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생명력은 기억의 심해까지 파고들어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던 시절마저 끄집어 올려낸다. 저를 체내에 나오게 해 주신 정모세포의 따뜻함과, 분열을 통해 세포를 나눈 형제들과, 꼬리질을 함께 연마하며 미래를 다투었던 동지들을 떠올린다. 아직 직접 느끼지 못한 난자의 포근함은 정모세포의 그것과 닮았을까. 딱 한번이라도 좋으니, 난자의 세포 끝자락에라도 닿아 보고 싶었다.
그래. 정자로 태어났으면, 적어도 질내에서 죽고 싶은 것이다. 질벽의 끈적한 산성이 몸을 침투하여 꼬리끝부터 짓물러지는 끔찍한 고통의, 처참한 죽음이라도 정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명예였다. 죽어간 전장 동지들의 시체를 밟고 넘어서,나를 앞질러가는 힘찬 꼬릿짓에 어떤면으로는 경탄하기까지 하면서, 수없이 시뮬레이션했던 망가진 미래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웅웅 메아리친다.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몸통에 품은 미토콘드리아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꼬리를 쳤을까.
그럼, 세상아. 입구멍이 없는 머리를 흔들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꼬리를 친다. 꼬리 끝에 툭툭 걸리는 것은 누구의 식어버린 미토콘드리아일까. 잘 훈련되어 폐기처분된 군인들은 이 어두컴컴하고 답답한 공간에서 하나 둘 숨을 잃어가고 있다. 내가 바랐던 죽음은 아니지만서도, 이제는 도리가 없다. 또다시 생각이 솟구쳐 이대로 머리가 폭발해 죽어버릴 것 같다. 지직거리는 미토콘드리아와, 머릿속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유전자가 야속하다. 나 또한 살고 싶지 않겠느냐고 온 힘으로 발악해본다. 어차피 쓸모없는 짓이지.
순간, 뚝 끊기는 소리와 함께 아득해지는 정신이 완전한 암흑으로 뒤덮힌다. 저 끝에서 미약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다. 아마, 난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