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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마녀와 집시 - 여인 편
게시물ID : readers_14993짧은주소 복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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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2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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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4/08/17 17:45:50
태양은 각 계절마다의 감촉이 있다. 봄의 태양은 보드랍게 감싸 안고 여름의 태양은 거칠게 짓누른다. 가을의 태양은 미지근히 감겨오고 겨울의 
태양은 따뜻하게 내려앉는다. 사계절의 무한한 반복을 겪어왔던 여인이 깨달은 사실이었다. 

현재의 태양은 가을과 겨울의 사이에 서 있었다. 어떤 날은 따뜻하게 감겨오는 감촉이 느껴지기도 했고 어떤 날은 미지근히 내려앉는 감촉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껴입을 옷을 더하거나 뺐지만 깨달음을 얻은 여인은 태양의 변덕에 기분을 맞추려 들지 않았다. 하늘하늘한 
흰색 셔츠와 다리에 붙는 갈색 면바지가 여인이 두르는 유일한 옷가지였다. 

"언제까지 앉아 계실 거에요. 일어서세요"

소년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여인은 소년의 재촉과 달리 줄기와 같은 색으로 물든 나뭇잎들을 여유로이 쓸어만지며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즐기고 있었다. 

"생명이 잠들어 가는 소리야. 포근하지 않아?"

여인은 나뭇잎을 힘껏 쥐어 조각조각 낸 다음 조각들을 한 움큼 쥐어 소년에게 내밀었다. 소년은 미간을 찡그렸다가 입을 둥글게 만 뒤 바람을 불어 
으스러진 나뭇잎들을 흩날리게 했다. 여인의 옷이며 얼굴이며 갈색 나뭇잎 조각들이 군데군데 튀었지만 여인은 아무런 역정도 내지 않고 얼굴에 
붙은 나뭇잎 조각들을 떼어냈다. 

"그것보다 제 생명이 꺼져가려 하고 있거든요"

소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머, 안타깝기도 해라" 

여인은 소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귀부인이 쓸 듯한 어조로 소년을 놀렸다. 그래도 소년은 큰 동요 없이 계속 여인이 일어서기를 재촉했다. 
그렇게 소년은 손을 잡아 끄는, 소년의 나이대에 잘 어울리는 방법까지 동원해서야 겨우 여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여인은 일어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유로운 분위기를 고수했다. 소년은 일어선 여인에게 여인이 어깨에 대각선으로 메고 다니는 보자기 가방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겁나?"

여인은 싱긋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은 토라진 듯 아무런 말 없이 여인의 손길을 뿌리쳤다. 여인의 손을 쳐낸 소년의 손등의 
마법진이 붉은 곡선을 그렸다.

여인과 소년이 불협화음을 내며 여행을 다닌지도 벌써 반년이 가까워져 갔다. 이렇게 상성이 맞지 않은 둘이 어떻게 만났느냐를 설명하려면 역시 
우연이란 단어를 빌릴 수 밖에 없었다. 

여인은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였고 여인의 보자기 가방 안엔 수많은 마법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소년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여인의 소지품을 
훔쳤지만 남의 물건을 함부로 훔친 벌이라도 받은 것일까 소년이 훔친 물건은 매우 강력한 저주가 서린 물건이었다. 마법을 책으로만 얼핏 접해 왔던 
소년은 속수무책으로 물건에 서린 저주를 옮겨 받게 되었고 그 증표로 왼쪽 손등엔 피로 그린 것 같은 붉은 마법진이 새겨졌다. 소년은 저주를 
옮겨 받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기절해 버렸고 여인은 그런 소년을 줏어 자신의 길동무로 삼았다. 외로움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소년이 옮겨 받은 
저주는 저주에 걸린 대상의 목숨을 정확히 180일째 되는 날에 앗아가는 강력한 저주였다. 저주를 푸는 방법 또한 어렵기 그지 없었다. 마나의 작은 
갈래가 모이고 모인 마나의 맥에 고인 순결한 마나로 저주를 받은 대상을 씻겨 주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마나의 맥은 대륙 내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었고 여인은 소년을 죽게 하지 않기 위해 목적지 없이 그저 방황하기만을 반복했던 여행에 종착역을 설정시켰다. 

