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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동화 3 – 이것은 망각에 대한 기록이었다.
게시물ID : readers_86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헤르타뮐러
추천 : 0
조회수 : 27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8/13 00:26:23
잔혹한 동화 3 이것은 망각에 대한 기록이었다.
 
   이것은 망각에 대한 기록이었다. 나는 아주 사소한 일로 사고를 당했다. 뺑소니. 그래 겨우 단어를 생각해 내 종이 위에 적는다. 나는 뺑소니를 했다. 아니 당했다가 맞는 표현인가. 언어는 이미 무참할 정도로 훼손되었다. 종이 위에 섰던 단어들의 의미를 망각해 버렸다. 기억이 되돌아오려면 단어를 잊는 순간 의미가 되살아났다. 마치 등가교환이었다. 등가교환. 종이 위에 쓰자마자 단어의 의미를 추측해야만 했다. 그것을 망각했다. 다시 그 옆에 적었다.
앞에 있는 경찰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빠르게 단어를 적었다. 몇 개의 단어가 조합 되지는 않았다. 경찰은 갑자기 내 종이를 낚아챘다. 경찰은 한숨을 내쉬면서 노트북에 내가 적었던 것을 기록했다. 나는 내가 종이에 섰던 단어들이 다시 백지처럼 사라졌다. 이번에는 의미뿐만 아니라 단어 아니 문장 전체가 지워져 버렸다.
   나에게는 가족이 있는 것 같았다. 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아이가 나에게 달려오고 있다. 딸인 것 같았다. 여자아이 뒤에서 울먹이는 여자는 아내인가. 기억을 되짚을수록 또 다른 것들이 자꾸만 잊혀졌다. 예를 들면 월드컵이나 나의 취미에 대한 것이었다. 아내라고 말하는 여자는 나에게 축구를 보러 왜 나가서 라고 화를 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축구였군. 나는 다행히 취미에 대해 기억이 났다. 하지만 머리를 묶은 아이가 왜 이곳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망각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 경찰에 말에 따르면 나는 살인범이었다. 그것도 오랫동안 잡히지 않던 연쇄살인범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경찰은 살인범이 남긴 지문이 일치한다고 답했다. 지문. 그것의 단어와 의미를 적합하게 찾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와중에도 아내라 추측되는 여자는 경찰의 멱살을 잡았다. 경찰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여자는 남편이 어떻게 살인마냐며 소리를 지르고, 아이는 시끄럽게 울었다. 경찰들 전체가 나서서 여자를 말렸다. 나는 그동안 지문의 의미를 생각했다. 결국 종이 위에 지문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리고 옆에 선을 긋고 이렇게 썼다. 살인마를 찾는 수사 도구.
 
   이것은 망각에 대한 기록이었다. 기록이라는 것이 남겨져 있으면 인간은 망각을 쉽게 하기 마련이다. 그 기록에 안주함에 따름이었다. 나 또한 기록에 안주함에 따라 단어와 뜻이 연관되지 않았다. 단어들이 종이 위에 적히다 보면 그 단어가 망각 되고 오로지 남는 것은 의미였다. 그래서인지 망각이 더 자주 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내로 추측되는 여자는 지쳐서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소녀는 여자의 무릎에 누워 자고 있었다. 한 차례 소란이 가시자 경찰은 다시 내 앞에 앉았다. 노트북에 적혀진 기록들을 불렀다. 나의 이름, 나이, 연락처 등등. 이것을 불러줘도 나는 기억할 리가 없었다. 차라리 그 예전에 나를 보여준다면 기억 할지도 모르겠다. 경찰은 짜증을 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연필을 잡았다. 지문이라고 쓴 단어 밑에 아까 불러준 이름과 나이를 적었다.
   이것은 망각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래서 다행히 살인의 기억도, 증거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경찰은 무조건 나를 유치장애 집어넣을 수도 없었다. 아내라 추측되는 여자는 아이를 등에 업었다. 나는 경찰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 했다. 여자는 내 손을 잡았다. 집에 가려는 모양이었다. 집이 어디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파출소 인 것을 감안하면 집이 이쯤이라 생각했다.
   다행히 집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내라 추측되는 여자는 들어가자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나는 식탁에 앉았다. 여자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진열장 안에 있는 컵을 꺼냈다. 뼈가 마디 사이마다 드러난 손가락이 눈에 보였다. 나는 손가락을 잡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 안쪽에는 중국식 식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행히 망각은 본능에까지 퍼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망각에 대한 기록을 위해 식탁 위에 종이를 올려놓았다.   
  나는 오늘 아내라 추측되는 여자를 죽인다. 죽인다?, 죽였다? 나는 잠시 언어적 차이에 멈칫거렸다. 하지만 죽인다위에 두 줄을 긋고 죽였다로 고쳤다. 나는 중국식 식칼을 들고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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