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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노바 바베와 함께 본 인간애
게시물ID : lovestory_680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081023
추천 : 0
조회수 : 52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8/12 17:4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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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만약에 우리의 시대가 극단적으로 치달아, 문화마저 가치가 없다고 여기게 된다면 그들은 카메라를 빼앗아 갈 것이고, 붓을 빼앗아 갈 것이고, 마이크를 빼앗아 갈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국엔 끝까지 문화를 추격해야 한다면 그들은 나무를 빼앗아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빼앗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평등하게 사용하는 것이기에 그들이 문화를 강탈하고 격하시키고 소멸시키려 할지라도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언어입니다. 말은 이야기가 되고 노래가 되며 그림이 되고 영화가 됩니다. 책이란 문화의 마지막 피난처입니다. 가장 원초적인 것에 기본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그저 열린 마음으로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노바 바베







081023

 우선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다.

 사람들이 나에게 신(神)의 존재에 대해 물어 내가 답해야 한다면 나는 무신론자(無神論者)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기대하는 답에 가장 근접한 말이기 때문에. 종교라는 것 그 자체를 부정하는 담론(談論)으로써 하는 말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하는 완곡한 표현이지만 그 대답은 대부분 오해로 끝이 나기 마련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대정신(時代精神)이 각각의 사람들을 울타리로 갈라놓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역설적이게도 이 사람을 만나기 전과 후(이 사람을 만나 달라진 것은 딱 하나있다.) 모두 동일하게 신(神)의 자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형태나 관념 그리고 개인의 행동으로써 특정한 곳에서 읽혀지고 이루어지는 행위나 관습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하는 바는 아니고,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바와 같은 우주적인 관념과 비슷하다. 그것은 이성과 비이성,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고리와도 같은 개념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하나의 비유로 표현하자면 오늘날 과학이 기후에 대해 적립한 방대한 지식과는 별개로 내일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 한 가지 예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직유는 한 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데 이것은 비노바 바베의 일생과도 관련이 깊기에 지금은 우선 넘어가고 그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 자신의 종교관의 일부를 먼저 서술해야 했는가 묻는다면 필시 그 사람은 비노바 바베에 대해 모르는 이가 분명하다. 비노바 바베는 종교인으로써 태어나 종교인으로 죽었다. 그와 종교를 분리해서 단 한마디조차 말할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와 그의 종교를 화학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수소(H)와 같다. 수소는 원자 하나와 전자 하나로만 구성된 분자이다. 강제적으로 쪼개지 않는 한 이보다 근본이 되는 입자는 없다(그리고 물리적으로 쪼갠 원자와 전자들은 더 이상 수소가 아닌 것이 된다.). 그래서 나는 그‘와’ 종교를 수소와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책의 초반을 지나 중반이 넘고 기어이 종반부까지 갔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이념과 사상에 관해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살아왔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 때문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이루어진 일들로써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나는 'The Memories of Vinoba bhave. 부제 Moved by love'란 이 책을 통해서 서로 다른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조차 잊게 되었다. 내가 이 감상문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 당신이 종교인이라면 이 사람에 대해 알아야한다. 당신이 비종교인이라면 역시 이 사람에 대해 알아야한다. 당신이 불가지론자라면 또한 이 사람에 대해 알아야한다.

 이 비노바 바베는 그의 삶을 통해 종교를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의 종교적인 색채, 영적인 깨달음 그가 마지막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곳.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여정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앙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이 자가트' 나의 방식대로 풀이하자면 'Beyond everything'(모든 것을 넘어서)'의 정신이 담겨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마하트마 간디를 만났고, 그가 죽어서도 평생을 선생으로 섬기며 살았다. 그의 기나긴 여정 중 뿌리가 되는 씨앗을 간디가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폭력(非暴力). 그리고 그의 일생의 과제를 쥐어준 이 또한 간디였다.

 비노바 바베하면 부단 운동(우리말로 토지헌납운동인데 이것은 그의 말을 빌어서 이야기하자면 인도에는 평균 5명의 자식을 낳는데, 가난한 이들을 여섯 번째 자식으로 섬기라는 의미에서 지주들에게 가진 땅의 1/6을 헌납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운동으로 스코틀랜드크기의 땅을 얻어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땅에 약 1/5이 모자란 면적이다.)으로 시작해 그것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표면적인 사실을 몇 가지 더 더해야 하는데 그는 인도(우리나라의 약 33배의 크기) 전역을 13년은 걸어서, 4년 반은 기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방글라데시도 갔었고, 파키스탄도 갔었으니 그의 여정은 글로 표현하기조차 어렵다.