우연이 만들어 낸 인연이다 보니 처음의 그 관계는 끊어질 법 하면서도 늘어나는 갓 만든 치즈와 같은 모양새를 유지했다. 소년은 고의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저주를 건 여인을 매우 싫어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언쟁을 벌이려 들었지만 여인은 한결 같은 부드러움으로 되려 소년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이렇게 호전된 관계를 만든지도 겨우 한달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소년은 알게 모르게 여인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마나의 맥 까지는 얼마나 남았죠?" 

소년은 뒤를 돌아보며 여인에게 물었다. 마침 가라앉고있는 태양은 소년의 금색 머리와 고동색 피부와 맞물려 소년을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게 했다.  

"좀 많이 걸어야 될 것 같아" 

여인은 주홍빛 후광을 등에 진 소년의 모습을 조금 감상한 뒤 대답했다. 소년은 여인의 대답을 듣자마자 도로 앞을 바라보았다. 

몇달 간의 여정을 마무리 지을 장소인 마나의 맥이 이 근방에 존재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마나의 사용을 논할 일이 없기도 할 뿐더러 악용을 
방지하기 위해 평범한 지도엔 마나의 맥의 위치가 표기 되어 있지 않지만 마법사들은 방대한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 있기에 감 만으로도 무리 없이 
마나의 맥을 찾아내는 게 가능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방향 정도만 어림 짐작 하는 수준에 불과하지 정확한 위치를 집어낼 순 없었다. 

언덕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칼날은 태양의 허리를 더 깊게 파고 들었고 태양의 허리에서 배어난 피는 칼날 위에 번지기 시작했다. 칼날 위에 
일렁이는 태양의 선혈을 바라보며 여인과 소년은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낮과 밤의 사이를 거닐었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얼마 안 가 달이 떴다. 옆구리가 사정 없이 파인 얇디 얇은 달이었다. 그만큼 비추는 빛도 적어 하늘에 박힌 별의 
밝기를 모조리 긁어 모아도  앞길을 밝혀줄 등불이 되어 주지는 못 할 것 같았다. 소년의 걸음 걸이가 뻗뻗해 졌고 심장이 움츠러 들었다. 양 옆으로 
빽빽이 솟은 나무 숲 틈새엔 신선한 고기를 노리는 금수들이 눈을 번뜩이고만 있는 것민 같았다. 소년은 서늘한 기분을 쫓기 위해 쇄골 부근까지
열어 두었던 단추를 잠궜다.

여인은 보자기 가방에서 속이 빈 구슬을 꺼낸 뒤 주문을 외워구슬 안을 빛이 나게 만들었다. 

"밤이 그렇게 무서운 거야?" 

여인은 어느샌가 소년의 옆에 서서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소년은 흠칫했지만 겉으론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은연하게 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요. 헌데 당신은 밤이 무섭지 않은가 보죠"

"오히려 좋아하는 걸. 밤은 대부분의 생명이 소멸이라도 한 듯한 고요한 분위기를 내니까"

소년은 여인이 이런 말을 하는 걸 제일 싫어했다. 생명과 관련 되어 있는 말, 여인의 이런 말투엔 어딘가 생명을 경시하는 태도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은 최근 들어 그런 경향이 더욱 세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여인의 말투가 과격해진 것이 아닌 자신의 심정이 변화했기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당신의 생명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소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소년과 걸음을 맞추던 여인의 발걸음이 한박자 느려졌다. 그와 동시에 여인은 숨을 고르는 간격을 살짝 늘였다. 

"아닌가요?"

소년은 이왕 터뜨릴 거 거나하게 터뜨리잔 생각에 한번 더 쏘아 붙였다. 

"...우리 얘기라도 하면서 갈까?"

