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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천 마리의 귀신을 베어 넘긴 자
게시물ID : readers_144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도서관의밤
추천 : 1
조회수 : 23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8/10 09:36:39


  호흡이 거칠어 지는 것이 폐가 쿡쿡 찔리듯 아파오는 것으로 분명하게 느껴졌다. 검을 잡고 있는 손가락 마디마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이 저려왔다. 손목의 떨림은 멈추려고 온 힘을 다 쏟지만, 미세한 떨림 마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시야를 가리는 땀방울은 눈을 따끔하게 만들었지만 난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이 상황에서 허락 되지 않았다.
  단 일격에 끝날 수도 있고, 어쩌면 좀 더 많은 합이 오가야 할 것이다. 난 천 의 귀신을 죽였다는 뜻의 '천귀살' 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그러한 유희를 즐겨왔다. 분명 한때는 이러한 유희가 즐거웠던 적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즐겨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어쩌면 그러한 유희를 끝내야 하는 상황이 일어 날 수도 있다. 몸이 버티지 못한다. 

"허─ 천귀살. 이거 왜 이리 늦어 지는 것이오? 다음 수를 두셔야 장기가 진행 되지 않소?"
"그 잘난 세치 혀를 언제까지 놀릴 수 있게 해줄까 생각하고 있었지."
"호오. 그럼 제 혀는 언제 즈음 멈추는 것이오?"

  난 굳이 대답하지 않고 바로 검을 바짝 끌어 올려 녀석의 어깨를 노렸다. 곧바로 녀석은 한 손에 쥔 검을 가로로 비틀어 나의 공격을 막은 뒤 바로 나의 검을 쳐내어 검의 끝 날로 내 심장을 날카롭게 노렸다. 몇 번의 합이 계속 이어지고, 녀석과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슬슬 끝낼 때가 되지 않았소. 그대는 너무 많은 악행을 저질렀소."
"악행이라. '살(殺)'이라는 것이 무조건 악행인가? 그렇다면 도축을 하는 나와 같은 천민 나부랭이 들 역시 악행이고, 나라의 명을 받아 사람을 벌하는 집행관 역시 악행인가?"
"그대는 죄가 없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였소. 천민들이 도축을 하는 것은 살기 위함이고, 집행관이 나라의 명을 받드는 것 역시 하늘의 일을 대신 행하는 자들이오. 하지만 그대는 무엇이오? 살기 위해 누군 가를 죽인 것이었소? 아니면 나라의, 하늘의 명을 받들어 이러한 결과들을 행하고 있는 것이오?"

  화가 났다. 무엇이 나를 그리 화나게 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지만 판단이 흔들리는 것을 꾹 참고 참았다. 저 잘난 혀는 분명 나를 도발하기 위함이고, 나랏일을 하는 무관이란 녀석들은 하나같이 언제나 정의라는 것을 가슴 속에 새긴 채, 나라의 명을 천명으로 받들고 움직인다. 녀석과 나는 그 판단 기준이 다를 뿐이다. 녀석은 국가. 나는 나. 그게 전부이다. 
   나도 물론 잘 알고 있다. 살(殺)이라는 것 자체가 그 어떠한 체제에서도 동정 받지 못하고, 구원 받지 못하여, 정당화 되지 못한 다는 것을. 하지만 신념이 없으면 검을 휘두를 수 없다. 상대의 피를 흘리게 할 수 없다. 무념무상으로 검을 휘두르지는 않는다. 나에게도 신념이 있다. 천민 출신의 하찮은 생이라 할지언정 그것에 사상이 담겨져 있지 아니 할 리가 없다. 

"그래! 살기 위해…… 난 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수 많은 탐관오리들을 베어 넘겼고, 나의 판단 하에 수 많은 악행을 척결하기 위하여 그 악행의 피를 몸에 칠했다. 그것을 막는 자들은 모두 베어 넘겼고, 아무도 날 막지는 못했다. 난 이러한 것을 유희로 즐기며, 하층민들이 나를 '천귀살' 이라 칭하는 것 역시 나의 유희 중 하나 이다."
"…."
"네 녀석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우리가 손가락이 모자란 것 이냐, 발이 없는 것이냐. 눈 알이 하나 찌그러져 있는 것이냐. 아니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악취가 풍겼던 것이냐. 우리들을 이렇게 몰아 세우는 것도 네 녀석들이 말하는 천명 이라는 것 이더냐! 그렇다면 네 녀석과 나는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녀석은 나의 말을 듣고 자신의 수염을 가다듬었다. 쓰고 있는 모자를 단정하게 고쳐 썼고, 피칠갑이 되어 있지만, 자신의 정복을 말끔하게 가다듬었다. 검을 허리춤에 있는 검집에 꽂아 넣고는 목을 정갈하게 가다듬고 녀석은 입을 열었다.

"그리 쉽게 당신을 볼 것이 아니었구려. 소개가 아주 늦었소. 천명을 받들어 움직이는 저는 금위영의 금장 장성달이라 하오. 곧 그대를 베어 넘길 사람이오. 그대의 뜻에 경외심을 뜻하오."

