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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1.통일신라와 발해(ver 0.1)
게시물ID : history_176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량수
추천 : 12
조회수 : 2896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8/12 00:26:06

6세기에 엄청난 성장을 하고 7세기에 신라는 당이라는 거대한 중국대륙의 국가의 힘을 빌어 한반도에 있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킵니다. 신라는 당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한반도 전역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은 그럴 생각이 없었지요. 애초에 어떤 약속을 했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한반도에 대한 완전한 통치를 원했으니까요.


이에 대한 근거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는 백제 땅에 다섯개의 도독부를 설치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 웅진도독부 하나만 남기지만 도독부의 설치는 백제 땅을 당의 영토라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면서 당나라는 1만명의 군사를 사비성에 배치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라는 당나라의 손을 계속 잡았습니다. 당장 북쪽에 있는 거대한 고구려가 신라에게 더 위협이 된다고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663년인 문무왕이 즉위하고 3년이 지난 시점에 당나라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편입시키고, 신라 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합니다. 거기에다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륭을 백제땅의 관리인 웅진도독으로 임명합니다. 실제 통치는 신라왕이 하지만 명목상으로 신라는 당나라의 한 지방으로 편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665년에는 웅진도독이 된 부여융과 신라의 문무왕을 당나라가 불러 강제로 친하게 지내도록 만듭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라는 당과의 손을 놓지 못하지요. 참고로 문무왕은 앞선 이야기에서 고구려와 당을 오가며 고생하던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입니다. 김춘추는 신라와 당의 동맹을 이끌어낸 사람이기도 하지요. 


668년,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불거진 내부 분열 때문에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멸망한 고구려 땅에 당은 아홉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만들어 둡니다. 도호부가 도독부 보다 조금 더 큰 관청으로 생각하면 편할 듯 합니다. 사실상 한반도 전역을 당나라가 접수했다고 선포하고 한반도의 관리 관청이 안동도호부인 셈이지요. 신라를 당나라의 지방취급한데 이어 고구려까지 직접 당나라가 관리하겠다고 하니 신라도 더 이상 뒤를 볼 필요가 없었다고 판단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구려의 멸망 후 곧 바로 당을 향한 항쟁을 시작합니다.


신라는 우선 백제 옛땅을 가져오려고 고구려 보장왕의 서자 안승의 귀순을 받아들이고 금마저(지금의 익산)에 머무르게 합니다. 670년에는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삼아 고구려 부흥군의 구심점으로 만들어 줍니다. 신라가 유민들의 힘을 이용하겠다는 의도였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면서 부여륭과 당나라 군이 있던 과거 백제의 82개의 성을 빼앗고, 671년에 마지막으로 사비성을 함락시키면서 백제의 옛땅을 모두 신라가 가져와 통치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당은 유명한 여황제 측천무후가 당의 실권을 잡아가던 시기였습니다. 크게 혼란스럽다고 할 수는 없었던 당이기에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지는 않았겠지요. 당은 672년에 고간을 보내 한반도를 침략합니다. 신라는 이를 물리쳐냈고, 675년에 당나라가 보낸 설인귀의 침공까지 막아냅니다. 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수군을 금강하류인 기벌포에서 격파해 당나라가 한반도로 침입할 기세를 꺽어버립니다. 결국 당은 676년에 평양에 설치해 한반도 전역을 통치하려 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요양)으로 옮기면서 한반도로부터 사실상 발을 빼게 됩니다.



신라가 당와 이렇게 싸우는 사이 만주 지방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이 대조영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대조영은 영주(조양)에 건너가 살고 있었는데, 거란인 이진충이 영주를 점령하고 당에 반기를 드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죠. 이에 대조영도 698년에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동모산(길림성 돈화)에 나라를 세우고 진국이라 선언합니다. 이것이 발해의 시초가 되는 국가의 건국 이지요.


