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9월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이사장으로 된 지학순 주교는 박정희 정권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쉽사리 지학순 주교를 체포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던 1965년 원주교구가 서울대교구에서 분리되면서 천주교 원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이 된 지학순 주교는 거제포로수용소 종군신부, 부산, 청주 등에서 본당 신부로 있다가 로마 우르바노 신학교에 유학해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은 경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톨릭이라는 종교에서 주교가 차지하는 무게는 아무리 서슬퍼런 박정희 정권이라고 해도 쉽사리 손을 댈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 정권은 결국 지학순 주교를 체포하는 무리수를 둔다. 현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서는 1974년 7월 김포공항에서 지학순 주교를 체포한것. 체포 4일 뒤인 7월 10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정의의 실천은 주교들의 의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박정희 정권은 다음날인 11일 지학순 주교를 석방한다.
석방 되었지만 수녀원에 연금된 지학순 주교는 석방 2주 뒤인 7월 23일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다시 체포된다.
사형 판결 이후 20시간만에 사형집행이라는 전무후무한 사법살인이 자행된 민청학련 사건에서도 지학순 주교는 윤보선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 등과 같이 긴급조치 4호 위반 및 내란선동 혐의로 체포되고 징역 15년을 선고받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승훈 신부 등 소위 정의구현사제단 1세대 사제들이 모여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게 된다.
1974년 9월 결성된 정의구현 사제단은 같은 달 26일 제 1 시국선언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고, 알려하지 않았던 1980년 5월 30일에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을 발표한 곳이 정의구현사제단이었고, 1982년 전두환 정권의 독재를 반대하고 퇴진을 요구한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표한 곳도 정의구현 사제단이었다.
무엇보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최고의 업적이라면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명대사를 남겼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세상에 알려지게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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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1980년 3월 말기 암환자들을 위해 프로비덴시아 병원 내 경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다 극우세력에 의해서 암살당한다.
1942년 로마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로메로 주교는 엘살바도르 주교회의 사무국장, 신학개학 학장 등의 요직을 거친 소위 말해서 잘나가는 성직자였다. 로메로 주교는 전통주의자이며 보수주의자였다.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적 사목방침에 염려를 표했으며, '민중의 교회로 가자'는 주교회의 슬로건에 반대했고, 해방신학을 '증오에 가득찬 그리스도론'이라고 공박했던 사람다. 그러하기에 그가 1977년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자 민중들은 좌절했고, 군부와 지주들은 환호했다.
이러하듯 보수적층을 대표하던 로메로 대주교가 민중의 편으로 돌아선 계기는 그와 친하게 지내던 예수회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피살이었다. 지주들을 비난하고, 소작농에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던 그란데 신부가 암살당하게 되고, 로메로 주교는 그란데 신부의 추모미사에서 수백명의 아길레라스 농부들에게서 무언의 질문을 듣는다.
'당신도 그란데 신부님처럼 우리편에 서 주실 건가요'
그란데 신부의 장례미사가 열리는 날에 산살바도르에서는 단 한대의 미사만이 봉헌된다. 단 한대의 장례미사를 위해 모든 사제들이 힘을 모았다. 로메로 대주교는 '이 사제 가운데 한명이라도 건드리는 것은 곧 나를 건드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모든 가톨릭 학교는 3일동안 휴교했고, 로메로 대주교는 정부의 면담요청을 거절했다.
전국에 방송되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로메로 대주교는 매 주일마다 고문당하는 이들, 살해된 이들, 투옥된 이들, 위협당하는 이들을 이야기했고, 서민들에 대해서 강론을 했다.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1980년 3월 말기 암환자들을 위해 프로비덴시아 병원 내 경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다 극우세력에 의해서 암살당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25만명의 신도가 운집한다. 그리고 사후 30년이 지난 2009년에 미국의 지원을 받던 우파정부가 로메로 대주교의 암살에 개입했음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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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은 1971년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성탄미사에서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이런 법만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라고 강론했다. 이에 놀란 박정희 정권은 급하게 방송 송출 중단을 명령했지만 이미 전파는 전국으로 퍼져 나간 후였다.
1987년 6월, 경찰 진압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 관계자가 명동성당에 진입할 것을 요청했다. 이 같은 요청에 김수환 추기경은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요,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답변했다. 경찰은 성당으로 진입하지 못했고, 그해 결국 국민들은 2명의 대학생의 핏값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다.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박종철군 추모미사에서는 강론을 통해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며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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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가 무엇이냐는 말에 무교라고 답하지 않고 냉담이라고 말한다. 즉 천주교인이지만 지금은 성당에 나가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난 성당을 떠남으로써 조물주와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심판하는 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비 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성경에 대해서도, 무엇보다 시스템화 되어있는 종교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 같은 의문에 대해서 신부님은 언제든 마음이 내키면 그때 돌아오라고 답해주었다.
천주교는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니, 양심에 따라 살라고. 성당이 아니더라도 천주교인으로써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아나가라고. 주말에 미사를 안드리고, 판공성사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양심에 따라 살아간다면 천주교인으로써 주님께서 합당해 하실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양심에 맞춰서 내가 배워온 교리, 사람과 사랑이라는 가치를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래도 어디가서 천주교인이라고, 하지만 냉담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