  그리고 녀석은 고개를 숙였다. 하찮은 천민에게 고개를 숙인 무관이다. 그렇다고 이 장성달이라 하는 무관이 이 나라 안에 있는 모든 녀석들과 동일 시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대는 어째서 그대가 '귀신'을 죽인 자라 불리는지 아시오? 당신은 죽은 자를 어떻게 다시 죽인 것이오. 그대가 천 마리의 귀신을 벤 것이 맞소?"
"그 귀신 만도 못한 놈들은 내가 모두 벤 것이 맞지. 보이나 내 모습이? 그야 말로 귀신이다. 귀신이 아니면 귀신을 벨 수 없지."
"그렇다면 당신이 이제 죽는 이유를 말해 주겠소. 당신은…."

  그리고 장성달의 검이 쾌속으로 다가왔다. 난 가볍게 그 검을 막아내고 다시 검을 마주했다. 검을 마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진심을 알 수는 없다. 그거 합과 합이 오가는 순간 일 뿐이다. 이유는 모두 가슴 안에 품고 있고, 그 검날이 그 심장을 멈추게 하는 순간 자신의 이유가 성립 될 뿐이다. 
  나 역시 이유가 있고, 장성달 역시 이유가 있다. 서로 그 이유는 맞지 않는다. 그렇기에 검을 마주하는 것이다.
  순간 빈틈이 보였다. 난 그 곳으로 힘껏 검을 내리 찍듯 휘둘렀다. 피가 뿜어져 나왔고, 장성달은 팔뚝을 부여 잡은 채 다시 검을 휘둘렀다. 아무렇지도 않은 녀석의 행태에 당황 했던 걸까 나 역시 어깨가 반 즈음 녀석에게 베어져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아무래도 마지막 합이 될 것 같소."
"그렇군."
"당신이 죽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이 유희로 치부 될 뿐이라는 것이오. 신념은 있지만 정의는 없고, 사상은 뚜렷하지만 그 본질은 퇴색 되어 그 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져 버린 것이오. 그런 것이 이 곳에서 정의 될 수 없다는 것도 당신은 잘 알 것이오."
"짐을 떠 맡으라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들지 않는 짐을 내가 들었을 뿐이다. 네 녀석에게 나는 한낱 살인마에 불과하겠지만, 누구에겐 나의 검이 신념이 되었을 것이고, 또 누구에겐 나의 결단이 사상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죽어서 이 한양 중앙에 나의 목이 걸린다 할지언정, 또 다른 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장담은 못할 것이다."

  장성달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녀석의 팔뚝과, 나의 어깨에 피가 뚝뚝 떨어져 흘렀지만 어쩐지 고통이라는 감각마저 잊어 버린 듯 장성달과 나의 눈은 분명 날카롭게 각자의 검과, 호흡, 주변에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 만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앞으로 내달렸다. 단 일격. 이 일격이면 모든 것이 끝 날 것이다. 나의 신념이 관철 되지 못 할 수도 있고, 장성달이 말한 천명이라는 정의가 정당화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난 모든 천민들의 대표는 아니지만 그들의 고통과 억울함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려고 했다. 천민의 말은 절대로 하늘에 닿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빌어먹을 토지에서 시작하여 거슬러 올라가지도 않는다.
  검을 잡기 위해 국가로 귀속된다 할지라도 그 것은 하늘에 닿은 것이 아닌 하늘과 땅 사이에서 혼란 만을 증식 시킬 뿐, 그것이 하늘로 올라가는 길은 절대 아니다. 우리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하늘이 아닌 땅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태어난 자들은 땅에서 태어난 자들을 고통으로 비명마저 지워질 정도로 괴롭힌다. 그야 말로 귀신이 따로 없다. 
  그래서 난 검을 휘둘렀다. 하늘의 뜻이라고 말하며 천명을 자처하는 귀신들의 목을 베었고, 심장을 꿰뚫으며, 그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 시키게 하며, 그 피냄새를 상갓집의 향으로 만들어주었다. 
  눈앞의 움직임들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내 검 끝을 장성달의 심장에 도달하게 할 수 있으리라. 달빛은 까만 하늘을 전부 가득 메울 듯이 크고 밝았다. 그 빛은 내 검과 장성달의 검이 고스란히 머금었다. 찰나의 순간. 끝은 날 것이다.
  난 천 마리의 귀신을 베어 죽인 자. 천귀살이다. 손의 감각은 살을 꿰뚫는 감각이 확실했다. 그리고 나의 어깨에 역시 살을 꿰뚫는 고통이 이어졌다. 하지만 어쩌면 마지막으로 죽인 자는 귀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희는 멈추지 않는다. 난 언제 행했던 신념들을 행하여 모든 것을 대변 할 뿐이다.
  난 나의 어깨가 검으로 뜨겁게 달구어진 듯 뜨거워져 그 열기가 심장에 달하려는 순간까지 손의 감각을 잊지 않고 더욱 더 깊숙하게 심장으로 집어 넣을 뿐이다. 마치 그곳이 이 검이 원래 있어야 할 칼집 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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