 그럼 의문점이 생긴다. 그가 어떤 강제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이 땅을 내놓았을까? 비폭력주의자가 남의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모순(矛盾)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그는 모순을 빼면 그가 죽기 전 깔고 있던 너절한 담요조차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지금부터 나열하는 말들 속에서 이들을 하나로 묶는 방법을 찾아보길 바란다.

 자비, 압제, 평등, 강압, 타협, 비폭력, 오만, 종교, 평화, 독재, 이성, 광기, 과학, 미신, 고집, 수학, 겸손, 반항 등등의 대칭점을 갖는 단어들.

 찾았는가? 만약 당신이 찾았다면 둘 중에 하나 혹은 둘 다이다. 당신은 비노바 바베의 삶을 이미 알고 있거나 아니면 심오한 철학자이거나. 그럼 이 감상문을 더 이상 읽을 필요조차 없다.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면 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나는 심오한 철학자가 아님에도 분명히 당신이 말한 그 방법을 찾았다고 말이다. 그럼 당신은 이미 심오한 철학자와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니체의 말을 빌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고 나서 이런 말을 남겼다.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이제 좀 감이 올 것이다. 만약 내가 쓰고 있는 감상문의 행간 속에서 강조하는 것을 간파한 이라면. 그럼 그는 비노바 바베의 일생에 관심을 갖게 됨으로 나의 역할은 끝났다.

 그럼 남은 이는 누구인가. "나는 니체도, 비노바 바베도 모른다. 당신이 말한 모순덩어리들을 묶는 방법도 모르겠다."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상관없다. 그저 조금만 더 시간을 이 글에 할애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럼 잠시 되돌아가보자. 내가 해괴한 말들을 나열하기 바로 전으로. 그것보다 조금 더 전으로 가보자. 모순이란 말을 처음 당신이 읽었을 때로.

 정직하게 자신에게 답해보길 바란다. 우선 모순이란 단어를 읽으며 혹은 스쳐지나가며 머리 속에서 어떤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는가? 모순적이란 말에서 긍정의 의미를 찾았는가?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조증이 있는 것이다. 정신과에 가는 걸 추천한다.

 만약 부정적인 느낌으로 해석되었거나 밑에 나열되어지는 단어들의 공존을 어렵게 느꼈다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마음 속 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경을 한 철학자가 지각(知覺)이라고 칭했다. 그 말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짧게 말해 생각의 환기(喚起), 혹은 뒤집기)을 통해서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기뻐하고 슬퍼하며 아파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우리가 끼고 있는 안경을 통해서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이다. 상처를 입어도 아프지 않아 할 수 있고 붉은 사과를 푸른 사과로 볼 수도 있게 된다.

 이 안경을 조금만 더 넓혀보자. 나를 바라보는 것에서 타인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약 당신이(보편적인) 집안의 가장이라면 가족들을 당연히 돌볼 것이다. 학생이라면 부모는 나의 보호자인 셈이다. 이를 가족이라 부른다.

 이번엔 조금 더 크게 바라보자. 한 쪽에선 예수를 믿기에 교회를 간다. 한 쪽에선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으로 절에 간다. 그리고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의 교리에 따라 사원으로 향한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라 부른다.

 규율, 도덕, 관습, 풍토, 가치관, 사회화의 과정. 너무나도 다양한 이름으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신의 울타리를 갖게 된다. 태어나면서 대부분 축하 속에서 이름을 갖게 되고, 죽음에도 어떤 이는 염불을 들으며, 찬송가를 들으며, 코란을 외우며 아니면 그를 사랑했던 이들의 위로를 들으며 맞이한다. 이런 것들은 좋은 것이다.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간혹 우리의 울타리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당신이(보편적이지 않은) 한 가정의 부인이다. 가장은 술에 취해 가정폭력을 휘두른다. 자식은 부모에게 당연한 듯이 요구하고 부모의 문제에선 외면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 또한 가족이라 부른다. 비행기를 하이재킹해서 대량의 인명살상을 낸다. 이익구조에 따라 전쟁을 일으켜 한 나라를 무너뜨린다. 8살 아이를 인질로 차 앞 유리에 매달고 위협한다. 더 많은 땅을 가지기 위해 수도원에 포격을 가한다. 이것도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말한다.