소년은 여인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여유가 느껴지는 얼굴에 소년은 약간의 당혹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방금 한
말은 소년에게 있어 몇주일을 벼르고 벼른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왜 그래야 하나요"

소년은 겉으론 냉담한 척 했지만 속으론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여인의 어긋난 반응에 순간 자신이 틀린 것일까 생각했다.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반나절 길을 걸어 갈려니 심심하지 않겠어?"

"별로요" 

소년은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여인은 무엇을 생각이라도 하려는 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걸음에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럼... 예전의 나에 대한 얘기를 하면 조금은 들어줄 생각이 생기려나?"

여인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반쯤 뜬 여인의 눈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관능미가 느껴졌다. 소년은 여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을 알아 
챘지만 차마 여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여인이 내뿜는 수수께끼스런 분위기에 휩쓸릴 순 없었다. 

"좋을대로 하세요"

소년은 짐짓 헛기침을 했다. 그러지 않았다간 웃음 소리가 그대로 새어 나가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소년이 방금 한 말을 알아채고 있었던 것이었다. 소년은 목에 두르고 있던 명주 스카프를 세게 졸라매었다. 지금부터 여인이 하는 말은 소년이 그토록 듣기를 원했던 여인의 정체에 관한 얘기였다. 

"너도 잘 알다시피 서부의 대부분이 외부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에 왠만한 서부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 나도 그랬어. 태어난 마을에서 철이 들 때 까지 자란 뒤 마을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가정을 꾸렸지. 그 삶 중에 그나마 특별했던 점을 
꼽으라면 태어날 때 부터 타고난 이 두 눈 밖에 없을 거야"

여인은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여인의 눈 한가운데 자리잡은 여인의 동공은 맑은 적색을 담고 있었다. 소년은 흔하디 흔한 파란색을 
담은 눈을 껌벅였다. 

"하지만 내 평범했던 삶은 너무나도 쉽게 사라졌어. 가족이며 친구며 내가 아는 사람들은 전부 붉게 물들어 죽어갔어. 적사병이라고 한 때 유행했었던 전염병인데 알고 있을려나?"

사람의 체내에서 순환되어야 할 마나가 빠져나가지 못해 온 몸이 마나의 색깔과 같은 붉은색으로 물들어가며 죽는 병, 그것이 바로 적사병이다. 
소년은 그 때의 일을 직접 겪진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대륙 곳곳엔 적사병의 흉터가 남아 있었기에 적사병에 대해 남들이 알 정도의 지식은 갖추고 
있었다.   

"마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곤 나 밖에 없었어. 내 남편과 자식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까지 전부 묻어 준 다음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들에도 찾아가 
봤지만 다 죽어 있거나 그나마 산 한두명도 곧 내 앞에서 숨을 거두었지. 그래도 난 포기하진 않았어. 어딘가에 나와 같이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여인은 남의 인생사를 얘기하는 것만 같았다. 여인의 어조며 행동이며 일말의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소년은 여인이 하는 말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지만 딱히 놀라워 하지도 않았다. 그저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킨 채 귀만 쫑긋 열어 여인의 말을
들으려고만 했다. 여인의 말을 전부 듣지 않은 지금으로썬 자신의 감정이 향해야 하는 이정표를 소년은 정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길의 양 쪽에 나 있던 나무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나무밭이 끊긴 땅엔 용케도 쪽빛을 잃지 않은 풀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아마 서부의 절반을 꼼꼼하게 돌아 다녔을 거라고 생각해. 그 당시엔 산 사람을 찾는 데에만 급급해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지는 생각할 여유도 
없었거든. 아무튼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볼 수 있었던 사람의 자취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붉은 살덩어리들이 전부였어. 처음엔 그들을 위해 
눈물 흘려주고 애도하는 마음으로 땅에 묻어 주었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그냥 산 사람만 있는지 확인하고 그 마을을 떠나는 걸로 내용이 바뀌었어. 
그마저도 육안으로 대충 확인하면서 다닌 게 전부였고. 아마 육체의 피로도 문제긴 했지만 정신의 피로가 가장 큰 이유였을 거야. 희망을 끊임 없이 
저울질 당하다 보니 아예 추를 달아볼 생각도 하기 싫어지더라고" 

