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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 후 따로 통합본 게시물을 쓸까 싶다가
구지 게시물 두 개로 나눌 이유가 별로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연재하던 7편 이후 완결까지 합친 전체글을 올립니다.
줄곧 읽어주시던 분들께서는 번거로우시겠지만 스크롤을 내려 8번부터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1>
“쏴아아아.”
우산이 묵직하다. 내리는 비가 무겁다. 손을내밀어 빗줄기를 느껴본다. 옹그린 손바닥에 빗물이 고인다. 손바닥웅덩이로 먹구름 낀 하늘이 스민다. 고인 하늘을 찢으며 빗줄기는 힘껏 손바닥을 때린다. 아리고 따갑다. 무작정 찍어 누르는 장대에 힘이 달린다. 기어이 손이 처지고 담겨있던 하늘이 쏟아진다. 먹구름이 흘러내린다.
송곳 같은 비다. 장사(壮士) 같은 비다.
벌써 보름째. 비는 처음에 거리를 청소했고 먼지를 가라앉혔다. 깔끔하고 정갈했다. 그러나 사흘을 퍼붓고도 멈출 줄 몰랐을 때, 정갈함은 사라졌다.
수해는 재빨랐다. 상수도가 부족한 시골이 가장 먼저 잠겨갔다. 사람들은 연일 물을 퍼냈다. 퍼내면 다시 흘러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나마 덜 잠긴 곳의 사정이었다. 다 잠긴 곳의 사람들은 그것조차 부러웠다. 땅이 강이 되고 강이 땅이 되어 퍼낼 엄두조차 못 냈다. 붙어있던 것들이 떨어지고 걷던 것들은 헤엄쳤다. 끓는 된장찌개 같은 황색 물속에서 세상의 재료들이 부글댔다. 뉴스는 연일 수해지역을 보도하느라 분주했다.
문득 베네치아를 생각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 지구 온난화로 인해 언젠가는 모두 잠겨버릴지 모른다는 아름답고 위태로운 도시. 시가지를 지나는 운하 위로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곤돌라의 도시. 이대로 비가 멈추지 않고온 나라가 잠겨버리면 아시아의 베네치아는 탄생하는 걸까?무역과 문화보다 고역과 화(禍)가 발달하고 비잔틴과 오리엔트 풍 대신 삭막과 부실 풍의 건축물이 즐비한 된장 빛의 베네치아. 부수어진 가로수가 곤돌라를 대신하겠지. 그런데 베네치아에도 수해라는 게 있으려나?
빗물의 거친 부딪힘을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어느 건물 처마 아래,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문다. 눅진한 담배에서 탁한 연기가 오른다. 연기는 금세 빗줄기에 녹아 버린다.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다행히도 나는 아파트 고층에 살고 있으며 이곳은 상수도가 제법 잘 갖추어진 도시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인지 범람하기 시작한 상수도는 오물을 토하고 도시 곳곳에서 쓰레기가 밀려온다. 발목 위로 찰랑이는 수위. 무릎을 넘어 머리가 잠기고 아파트 16층 나의 집까지 잠기는 일은 금방일 것만 같다. 나는 곤돌라를 사야 하는지 고민한다. 물이 차면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베란다에 정박시켜 놓는 게 좋겠지.
짤막해진 필터위로 물방울이 튀어 든다. 축축하게 젖은 담배가 맥없이 고꾸라진다.
“젠장, 사흘이면 족하다더니!”
내게 그는 분명 사흘이면 족하다고 했다. 무책임하고 성급하게도, 그렇게 말했었다. 이 저주받은 물줄기의 폭주는 잠시 방황일 뿐, 사흘이면 감정을 추스르고 일주일 후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하지만 대체 이건 어찌된 일인가? 벌써 보름이 지나도록 구름은 성나있고 여전히 빗줄기는 멈출 기미가 없다.
우리의 사랑이 이토록 깊었던가? 잔혹한 이별의 후폭풍을 일으키는 저 검고 몽실대는 덩어리와 나는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나. 새로운 담배에 불을 옮기며 가만히 떠올려본다. 빗물에 녹아드는 담배 연기처럼 허무했던 지난 사랑을.