 같은 이름을 가졌으나 대립되는 상황을 우리는 보았다. 우리는 지성(知性)의 총아가 아닌가. 우리로 인해 일어난 문제라면 해답은 당연히 우리에게 있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길 원하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는가!

 비노바 바베는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모순적인 상황을 극복해나갔다. 그는 아주 단순한 전략을 택했다. 체험과 경험은 다르므로 그는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어서 13년을, 불가피한 상황엔 기차를 타고 4년 반을, 그는 인도 전역을 누볐다. 그의 전략은 단 하나였다. 사람.

 지반이 단단하지 않은 곳에 세운 건물들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럼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곳에 건물을 세우면 될 것이 아닌가. 그는 그것을 사람에게서 찾았다.

 그는 인도 카스트제도의 최상위층(브라만)으로 태어나 최하위층(수드라)의 삶을 살았다. 손으로 길가의 똥을 치우고 땅을 파고 실을 짜는 일로 평생을 보냈다. 그는 굉장히 셈이 빠른 사람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선 셈을 못하는 사람이다. 모두를 위한 일에는 그토록 셈이 빨랐음에도 자신을 위한 것에는 셈을 하지 않았다. 그는 무한히 관대하면서 냉혈(冷血)한 사람이었다. 어떤 일에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고 어떤 일에는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써 물러섰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위인이 다 그렇지 않았느냐고.

 물론 맞는 말이다. 많은 위인의 일대기를 알려면 시간적인 소모가 엄청날 것이다. 불필요한 노력일지도 모른다. 그 논쟁을 하기 전에 위에서 읽어온 내용을 당신이 기억하는가?

 나는 초반에 시대정신이 변했다고 말했고, 니체의 모순적인 말을 꺼냈고, 칸트의 지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럼 역순으로 다시 나의 의견을 정리해보고 싶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비노바 바베에게 있어 울타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궁극적인 목적이 울타리를 만든 사람들이기에. 그는 울타리를 부실 생각은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가 서로의 손을 내밀 여유만을 가지길 그는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그의 안경은 세계였다. 우리가 잘게 쪼개 해석하는 세계를, 마음을 나누고 서로 도와주고 진심을 다해 사랑할 때 우리는 개인, 가족, 계급, 국가를 넘어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삶을 그것을 위해 전부를 걸었다. 그의 한 번의 들숨 날숨까지도 신의 이름으로.

 구글에 비노바 바베를 검색하면 카테고리가 철학자로 나온다. 재미있는 사실이다. 마더 테레사는 교사이자 수녀로 나온다. 내 추측엔 그를 철학자로 분리한 이유는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 지반이 훌륭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부숴나갔다. 만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장애물이라면 그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다. 그가 남김없이 부시고 남은 것이 마음이었다. 그것은 종교, 피부색깔, 계급, 성별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차별도 필요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은 존재 그대로 좋다. 그 안에 선(善)이 깃들어있다면.

 그것은 니체의 사상과도 일치한다. 칸트가 성역으로 끝까지 수성(守成)한 도덕이라는 거대한 건물도 니체는 결국엔 철저히 부셔버렸다. 니체는 사람의 의지(意志)에 걸었다. 마음에 걸었다. 사람에 걸었다. 누가 자신의 책을 읽던, 읽지 않던 상관없다. '위대한 건강(어린아이에게서 어리숙함을 보는 것이 아닌 천진함을 보고 노인에게서 쇠약함이 아닌 원숙함을 보는 관점)'을 갖고 살아가면 그것이 니체가 원한 바였고 니체에게 있어(니체 자신을 모르더라도)최고의 독자였다. 니체의 철학을 간혹 문자 그대로의 허무주의(nihilism)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명백한 오독(誤讀)이다. 니체가 원한 바는 비노바 바베의 삶 그 자체였다. 바꿔 말하면 마하트마 간디를 허무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비노바 바베가 한 말이다.

 '부단 운동(토지헌납운동)의 영감을 준 사람은 간디 선생이었다. 따라서 그 운동에서 좋은 것은 무엇이든지 간디 선생의 것이며,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부족함이다.' 이것은 니체가 말한 허무주의자와 정확히 일치하는 말이다. 니체가 파괴한 종교란 건물? 그것은 그 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궁극적인 합리(合理)로 향하는 길 중 단지 잠시 머무르는 곳이 허무주의이기에. 그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지만 내가 좀 과하게 이야기하자면 그 둘은 같은 피가 흐르는 초인(超人)이라 생각한다.