소년은 초조함을 느꼈다. 이 얘기도 충분히 여인의 정체를 알만한 얘기임엔 분명했으나 여인에게 들을 것이라 예상했던, 여인에게 듣기를 원했던 
이야기는 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다 문득 한가지 사실이 궁금해졌어. 어떻게 난 이 긴 시간 동안 멀쩡하게 다닐 수 있었던 걸까. 
운이라고 설명하기엔 그 증거가 부족했어. 왜냐면 난 내 남편과 자식들의 시체를 껴안은 채 울기도 했고 미약하게 숨이 붙어 있는 사람과 숨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마주한 적도 있었거든. 그래도 내 몸 한 구석에도 붉은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는 건 내 자신을 이상하게 볼 충분한 계기가 
되었어. 난 그 날 이후로 산 사람을 찾으러 돌아다니지 않았어. 온갖 무서운 망상들이 날 주저하게 만들었어" 

"잠시만요"

소년은 길을 걷다 말고 풀밭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수수깡 두세개를 붙인 것 같은 소년의 다리는 현재 포화 상태가 된 머리를 들고 다닐 완력이 
없었다. 소년은 지금까지 여인이 말한 이야기를 정리하려 했다.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 동안 여인은 밤하늘 위에서 은은히 점멸하는 별의 
갯수를 백의 단위까지 세는데 성공했다. 

"피곤하면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자. 어차피 그 날까진 시간이 조금 남아 있어"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 빨리 죽음의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여인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고자 했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어린 소년의 육체가 견뎌내기엔 고된 걸음이 될 테지만 소년의 정신력은 또래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소년은 몇시간이고 더 걸을 수 있었다.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할까?"

여인은 소년이 무엇 때문에 일어섰는지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은 대답 없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일 뿐이었다.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당신이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부근까지요"

소년은 무심히 말했다. 

"잘 기억하고 있네. 안 듣고 있는 줄 알았었는데"

"제가 안 듣고 있다 생각하셨으면서 왜 계속 말씀하고 계셨던 거에요"

"하던 말을 끊으면 창피하잖아"

여인은 아주 간단한 이유를 들었다. 

"그리고 이 얘기는 가끔씩 꺼내주는 게 좋아, 혼자 생각하던 입 밖으로 내놓던. 안 그러면 언젠가는 분명 잊혀지게 될 거야"

이내 여인은 헛기침을 한 뒤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그 이후 난 한 마을에 머무르면서.. 아니지. 머물렀다기 보다는 반폐인 상태로 몇일을 지냈어.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자지 않았어. 온 감각들은 
결핍된 것들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쳤지. 하지만 내 몸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어, 언제 그런 일을 겪었냐는 듯.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나려 앞을 가리자 
손대중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쓸었어. 그 순간 나는 놀라고 말았어. 흙먼지에 수도 없이 쏘인 머리카락은 여전히 윤기가 흐르고 있었어. 내 감각이 무뎌진 건 아닐까하고 몇번이고 머리카락을 만져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어. 마지막으로 만일.. 아주 만일에라는 마음으로 한쪽 가슴을 있는 
힘껏 쥐니 젖꼭지에선 옷의 한 군데를 적실 정도의 젖이 새어 나왔어"

소년의 볼이 화끈 달아 올랐다. 

"옷에서 꺼낸 손이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보고 뒷걸음질 쳤어. 이런 상황에서까지 평온했던 그 때를 기억하고 있는 내 몸이 정말로 무서웠어. 그러던 중 내 손을 감싸는 축축한 느낌에 그 쪽을 돌아다 봤어. 거기엔 적사병으로 죽어가던 사람들이 각혈한 피가 모인 웅덩이가 있었어. 손에 묻었던 젖은 그 
피에 섞여 들어갔지. 난 그 피웅덩이를 들여다 봤어. 그 안엔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내 얼굴이 들어 있었어. 내 눈과 같은 색깔로 말이야.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나는 완전히 미쳐버렸어. 내 삶에서 조금의 특별함을 줄 뿐이던 이 붉은 눈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내 얼굴을 한참이나 할퀴어 
댔어. 결국엔 나뭇가지를 꺾어 내 두 눈을 찌르기에 이르렀지" 

여인은 검지와 중지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시늉을 보였다. 