이후 발해는 중국대륙 북쪽에 있던 돌궐족과 연계해 당을 견제하면서 성장해갑니다. 발해의 대부분은 만주지방에 살던 말갈족이었습니다. 원래 고구려의 통치를 받았었는데, 발해가 세워지면서 이들도 발해에 예속되게 되었습니다. 발해와 신라와의 처음 관계는 크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발해가 건국되고 얼마 되지 않은 700년에 대조영이 신라에 사신을 보냈고,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5품인 대아찬의 관등을 주면서 괜찮은 관계로 시작합니다.


당의 요청으로 신라군이 발해의 남쪽 경계를 공격하다 실패한 일이 있기도 했지만, 790년과 812년에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지속적으로 교섭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 흔적으로 신라의 국경도시인 천정군에서 발해의 동경인 용원부까지 39개의 역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것도 그 근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다고 해도 마냥 친하게 지낼 수 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발해 멸망기에는 신라와 군사를 보내 도와줄 정도로 가까워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라와 발해는 대립적인 관계를 보였던것으로 추측됩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 서로 만나면 좀 더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다투거나, 당나라의 과거제 같은 빈공과에 합격한 유학생의 석차가 발해보다 혹은 신라보다 낮다고 사신으로 온 유학생의 아버지가 당나라에 항의하기도 했으니 말이지요. 



이상은 개략적인 통일신라의 형성과 발해의 건국 이야기입니다. 이후는 신라와 발해의 사회 모습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사실상 무열왕 이후 왕이 되었던 무열왕 계열 왕들이 통치했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기도 합니다. 발해는 자료가 많지 않아서 크게 할 이야기가 없어서 상대적으로 양이 많이 적습니다. ㅜㅜ 여기서부터는 시간 순서대로가 아니라 설명하는 사회의 모습 순이라고 보셔야 되니 시간적인 흐름 때문에 헷갈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신라는 통일이후 무열왕계의 혈통이 강력한 왕권으로 나라를 통치하게 됩니다. 무열왕은 김유신의 도움으로 상대등이었던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고, 또 다른 상대등이었던 알천을 눌러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강력한 라이벌들을 실력으로 누른셈이지요. 게다가 무열왕의 손자인 신문왕은 장인이었던 김흠돌의 모역사건을 진압하면서 수 많은 귀족을 죽이는 과정을 통해 그 무서운 힘을 보여주었지요.


후대의 왕인 성덕왕과 경덕왕 때 무열왕계열의 왕들의 위세를 보여주는 유물이 있는데요. 그건 경덕왕이 아버지였던 성덕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한 것입니다. 흔히 에밀레종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종이지요. 이러면서 정부 조직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치고 대규모 사찰이었던 불국사와 석굴암도 만드는 것도 이 때입니다. 아쉽게도 당시의 불국사는 임진왜란때 목조건물들이 모두 불타 없어져서 석조물과 기단만이 남아있습니다. 거대한 종과 대규모의 사찰 등은 그만큼 왕권이 강했고, 국가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삼국을 통일하다보니 신라는 관리해야 할 영토와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게 됩니다. 기존에 고대국가로 들어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행정기구인 집사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었지만 일이 늘어났지요. 그래서 667년에 석리방부와 686년에 별작부 등을 설치하고, 기존 정부 조직의 관원도 늘렸습니다.


829년에는 집사부의 일이 늘어난만큼 집사부를 집사성이란 이름으로 승격시키고, 집사부를 총괄하던 중시도 시중이란 이름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는데요. 문제는 기존에 있던 귀족제와의 충돌이었습니다. 왕권이 강해져 귀족보다 행정관리들을 많이 뽑고 써서 많이 활용했지만 그래도 귀족에 의해서 많은 것이 결정되고 운영되던 신라였기에 당나라에서 쓰던 관료적인 체제를 들여왔음에도 효율적인 활용을 못하고 한계에 부딪치고 맙니다. 이렇게 정리되지 못한 귀족들이 후대에 강해져 신라의 멸망을 불러오게 됩니다.