 현대의 살아남은 우리들은 대부분 물리적인 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아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더 나아갈 힘을 주는 실존주의의 힘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자리를 합리주의를 넘어 아주 당연한 듯이 신자유주의(neo liberalism, 애석하게도 new liberalism이 아니다)가 차지하였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로 물리적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는 이제 정신적인 전쟁을 겪고 있다.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들고 순응하며 살아가게끔 고개를 숙인 채 살아간다. 자신의 삶에 대해선 무관심한 채로.

 극장에선 초인(超人)이 문제를 해결하는 글로벌기업의 영화가 연이어 매진이다. 그 영화들은 우리완 전혀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분쟁을 해결하는 걸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일종의 미디어를 통한 강제적 환기(喚起)다. 대중은 그런 곳에서 희열을 찾게 마련이다. 매주 주말이면 유명 오락프로그램에 열광하고 이제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소모품으로 전락한 노래들의 퍼포먼스에 빠져든다. 사견이지만 이제는 위인이 생겨날 것 같지 않다…….

 이 시대엔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같은 사람이 생길지라도 위인으로 남지 않고 저술가나 학자, 운동가란 이름으로 쏟아지는 미디어의 홍수 속에 파묻혀버려 허우적대다 사라질 것 같다. 너무도 많이 사라져간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파리에서 언급한 '수치심의 권력'도 조잡하고 편협한 토마스 맬서스 같은 인물에게 자리를 내주게 생겼다.

이제 마무리가 다가온다. 처음에 기후에 관해 언급하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려 한다. 우리(여기서 우리는 민족이 아닌 세계)는 기후에 관한 문제들을 분명히 해결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거대한 쓰나미가 오더라도 강렬한 태풍이 휩쓸고 가더라도 토네이도가 모든 것을 산산이 부서지게 만들더라도 사람이 한명도 죽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 돈의 가치가 사람의 가치를 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의학자는 소아마비 백신을 만들어냈다. TV 인터뷰에서 사회자가 그에게 물었다. "이 백신의 특허권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는 웃으며 되물었다. "글쎄요. 사람들이죠. 특허랄 게 없어요.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요?" 그러나 시대는 변해 어느 한 자동차회사에서 부품의 가치와 사람에게 주어야할 보상금을 비교해 파란이 일었었고, 미국의 아이비리그 우수졸업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무자비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월스트리트에 간다. 북반구의 극소수를 위해 남반구에선 기아가 일어나 5초에 한명씩 죽어간다. 간디가 영국으로부터 조국을 되찾았던 인도 또한 영지의 반은 농작조차 불가능한 빈민의 영토로 남았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당신의 가치는 얼마인가? 라고 묻고 싶지만 그건 정말이지 너무 가혹한 이야기다. 진실로 떳떳히 일어나 '나는 나의 가치를 잴 수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너무 적을 것 같기 때문에. 그 질문은 나에게 너무 가혹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 말을 대신하려고 비노바 바베의 독후감을 쓰게 되었다. 나는 물을 용기도 없고 자격도 없는 사람이니까.

 허나 바바(비노바 바베의 애칭)는 당신에게 그 질문을 어떤 위선도 없이 물을 수 있고 위로 해줄 수 있고 격려해 줄 수 있다. 서문에 괄호를 써가며 한 말이 하나 있다. 이 사람을 만나 달라진 것이 딱 하나있다고.

 그것은 나에게 니체가 말했던, 바바가 말했던 '그' 사람들을 믿어야겠다는 것이다. 우선 나부터 믿어보고자 한다. 오늘을 시작으로. 그 다음은, 그 다음 사람에게 넘기고, 그렇게 넘어 넘어 많은 이가 희망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한다. 사람에게 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다시금 타올라 온화함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마무리는 꼭 희망적인 말로 맺고 싶었다.

 아마도 서문에서 말한 신의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선한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 아닐까싶다. 그곳에선 니체와 비노바 바베가 장기나 체스를 두고 있을 것이다. 서로에게 농담을 하면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을 종교의 대립적 관계로 보지 않았다. 그는 과학을 사람들의 갈망을 능동적으로 변화시켜 나온 결과물이라 이야기했다. 그 갈망의 영역에 종교 그 자체가 존재할 공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도 그러하다. 무신론자이나 나에게도 종교가 생겼다. 비노바 바베를 만남으로써 생겼는데 그것은 사람이라는 이름의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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