지금 여인이 하는 얘기는 정상적인 범주에선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너무나도 까마득한 이야기라서일까 소년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한 편의 잔혹동화를 듣는 듯 싶었다. 하지만 소년은 여인이 다음으로 꺼낸 한마디에 놀라고 말았다.

"이 얘기의 다음서부터가 네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일 거야. 맞지?"

"...네?!"

"시치미 떼도 소용 없어"

여인은 보자기 가방에서 제법 커다란 양장본을 꺼냈다. 놀라움으로 벌어졌던 소년의 미간이 금새 일그러졌고 입꼬리의 잔근육이 씁쓸하게 내려갔다. 

"알고 계셨으면서 어째서 진작 말하지 않으신 거죠"

"너랑 사이가 가까워 졌으니 그걸로 그만이라 생각했어" 

지금 여인이 들고 있는 양장본은 과거 소년이 여인이 잠든 사이 몰래  꺼내봤던 적이 있던 책이었다. 소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여인의 책을 
훔쳐본 것이 자신의 잘못이란 건 알았지만 자신이 책을 봤단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지금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여인이 매우 원망스러웠다. 
소년은 몇발자국 앞서 걸어간 뒤 여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소년은 여인과 같이 길을 거닌 이래 처음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우연히 불어온 바람은 소년의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쓸어 넘겼다. 

"제가 그 책을 보고 나서 당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줄 알아요? 그런데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어요?! 제가 
고민하는 걸 즐기고 있었다는 게 분명하잖아요!!!"

"그게 그렇게 화를 내야 하는 일이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을 읽고 아무렇지 않은 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소년은 바락바락 악을 쓰며 외쳤다. 싸늘한 밤공기는 소년의 입 주위에서 하얀 김이 어른거리게 하였다. 여인은 진지함을 유지하는 소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코웃음을 쳤다. 소년은 끝까지 태도를 바꾸지 않는 여인의 모습에 화가 나 이를 빠득갈며 여인을 잡아먹을 것 같은 요량으로 노려보았다.

"하, 남의 일기를 훔쳐 본 녀석이 되려 성질을 부리는 거야?" 

여인은 툴툴거리며 양장본을 보자기 가방 안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그건 제 잘못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화가 머리 끝까지 나있던 소년은 여인의 정공법에 잠시 주춤거렸다. 

"그래도 내 잘못이 아예 없다는 얘기도 아니야"

여인은 다리를 오므렸다. 서로를 바라보는 소년과 여인의 시선이 대각선에서 점점 내려가 수평을 맞추었다. 소년은 여인의 얼굴을 이렇게까지 
가까운 거리에서 본 적이 없었다. 여인의 얼굴은 도저히 한 가정을 보듬었던 어머니의 얼굴로 보이지 않았다. 목덜미 언저리를 겉돌 정도로 짧은 
머리카락은 그 끝에 탄력이 넘쳤고 라즈베리와 비슷한 향기를 풍겼다. 입술은 별다른 치장 없이도 진홍색으로 가득 차 있어 잔주름 하나 하나 
뇌쇄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그리고 입술과 같은 색깔을 한 눈은 보는 사람으로 하게끔 당장에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은 황홀경을 느끼게 할 마성을 
흘렸다. 고목빛 소년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여색이 어울리지 않는 나이인 건 당연한 얘기겠지만 소년이 여태껏 겪어온 세상의 험준함은 소년이 
조숙해질만한 지식을 가져다 주었다. 