<2>
심장이 약한 것은 유전이었다. 부모님은 내게 높지 않은지능과 밤이 되면 기능을 잃는 두 눈과 수세미처럼 엉겨 붙은 까만 곱슬머리를 물려 주셨다. 덧붙여 게으른심장마저 주셨기에 어릴 적부터 집단에서 항상 도태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집단이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구성원을 이루고 그 속에서 특별히 뛰어나다거나 눈에 띄게 뒤처진다면 배척되는법이므로. 허나, 뛰어난 자는 모두의 시기에도 불구하고 한집단을 뒤바꿀 능력이 있다. 혹은 새로운 집단을 창조하거나. 결국 집단은 뛰어난 자를 선망하여 그에 동화되고 나아가 뛰어난 자는 집단을 지배한다. 반면뒤처진 자의 경우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착하다는 허울 속에 항상 손해 보며 참을 수밖에. 태어나면서부터 귀속되는 집단을 피할 도리는 어찌해도 없었고 깊숙이 숨어들어도 집단은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배척되는 일원이었다, 나는. 언제나외로웠다. 이 사회만큼이나 교활한 외로움이었다. 누구도 내게관심이 없었으며 모자란 나를 위해 양보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그늘에앉아 뛰노는 또래를 바라보는 것이 유년시절의 일과였다. 때로는 함께 공을 차고 싶기도 했고 술래잡기라던가얼음땡 같은 것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게으른 심장은 그에 맞추어 뛰어주지 않았다. 도리어 너무 뜨거웠던지 언제나 서늘한 음지만을 찾을 뿐. 가만히그림자가 되어 있노라면 심장은 안식을 찾았지만 두 눈은 부릅 뜬 채 분노 같은 외로움에 젖어갔다. 뛰노는 또래를 보는 것은, 더구나 내 존재란 의식도 못한 채 즐거이 노는 아이들을보는 것은 괴로웠다. 더욱이 악마 같은 상상력이란! 아이들속 활기찬 나의 모습을 그려 볼 때면 엉엉 울고 싶어지고야 만다. 즐비한 대형 마트 뒤편 구멍가게 할머니의소외감처럼, 비참한 심정이었다.
자주 한숨을 쉬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한숨을 쉬는 일이 전부였다. 버릇처럼 내뱉던 한숨은 어느 순간 하얀 담배연기로 바뀌어 있었다. 어린소년이 담배를 구해 피우기란 실로 간단했다. 연기는 포근하게 나를 감쌌다. 희뿌옇게 오르는 연기를 이용해 다양한 모양을 만들기도 했는데 특히 좋아했던 것은 동그란 도넛을 내뿜는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천사의 링과 같이 느껴져서 도넛을 뿜어낼 때면 창조주라도 된 것처럼 우쭐했다. 하루에 두 갑도 넘게 피웠다. 뽀얀 연기를 그득히 뿜어 놓고는그 속으로 숨어들었다. 자욱한 연기 속으로 나는 점점 사라졌다.
그렇게 매일을 피워 댔고 매일을 사라졌다.
그 무렵이었다. 피어오르는 도넛 사이로 구름을 본 것은. 이전의 나는 좀체 고개를 뒤로 젖히는 일 따위 하지 않아서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냈다. 익숙한 건 음습한 시멘트 바닥과 뱉어진 침과 버려진 꽁초 같은 것이었다. 그랬기에 새삼 느낀 하늘과그 표면을 덮고 있는 구름의 활기란 경이로울 수밖에!
처음에는 커다란 도넛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내가 만든 도넛을 자세히 보고싶어진 나는 몇 개의 도넛을 공기 속에 뿌려놓고 그것이 머리 위쪽에서 이내 흩어지기 전 재빨리 응시했다. 작은연기 도넛의 구멍으로 또 다른 도넛이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뿜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연기 도넛 보다 더욱 커다랗고 새하얬다. 이내 연기도넛은흩어졌지만 그 위의 도넛은 그대로였다. 몽실몽실, 구름이었다. 구름 도넛은 구멍 사이로 새파란 하늘을 괴고 흘렀다.
굉장해. 저 정도의 도넛을 만들려면 스무 갑은 피워야겠어. 아니, 아니. 그걸로는부족하지. 이백 갑쯤 되어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도넛의 뒤편에서 어느새 뭉툭한 포크가 하나 나타났다. 이내 포크는 도넛을 콕 찍어 커다란 O를 두 개의 C로 나누었다. 포크는 다시 두 개의 C를 4개의 J로, 4개의 J를 네 개의 l과네 개의 u로, 네 개의l과 네 개의 u를 여덟 개의 l와 네 개의올바른 J와 네 개의 좌우가 바뀐 J로, 이런 식으로 결국 커다란 O를 수 만개의 . 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수 만개의 . 들은 바람에 날리는 하얀 모래처럼 포크의 주변을 휘돌았다.