한편 지방 조직도 바뀌게 됩니다. 685년인 신문왕 5년에 9주 5소경으로 지방의 관리 조직의 수를 늘리게 됩니다. 주라는 단위는 지금의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같은 지역과 비슷하구요. 소경은 작은 중심 도시란 뜻인데, 곳곳에 서울 같은 지방 도시들을 만들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수도에서 해야 될 일을 지역마다 소경이 맡아서처리 했던 것이지요. 소 경에 부여된 중요한 역할이 있었는데요. 그건 지방 세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정복한 국가의 귀족들을 소경에 강제이주시켜서 살게 하고, 이들을 감시하기 위한 중앙의 귀족이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수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통일 전에는 주를 관리하던 사람을 군주라고 불렀습니다. 왜냐면 군사적인 역할이 우선 되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군주의 군(軍)자는 군사를 뜻하는 한자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를 661년인 문무왕 1년에 총관으로 바꾸고, 785년에 도독으로 바꾸게 됩니다. 당나라의 형식을 모방한 것도 있지만 군사적인 업무가 우선순위에서 많이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전쟁보다 평화적인 시기에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았다는 뜻도 됩니다.


주가 가장 큰 지방 단위라면, 그 아래에 군과 현이 있었습니다. 통일 전에는 군과 촌(성)을 개편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국에 군은 120군, 현은 305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군은 군태수가 있었고 현은 현령이 파견되어 통치했다고 합니다. 한편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외사정이란 기관도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네요.


주, 군, 현 밑에는 일반적으로 촌이라 불리는 행정구역이 있었는데요. 보통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촌 혹은 마을 몇개가 합쳐저 지역 유지에게 촌주를 맡겨 자치적으로 관리하도록 했답니다. 자치라고 해도 현령의 통제를 받았겠지요. ^^;;



정부조직 뿐만 아니라 군사조직도 통일 이후 많이 바뀌게 됩니다. 앞서 말한대로 왕권이 강해진만큼 군대도 왕을 위한 군대에 초점이 맞춰져 재편성 되는데요. 그 방안은 바로 중앙군의 강화였습니다. 중앙군은 전쟁이 일어나면 왕이 동원하는 군대로 지방에 상주하는 군대와의 성격이 조금 다른데요. 원래 중앙군으로 분류되던 대당은 6정으로 불리던 군 조직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통일이후 대당의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된 것이지요.


이후 중앙군은 9서당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서당이란 모병을 통해 조직된 군대를 말하구요. 이는 통일 전부터 존재했었지만 9서당으로 완성 된 것은 신문왕때라고 합니다. 이 9서당에는 고구려, 백제, 말갈 등의 피정복민들까지 편성이 되었고, 금(옷깃)의 색으로 부대 사람들을 구분했다고 합니다.


한편 지방군은 기존 중앙군 포함 6정이던 것을 10정으로 확장시켰다고 해요. 보통 9주에 하나씩 주둔해 이었고, 국방상 중요한 한주(漢州)에만 2정을 두었다고 합니다.



군조직뿐만 아니라 토 지제도 또한 왕권 강화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토지는 국가의 부가 축적 되는 가장 기본적인 생산 단위(?)기 때문인데요. 이 토지를 어떻게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에 따라서 정부의 힘 혹은 귀족의 힘이 결정되는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통일전쟁으로 많은 전쟁노비와 식읍이 생기자 이 혜택은 귀족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거기다가 귀족들은 관직에 따라 녹읍을 받았는데, 토지에서 나오는 조세뿐 아니라 백성들의 부역까지도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지요. 