별 하나가 멋드러지게 휘어지며 곤두박칠쳤다. 여인은 바람이 헝클어 놓은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쟁기질해 원래의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소년은 여인의 손길을 마다하지 못 했다. 여인의 붉은색 눈이 자신과 동등한 시선 상에 위치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몸이 떨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말 미안해. 네가 그렇게 괴로워 할 줄은 몰랐어"

"미안하단... 말씀이 너무 늦었어요"

소년은 여인의 시선을 가까스로 회피했다. 

"너에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건 일종의 벌이었어. 그렇게 호되게 당해놓고서도 예전 손버릇을 못 버리고 있는게 여간 괘씸해야지" 

여인은 소년의 왼손을 마주잡았다. 깍지 낀 여인의 손가락이 소년의 손등에 새겨진 손버릇의 낙인을 훑고 지나갔다.

소년의 화는 이미 풀린지 오래였다. 이다지도 살갑게 대하는 사람 앞에서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일어서세요. 갈 길이 멀어요"

소년은 여인의 손을 뿌리쳤다. 잠시 정체 되었던 여인과 소년의 발걸음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 여인은 하고 있던 이야기의 다음 시점을 어디서부터 
짚어갈 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제가 묻고 싶은 건 단 한가지에요" 

여인이 입을 열려고 하는 찰나 소년이 불쑥 말을 꺼냈다. 소년은 지금 이 여인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사자에게서 
직접 그 말을 듣고 싶어했다. 일종의 증명이었다. 

"그 책, 당신의 일기에 적혀 있던 모든 내용이 사실인가요"

여인은 긍정의 표시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의 보자기 가방 안에 있는 두꺼운 양장본에에 적힌 내용에 비하면 아주 가벼운 행위였다. 

"증거를 보여줄 수 있나요"

"원한다면야"

여인은 송곳니 사이에 새끼 손가락 하나를 넣은 다음 그것을 고기 씹듯 씹었다. 새끼 손가락에서 흐른 피는 여인의 입가를 타 한줄기로 흘러 내렸고 
심지어는 까드득 거리는 뼛소리가 들리기까지 했다. 이 장면을 눈 앞에서 지켜 보던 소년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새끼 손가락이 완전히 붉은 걸레짝이 
되어서야 여인은 입에서 새끼 손가락을 빼었다. 그리고선 입안에 흐른 피를 꿀꺽 삼킨 뒤 입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여인의 볼에 핏자국이 번졌다. 

"다..당신.."

소년은 질린 얼굴로 여인을 올려다 보았다. 극심한 고통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기를 담고 있는 여인에게서 엄청난 괴리감이 느껴졌다. 여인의 
증명 방법은 상상 이상으로 극단적이었다. 

"뭘 새삼스럽게 놀라고 그래. 네가 생각했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

"그,그렇긴 하지만 눈 앞에서 보면 어느 누구든 ㅇ,이런 반응을 보일 거,거에요"

"하긴" 

그렇게 말하는 여인의 새끼 손가락에선 여전히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소년의 시선이 여인의 새끼 손가락으로 향했다. 

"걱정마. 한 5분 뒤면 원래대로 돌아오니까"

여인은 피범벅이 된 손을 들며 웃었다. 핏방울이 옆 쪽에 나 있는 풀밭에 튀었다. 소년은 다리에 힘이 풀려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마치 죽음의 
여신이 자신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강림한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이런 건 나한테만 익숙한 거였지. 미안해 쓸데 없이 겁줘서"
 
여인은 손을 뒤로 가린 다음 다른 손을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여인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당신이 죄송해할 필요는 없어요"

소년은 잠시 휘청거렸다. 사람의 시체를 보기까지 했었던 소년이지만 스스로의 손가락을 아무렇지 않게 물어뜯는 여인의 모습은 제법 무섭게 
다가왔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따금씩 풀벌레가 우는 것을 뺀다면 여인의 말마따나 온 생명이 소멸해버린 것 같은 지독한 정적이 그들을 감쌌다. 
여인은 아무 말 없이 웃으며 소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여인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에서 공포감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여인은 그제서야긴 침묵을 
깨는 말을 건넸다.  

"....그래서 전설 상으로만 존재하는 불멸자를 직접 본 기분은 어때?" 

