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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님 솔직하게 제가 쓴 글 안 읽어보셨지요?
게시물ID : history_86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3/4
조회수 : 783회
댓글수 : 22개
등록시간 : 2013/04/29 19:12:42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8608&s_no=8608&page=1


상기 글에서 질문드린바는 본문에도 글로 남겼지만 아래 다섯가지를 제발 이렇다 더라 그렇다 더라 하는 뜬구름 잡는 주장말고, 녹음기 말고, 매카시즘도 아닌 친일파 뉴라이트 몰기 말고 제대로된 논거로 본인의 주장을 입증하는 바를 부탁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의 주장을 입증하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네요. 뭐하러 하루 종일 기다렸는지 참 제 자신이 한심스러워 지네요,


제가 드린 다섯가지 질문 그러니까 릴케님이 주장하신바를 추린것은 이렇습니다.


1. 이병도가 조선사 편수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 것.

2. 이병도가 식민사학자라는 것,

3. 이병도의 직계 제자들이 카르텔을 형성해서 학계를 장악했다는 것,

4. 3과 동일한 이병도 카르텔이 뉴라이트로 계승되었다는 것

5. 해당 글의 댓글에서 모두가 이병도의 친일 행각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


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답변 주셨는데


 릴케 (2013-04-29 18:03:37) (가입:2004-08-24 방문:139)   추천:0 / 반대:0               IP:218.209.***.88  
1. 이병도가 조선사 편수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사실입니다)

2. 이병도가 식민사학자라는 것,(사실입니다 이유는 식민사학의 근원 조선사편수회의 수장을 역임)

3. 이병도의 직계 제자들이 카르텔을 형성해서 학계를 장악했다는 것,(이른바 학계 주류계로 불리우는 현 사학계의 계보가 이병도의 직계 제자들이므로 근거가 있습니다)

4. 3과 동일한 이병도 카르텔이 뉴라이트로 계승되었다는 것(뉴라이트의 관계설은 저도 확인 할 수 없으며 이는 근거가 미약합니다)

5. 해당 글의 댓글에서 모두가 이병도의 친일 행각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친일했다는 명백한 근거는 수없이 많습니다.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댓글로 쓸까 하다 길어지기도 하고 댓글이 한자를 못 읽어 내는 부분도 있어 이렇게 글로 다시 씁니다.


1. 이병도가 조선사 편수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렇다더라 그렇다 더라 말고 제대로 된 논거가 무엇인가요? 
제 아무리 개인사 연구가 미비하다 할지라도 최소한 이쪽은 아래와 같은 증언이 있습니다.
"다만 진단학회의 주요 멤버의 한 명인 이병도씨가 청구학회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만 이름뿐이었습니다. 이씨는 우리들이 가기 전부터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보로 있었고, 후에는 촉탁이 되었습니다만, 어떤 것도 이름뿐이었습니다." 
연속심포지엄 「일본에 있어 조선연구의 축적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 6 회, <조선사편수회의 사업을 중심으로>(32P), 조선연구월보 14, 일본조선연구소,1963
또 2002년도 주간조선을 본다면 
(전략)
斗溪의 교사생활은 길지 않았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산하에 「朝鮮史編修會」를 만들자, 東京大의 池內宏 교수는 학문을 연구하려면 編修會에서 일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추천해 왔다. 斗溪도 일본인들만이 독점하던 규장각 史料 등을 섭렵하기 위해 이 권유에 따라 1925년부터 4년간 朝鮮史編修會의 촉탁으로 있었다. 
이 경력 때문에 훗날 「植民史觀(식민사관)」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이때 접한 방대한 사료와 문헌 등에 대한 지식은 평생의 資産(자산)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植民史觀」이라는 단어는 斗溪의 제자인 李基白 前 서강대 교수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李교수는 『일본 학자들이 韓民族의 독립심을 말살하기 위해 열등의식을 불어넣을 목적으로 역사를 조작한 것을 지적한 것』이라면서 『古典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일부 젊은 사학도와 일반국민들이 斗溪를, 植民史觀을 가진 親日학자로 오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다산 丁若鏞이 지은 「我邦彊域考」에 漢四郡(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比定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다산이 식민사관을 가진 親日학자냐』고 반문했다. 斗溪는 朝鮮史編修會에 無給촉탁으로 있으면서 日帝의 월급을 한푼도 받지 않았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요시찰인으로 지목됐다. 관할 종로경찰서에 불려가 말단 순사에게 창피를 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斗溪는 일본이 곧 패망할 것을 확신하고 일가 친척들의 창씨 종용에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후략)
대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것이 사실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2. 이병도가 식민사학자라는 것,
(사실입니다 이유는 식민사학의 근원 조선사편수회의 수장을 역임)

이병도가 이름을 올린 수사관보는 수장이 아닙니다, 하급 말단 직원이에요, 

조선사 편찬위원회 규정을 볼까요?