하지만 왕권이 점차 강해지자 무열왕계의 왕들은 귀족들의 경제력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을 펼칩니다. 687년 신문왕은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주게 됩니다. 땅 관리를 국가가 하고 거기서 나오는 세금을 월급으로 받는 형식이지요. 그러면서 689년에는 녹읍을 폐지하죠. 녹읍은 앞서 이야기 한대로 세금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마음대로 데려다 쓸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제한하고 세조를 차이를 두어 지급했는데요. 녹음의 폐지와 관료전 및 세조의 지급은 중앙정부가 귀족들의 직접적인 백성지배를 막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왜냐면 백성이 왕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사실상 귀족들이 해당 토지의 왕이나 마찬가지니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이를 제한 할 수 밖에 없었지요.


왕권이 강할 때는 귀족들이 어쩔 수 없이 따르다가 왕권이 약해진 757년인 경덕왕 16년에는 강력하게 반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녹읍을 부활시키고 관료전과 세조를 폐지시켜버립니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 후기의 귀족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사치스런 향락생활을 누릴 수 있었죠.



통일신라시대에 유학이 발달한 것은 독서삼품과라는 관리 채용시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682년인 신문왕 2년에 국학을 설치하고 유교경전을 가르쳤는데요. 이 곳에서의 성적에 따라 3등급로 나누어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이것을 독서삼품과라고 부르는데요. 이 제도가 생긴 이유는 골품 중심의 관리등용을 멀리하고 유학의 교양을 갖춘 인재들을 능력에 따라 등용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것도 왕권을 강화해 왕을 위한 사람들을 뽑으려는 의도였지요. 하지만 골품제가 강하게 남아있는 바람에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지고 맙니다.


그럼에도 국학은 유명한 유학자들을 배출했는데요.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강수와 설총이 있었습니다. 강수는 외교문서 작성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고 하고, 설총은 이두를 정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두는 한자의 뜻과 음을 따서 우리말을 표현한 것입니다.


무열왕 계열의 왕들의 시대가 끝난 하대시기에는 당나라로 유학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요. 당나라 관리 채용 시험인 빈공과에 합격해 관리로 임명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중 최치원은 당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귀국해 진성여왕에게 나라를 바로 잡을 시무 10여조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지요.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합천의 해인사에서 여생을 보내면 여러 저술을 남기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해상 무역도 늘어나면서 산둥반도와 양쯔강 하류에 신라인의 마을인 신라방과 신라촌, 이들에 대한 감독관청인 신라소와 여관인 신라관, 절인 신라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학자 중에는 유난히 6두품 출신들이 많았는데요. 골품이라는 신분적 제약을 학문적 능력으로 극복하려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실무적 행정능력 때문에 진골귀족들이 이들의 뒤를 봐주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결국 이 유교가 골품제를 비판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버리고 맙니다.


한편 유교가 귀족사회에서 발달했다면, 민간에까지 유행했던 것이 향가인데요. 특히 승려와 화랑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고, 종교적인 색이 짙은 작품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현재는 삼국유사에 실린 14수와 균여전에 실린 11등이 남아 있고 진성여왕때 향가를 수집해 삼대목이란 책을 만들었지만, 아쉽게도 남아있지는 않다고 하네요.



삼국시대 때 들어온 불교는 통일 신라 시대에 대중종교로써 많은 환호를 받게 됩니다. 특히 화엄종은 조화를 강조했기에 지배층과 피지배층 그리고 내부 분열을 봉합하려는 사상으로 이용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진골귀족들의 환영을 많이 받았고,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는 의상(625~702)이 있는데요. 당에 유학해 중국 화엄종의 2대 제자인 지엄에게 배워 신라에와서 신라 화엄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유명인으로는 원효(617~686)가 있는데요. 화쟁사상 또는 통불교사상으로 불리는 원효의 사상은 화엄종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실상은 어느 종파에도 구애되지 않고 모든 종파를 아우르는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원효는 이뿐만 아니라 불교의 민중화를 이끌었는데요.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기본 원칙을 제시한 바탕위에서 화합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을 위해서 정토신앙을 전도했는데요. 정토신앙이란 어려운 불교경전을 이해하지 못해도 염불만 외는 것으로도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사상이었습니다. 통일신라 이전부터 있던 것을 원효가 크게 성행토록 한 것이지요.