이로써 소년이 근 한달을 고뇌해 왔던 여인의 정체가 밝혀졌다. 소년은 여인에게 여태껏 느껴왔던 앙금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그렇네요" 

소년은 애써 웃으며 여인의 말을 되받아쳤다. 염세적인 웃음이 결코 아니었다.

"싱겁기는"

....

달이 중천에 자리잡을 정도로 밤은 깊어졌다. 하지만 여인과 소년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마나의 맥에 거의 다다르기도 했거니와 여인의 얘기를 가만히 앉아서 듣기엔 그대로 잠들어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마나의 맥 지척에 다다랐는지 저 멀리서 뿜어져 나오는 적색 광채가 여인과 소년의 앞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소년은 이 비현실스런 붉은색 광경을 파란빛 동공에 쓸어담고 있었다. 여인은 구슬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빛을 거두고 구슬을 보자기 가방 안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 동안 여인이 소년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지금의 광경 못지 않게 비현실적이었을 뿐더러 그 큰 양장본에 적혀 있던 일기들 보다 자세했고 생동감이
넘쳤다. 

여인은 이후 서부를 벗어나 수도로 향했다. 몸은 예전과 다를 것 없이 하지만 마음은 처절히 짓뭉개진 상태로. 혼자서만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과 
어쩌면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가 자신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여인을 끊임 없이 괴롭혔다. 때문에 여인은 자신을 함부로 다루었다. 사창가에서 
몇십년을 지내는가 하면 사창가에서 모았던 돈을 전부 교회에 헌금한 뒤 수녀원에 몸을 의탁해 전쟁 최전방을 돌아다니며 부상병들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야 여인은 자신을 용서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 여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맛 보았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학대를 멈추지 않던 여인은 전쟁의 폐허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마법 관련 서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법사들만 다룰 수 있는 
정통 마법서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마법을 이용한 민간요법과 마법과 관련된 전설들을 실은 책이었다. 스스로가 느낄 행복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던 여인은 이 책을 읽어서 얻을 즐거움까지 포기하려 했다. 여인은 책을 태우기로 결정하고 가까이에 있는 난로에 책을 던졌다. 하지만 
난로의 입구가 조금 작아 책은 바닥에 떨어졌고 떨어진 책은 양갈래로 갈라지며 한 페이지를 표시했다. 여인은 책을 줍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고 
펼쳐진 페이지를 조금 훑어보게 되었다. 

책에 적혀 있던 내용은 여인을 속죄의 길에서 해방시켜줌과 동시에 탐구의 길 그리고 욕망의 왕도를 걷게 해주었다. 

불멸자에 대한 가설, 그것이 바로 페이지에 적힌 내용이었다. 생명체는 노화가 진행될수록 체내에 순환되는 마나의 양이 적어져 끝끝내 사망에 이르게 
되는데 이 마나의 순환 양을 일정하게 만들어 영구히 유지시키면 영원히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불멸자가 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페이지에 적힌 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이었다. 마나의 순환 양을 일정하게 그리고 영구히 유지시키는 마법 따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끝마디엔 영생에 눈이 먼 국왕은 
그 연구를 진행하는 마법사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었지만 그들이 얻어낸 결론은 단 한가지도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을 읽어버린 여인은 자신의 정체가 과연 이 책에 적힌 불멸자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여인의 나이는 그 당시 50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신체는 여전히 20대와 다를 게 없었다. 이따금씩 노인들이 말하는 그런 관용어구가 아니었다. 여인은 말그대로 20대와 같은 
신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여인은 고도의 마법 상식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치유 능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 

여인은 그 책을 본 뒤 흔들렸던 신앙과 자신에 대한 속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수도에 있는 대수녀원으로 소속처를 옮기는 등 여러가지 노력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심란해진 마음은 억눌러지지 않았고 결국 여인은 수녀원을 나오고 말았다. 