<朝鮮史 編修會 官制> <大正 14年 6月 6日 勅令 第218號> 
제1조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의 관리에 속하여 조선사료의 수정 및 편찬과 조선사의 편수를 담당한다. 
제2조 조선사편수회는 회장(會長) 1인, 고문(顧問) 및 위원(委員) 약간 명으로 조직한다. 
제3조 회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政務總監)이 겸임한다. 고문과 위원은 조선총독의 요청에 의해 내각(內閣)에서 임명한다. 
제4조 회장은 회무를 총괄한다. 회장 유고 시에는 회장이 지명하는 고문 또는 위원이 그 직무를 대리한다. 
제5조 조선사편수회에 간사 약간 명을 두고 조선총독의 요청에 의해 조선총독부 부내(部內)의 고등관(高等官) 중에서 내각이 임명한다. 간사는 회장의 지휘를 받아 서무(庶務)를 정리한다. 
제6조 조선사편수회의 사무에 종사시키기 위해 다음의 직원을 둔다. 수사관(修史官) 전임(專任) 3인, 수사관보(修史官補) 전임 4인, 서기(書記) 전임 2인 
제7조 수사관은 회장의 명을 받아 조선사료의 수집 및 편찬과 조선사편수의 사무를 담당한다. 수사관보는 상사의 지휘를 받아 조선사료의 수집 및 편찬과 조선사편수의 사무에 종사한다. 서기는 상사의 지휘를 받아 서무에 종사한다. 
제8조 본령(本令)은 공포한 날부터 시행한다.


또한 한국민족대백과에 의거하자면 민족주의 사학이란 한국 역사학계의 한 학풍으로 식민치하의 현실인식에 기초해, 일제의 식민사학에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한민족의 주체적인 역사상을 수립하고자 했던 민족진영의 역사학을 지칭하는 용어.를 일컫는 말입니다.


일본인 사학자가 백제와 신라의 건국연대 여기서는 중앙집권화 시기를 끌어내려 발표하자 내물왕과 고이왕 시대로 백년이상 끌어올려 발표한것이 이병도입니다.


기자 조선과 마찬가지로 신화의 영역에서 맴돌던 위만 조선을 위만은 조선인이라는 명목으로 현실로 이끌어낸것이 이병도입니다. 이러한 유명한 사례 말고도 그는 민족 주의적 면모가 지나치다고 비판 받고 있는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식민사학자라고 하십니까?



3. 이병도의 직계 제자들이 카르텔을 형성해서 학계를 장악했다는 것,


(이른바 학계 주류계로 불리우는 현 사학계의 계보가 이병도의 직계 제자들이므로 근거가 있습니다)


단적으로 이종욱 교수는 시쳇말로 이병도의 직계 라인이지만 도리어 이병도를 식민 사학의 잔재이자 현재 우리가 고대사를 잘못 조명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또한 이종욱 교수와 그의 학설을 따르는 이른바 서강대 학파는 화랑세기와 고대사 조명 등으로 학계에서 큰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건 뭐라고 설명을 주시겠습니까? 또한 학계 주류계라고 하시는데 대체 학계 주류계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구성원들은 누구인가요? 


참 이게 무의미한 질문인게 사학과를 다닌다 할지라도 사학사 수업을 듣지 않으면 듣기 힘들다고 하는게 이병도의 이름입니다.


학설이라는 것 자체가 고인물이 될수는 없습니다. 왜 재야사학자들 그러니까 자칭 재야사학자들 말고 지방에서 지금 이순간에도 꿋꿋하게 연구하시는 분들이 존재할수 있겠습니까, 왜 화랑세기나 백제 요동, 요서 진출설이 논쟁의 대상이 될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기존의 것이 잘못이 될수 있고 이게 진실이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기존의 학설에 보탬이 될수도 혹은 부정할수도 있는게 학설입니다, 어찌보면 유기체적인 측면을 가진것이 학계인데 어떠한 일단의 무리가 학계를 독식하고 타 무리를 배척한다?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4. 3과 동일한 이병도 카르텔이 뉴라이트로 계승되었다는 것

(뉴라이트의 관계설은 저도 확인 할 수 없으며 이는 근거가 미약합니다)



베오베에간 릴케님의 글에서도 사례로 들었지만 릴케님이 다니신 대학은 국문학과 교수가 실용 음악을 가르치고, 체육학과 교수가 영문학과 수업을 하나요?


뉴라이트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안병직 이분은 위안부는 강제동원도 아닐뿐더러 일제에 의한 공출 수탈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등의 주장으로 유명한 분인데 이 분은 경제학과 출신입니다.


역사학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에요,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를 집필한 교과서 포럼을 볼까요?


박효종: 서울대학교 국민윤리교육과 교수 (위원장) 

김일영: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 

유석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전상인: 한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대안교과서 편집자로 참여한 학자는 다음과 같다.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책임편집자) 

김용직: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영호: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재호: 전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김세중: 연세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김종석: 홍익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전상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 

김영환: 시대정신 편집위원


비전공자들이 주축이 되어 주장하는것이 뉴라이트 역사관인데 대체 이병도는 어디에서 찾아들어가나요?



5. 해당 글의 댓글에서 모두가 이병도의 친일 행각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

(친일했다는 명백한 근거는 수없이 많습니다.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누가 이병도 친일 안했다고 합니까? 네? 누가 안했다고 하는데요, 지금 친일 했다는 걸 묻는게 아니라 저를 포함해서 다른 반대하는 분들을 싸잡아 친일이니 뭐니 하시는데 대체 뭘 보고 이런 애기를 하는지 궁금해서 여쭤보는겁니다. 


본인이 이야기 하고도 찾을수가 없으신건가요? 대체 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시나요?



윗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입증하지도 못할 주장은 왜 하시나요? 이렇다 더라 그렇다더라 하는 말 말고 제대로 논거를 입증해달라는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아니고 본인의 주장인데 그렇게 무리한 일인가요?


참 이런걸 보면 왜 2백여개를 넘기는 댓글에서 그렇게 같은 말을 반복하셨는지 절로 이해되기는 하는데 제발 입증하지 못하실거면 그렇다라고 말씀해주세요, 괜한 자존심 싸움도 아니고 이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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