불교가 신라가 멸망할 때가 되면 꽤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그건 신라가 무너지는 이야기를 할 다음 번에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라가 이렇게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발해는 대조영(고왕 699~719)이 당 세력을 견제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잡았습니다. 이후 무왕(719~737)이 국력을 크게 만들었죠. 무왕때 인안이라는 연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연호라는 것은 앞선 글을 통해 여러번 설명했듯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스스로를 지역의 최고 강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다시말해 당시 중국 대륙에 있던 당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정도며 그들과 대등하다는 의미였지요. 당과는 대립관계 였지만 일본에 사신을 보내 꽤 친밀하게 지냅니다. 특히 무왕때 발해는 만주의 대부분과 연해주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왕인 문왕 때(737~794)는 당과 화해하고 당의 문물을 수입해 나라의 내부를 단단하게 다지게 됩니다.


대조영때 동모산(길림성 돈화)에서 시작된 발해는 이후 여러번 수도를 옮겼다가 이후 성왕 때(794~795)때 상경으로 옮기고 멸망할 때까지 도읍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왕때 비로소 안정적인 상황이 되었다는 말도 됩니다.


한편 가장 융성했던 것은 선왕 때(818~830)였는데요. 많은 유학생을 당으로 보내 당의 문화와 제도를 많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한 말갈족 대부분을 복속시키고 요동지방의 요하유역까지 진출해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됩니다. 북으로 흑룡강, 동으로 연해주, 서로는 요동 남으로는 영흥 지방에 이르는 거대 영토을 지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선왕 이후로는 급격히 국력이 기울어져 내부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게다가 밖으로는 거란의 압력을 받아 결국 거란의 침략으로 926년에 멸망하게 됩니다. 이후 고구려계통의 사람들은 대거 고려로 귀속하고 말갈인은 여진족이란 이름으로 남아 여러 부족들로 나뉘어져 살아가게 됩니다.


발해의 중앙 정부제도는 당의 제도인 3성 6부제를 모방해 만들었었구요. 지방제도는 5경 15부 62주의 제도로 관리했다고 합니다. 상경을 중심으로 5경으로 이어지는 교통망을 잘 정비했다고 하네요. 5경은 앞서 말한 신라의 소경과 비슷한 것입니다.


지방 단위는 크게 15부가 존재하고 그 아래 62개의 주가 있었구요. 그 아래 100여개의 현이 있었은데, 현까지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었다고해요. 하지만 현아래의 촌락은 토착 유력자인 수령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발해 백성들의 기본 생산활동은 농업이었다고 하네요. 


발해도 신라 못지 않게 유교와 불교가 융성했다고 합니다. 발해의 절터는 모두 40군데 정도 확인 되었는데요.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을 비롯한 등 5경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어 지배자를 중심으로 전파되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신라가 한반도에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 시킨 후와 발해에 대한 이야기와 사회상을 간략(?)하게 알아봤습니다. ㅡㅡ;; 나름 줄인다고 줄였는데 양이 엄청나네요. 보통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신라의 멸망까지 4장쯤으로 구성되는 내용입니다.



참고로 한 책은


2010년 검정을 통과한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10년 검정을 통과한 비상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02년 제작된 고등학교 국사

1996년 제작된 한국사통론 4판

2004년 제작된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이렇게 입니다.



다음은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후삼국이 생기게 되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충 쓰겠다고 마음 먹고 시작했는데, 하면 할수록 자꾸 이것 저것 신경쓰여서 자꾸 못쓰게 되네요. ㅜㅜ 일단 대충이라도 쭉쭉 써보고 부족한 것은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 것인데 말이죠. ^^;; 



여하튼 부족하거나 보충해야 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 있다면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

제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올리고 있습니다. 링크된 글은 위 내용과 똑같습니다.

http://myahiko.tistory.com/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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