아니겠어?

 한동안 그렇게 놀면서 먹다가 시계를 봤다. 1시 21분. 나는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약속 장소 앞에서 먹었기에 망정이지, 완전히 늦을 뻔했다. 

 차가 바쁘게 달리는 도로 한 가운데에 가서 사탕을 놓았다. 이걸로 일은 끝났다.

 사무실로 가기 위해 돌아섰는데, 말 소리가 들린다.

 "엄마! 저기! 저기! 내 사탕 저깄어!"

 남자 아이가 내가 둔 사탕을 향해 손가락을 뻗어 외치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그대로 사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안 돼!"

 내가 가기도 전에 아이는 승용차에 치였다. 치인 아이의 몸은 붕 떠서 교차로 한 가운데로 떨어졌다. 그리고.

 덤프트럭이 아이의 머리를 밟고 말았다. 나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고 말았다. 교차로의 모든 차가 멈춰섰다. 트럭 운전수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기절해버렸고, 승용차 주인은 차 안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멍하게 있었다. 

 아이의 엄마가 아주 느릿하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아이의 앞에 섰다. 아이의 엄마에게, 눈물은 없었다. 눈물은 그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처럼, 울지 않았다.  

 아이의 엄마는 떨리는 손으로 짓이겨진 뇌를 쪼개진 아이의 머릿속에 한 줌씩 천천히, 소중하게 담았다. 

 나는 눈물이 내 뺨을 흐르는 것을 내버려둔 채, 노인에게 향했다.

 노인은 아무 것도 쓰고 있지 않았다. 노인은 나를 보더니 한 마디 했다. 

 "자네, 먼지가 묻었군." 

 나는 바로 노인의 따귀를 올려 붙였다. 계속 때렸다. 노인의 고개가 여러번 뒤틀렸다. 노인은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내가 멈출 때까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수첩을 건네주는 대신 물었다. 

 "왜 내게 이런 일을 시킨 겁니까?"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서 수첩을 달라는 듯 조용히 손만 내밀고 있을 뿐.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반응이었다. 다시 때려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수첩을 책상에 내리치듯 던졌다. 노인은 조용히 수첩을 들어 싸인을 하고 종이를 넣어 내게 주었다.

 "시작하게. 이번에도 정시에 가보게."

 나는 대답 대신 문을 탕 소리 나게 닫고 나갔다.

 시간은 2048. 약속 장소는 가정집이었다. 이번엔 정시에 바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기 전부터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안엔 부부로 보이는 노인 둘이 가슴과 목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호흡도 없었다. 아이의 울음 소리는 화장실에서 났다. 그리고 화장실 문 앞엔 중년의 남성이 피가 마르지 않은 칼을 든 채, 화장실을 걷어 차고 있었다. 

 이번 일은 거실 천장을 있는 힘을 다해 치는 것이었다. 나는 현관에 있던 야구 방망이를 집었다. 나는 그 남자의 머리를 치고 싶었다.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천장을 힘껏 쳤다.

 그러자 에어컨이 넘어지며 중년의 남자를 덮쳤다. 남자가 들고 있던 칼이 그대로 남자의 목을 꿰뚫었다. 피가 울컥울컥 나왔다.

 남자는 칼을 뽑으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 없었다. 나는 방망이를 제자리에 두고 다시 사무실로 갔다.

 노인은 서류를 파일철에 잘 정리하고 있었다. 업무 수첩을 주자 말 없이 읽었다. 

 "자네, 먼지가 묻었군."

 나는 말 없이 옷을 털었다. 

 "이번엔 털어낼 줄 알았는데."

 순간 놀라 노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노인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늘 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이번엔 종이를 두 장 넣었다.

 "시작하게. 현장에 5분 늦게 도착하는 거 잊지 말고."

 "……예."

 수첩을 받아들자 노인은 다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무실 밖에서 수첩을 열어 쪽지를 확인했다. 하나는 그저 업무가 적힌 쪽지였고, 나머지 하나는…….

 글씨가 시선에 닿는 것과 동시에, 나는 그 쪽지를 버리고 말았다. 내 몸을 내 손으로 쥐어 뜯고, 찢어버리고픈 충동이 일었다. 

 그 충동은 옷을 찢는 것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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