수녀원을 나온 여인은 마법의 길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몸에 대한 수수께끼를 마법의 힘으로 풀어냄과 동시에 자신을 옭아맸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법에 관한 업을 달성하려면 영겁의 세월을 필요로 했지만 여인의 육체는 그 세월마저도 초월할 가능성이 있었다. 
여인은 뼈대 있는 마법사 가문의 하녀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해 아주 천천히 그러면서도 아주 확고하게 마법에 관한  탐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략 150년 뒤, 여인은 책에 적힌대로 무구한 삶을 젊은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시간에 비례한 연구의 결과로 학술적인 면에서도 현대 마법에 관해선 대마법사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인의 몸에 대한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그나마 추측한다면 여인이 타고난 붉은색의 눈은 
불멸자이기에 마나의 색깔을 담은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세기를 넘는 탐구의 과정에서 비록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진 못 했어도 온갖 학술적 성취감을 누린 것과 예전 겪었던 일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 만으로도 여인은 충분히 만족했다. 여인은 그 즉시 연구실을 박차고 나왔다. 골방에만 쳐박혀 있는 이들은 신체가 좋지 못 하다는 게 
일반적인 여론이었지만 여인은 그렇지 않았다. 150년의 삶을 대부분 연구실에서 보낸 여인의 몸은 여전히 신선하기 그지 없었다.

죄책감을 털어 내어 마음이 홀가분해진 여인은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자신이 누리고 싶은 걸 누리면서 살자고 결심했다. 
과거 사창가에서 자신의 몸을 버리던 시절, 그 때 느꼈었던 쾌락은 속죄와 자괴감의 일부분에 불과했었지만 그 본질은 달고 달았다. 여인은 그 때 
느꼈었던 맛을 다시금 느끼기 위해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200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 기간 동안 여인은 수많은 남성들을 파멸로 몰고 갔다. 온 대륙의 건장한 남성들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당대의 위인들 또한 여인의 마성에 
빠져 나오지 못 해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때 대륙의 역사서엔 영웅들이 여럿 요부들에게 휘둘렸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기록에 적힌 요부들은 
각자 다른 모습과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딱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붉은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인은 대륙의 역사서에 자취를 남길 정도로 수많은 행각을 벌였지만 쾌락에 대한 갈증은 멈추지 않아 쾌락을 해소할 장소를 다른 대륙으로 
옮기기에 이르렀다. 여인은 그 곳에서 또한 여색에 관한 수많은 전설을 써내려 갔다. 

여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소년은 이 부분에선 유독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가장 궁금했던 이유는 어떻게 피임을 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만 할 뿐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이런 얘기를 꺼내봤자 얼굴을 붉히게 될 건 자기 쪽이었다. 

"아마 여기까지 일기를 쓴 걸로 알고 있어" 

여인은 이야기를 마쳤다. 400년 생애의 대략적인 흐름만을 읊어줬을 뿐이지만 시간은 상당히 흘러 중천에 떠 있던 달이 서서히 가라앉는 각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인이 육포 마냥 뜯었던 새끼 손가락은 제 형태를 되찾은지 오래였다. 

"아뇨. 최근에 딱 한 편 더 쓰셨어요. 1년 전 얘기긴 하지만요"

"내가 뭐라고 적었었는데? 이젠 기억도 잘 안 나네"

소년은 여인이 최근에 썼던 일기 내용을 곱씹었다. 소년에게 있어 마지막 일기의 내용은 소년이 절대 느낄 수 없는 거리감을 싣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전 당신이 썼던 마지막 일기 때문에 그렇게 긴 고민을 했던 걸지도 몰라요"

소년은 여인이 마지막으로 적었던 일기의 내용에 대해 말하기 전, 자신이 여인에 대해 고민했던 진정한 이유를 말해주었다. 

"당신이 마지막에 적었던 일기의 내용이 가장 길지만 이것 하나만 말할게요. 당신은 마지막 일기에 죽고 싶다고 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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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번 병신백일장에서 썼던 글에 예고했던 대로 올립니다. 

기억하실 분은 있을랑가 모르겠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올립니다. 

내용을 다 올리지 않은 이유도 자신에게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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