포크는 . 들의 회오리 속에서 마치 만화속의 변신소녀같이 번쩍 하는 눈부심과함께 백룡으로 변했다. 중후하고 고풍스런 백룡이 쿠릉 하고 울부짖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쿠릉 하고 내리쳤다. 그러고는 백룡의 벌어진 입 속으로 수 만개의 . 들이 모여 들더니다시 한 번 번쩍하는 눈부심을 뿜었다. 빛이 사그러들었을 때 백룡의 입엔 영롱한 여의주가 물려 있었다.
여의주를 문 백룡은 헤험치듯 파란 하늘바다를 유유히 맴돌았고 나는 그저 꿀꺽하고 마른 침을 넘겼다. 정신이 온통 두둥실, 하늘로 떠올라 있었기에 축구공이 날아오는지도 몰랐다. 2002년 월드컵 때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는, 포르투갈전에서 박지성의 가슴과 왼발에 닿았고, 이탈리아 전 당시 안정환의 머리와 설기현의 오른발에 닿았으며, 더불어 스페인 전의 숨막히던 승부차기 순간 이운재의 두 주먹에 닿았던, 그래서대한민국을 거짓말처럼 4강에 올려놓은, 그것과 같은 디자인의공이 내 머리통을 후려쳤음에도 나는 넋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리통을 강타 한 것이 축구공이던 볼링공이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백룡은 그 사이 뉘여진 8자 모양으로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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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8바퀴. 그 이상은 돌 수없었던 것이, 8바퀴 째 에서 백룡은 제 꼬리를 물어버리고 그대로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띠의 트랙 위로 데구르 데구르르 떼구르르, 여의주가 세 번 왕복했다. 이내 여의주는 마지막 번쩍하는 눈부심과 함께 수 만개의 . 으로 돌아갔다. 분쇄된 . 들은 소록소록 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볼에 닿는 감촉이 촉촉하고 보드랍던 . 들은 놀랍게도 눈이었다. 시월에 눈 내리는 마을이란 소리를 들어 본 적은 있어도 7월에 눈내리는 골목은 난생 처음이라, 나는 적잖이
놀랐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조금도 이상치 않았다. 어쩐지 나는 익숙하게 그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던 것이다. 마치 매일 있던 하루 일과라는 듯,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듯, 의연했다. 온통쨍쨍한 태양 아래 오직 내 위로만 눈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그리고 그 날 이후 매일 같이 그런 일이 벌어졌다. 형태는 매번 달랐지만 끝은매번 같았다. 무언이던 만들어졌고 어김없이 부수어졌다. 정말이지 새삼스러울 것 없는 하루 일과였다.
구름은 상상을 빚는 마법의 지점토였다. 누가 주무르는지는 모르지만 끊임없이빚어내는 조각물의 전시회는 다채로웠다. 서서히 이루어지는 조각은 황금빛 태양 속에서 눈부신 광채를 뿜었다. 완성된 형태는 오래지 않아 물에 풀어진 휴지처럼 흩어졌으며 다시 얼마 후엔 직소퍼즐 맞추듯 조각조각 모여 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신화, 불가해한 소우주. 닿을 수 없는 창공 위엔 끊임없이 창조되고 파괴되는 경이의 세계가 있었다 .
나는 그날 이후 매일 고개를 젖혔다. 그곳엔 회색 시멘트 대신 파란 하늘과하얀 구름이 가득했다. 구름의 몸짓과 언어를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수 없는 구름의 창세기를 바라보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베테랑 낚시꾼의 끈기와 시위를 당기는 궁사의집중력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안목이었다.느긋하지만확고한 그 몸짓을 알아보는 것. 그것은 호박죽에 섞여있는 바나나 쉐이크를 걸러 내는 것만큼이나 까다로운일이었다.
누구나 하늘을 볼 수는 있지만 살아 움직이는 구름을 볼 수는 없다. 세상은하릴없이 하늘만 보는 사람을 도태시키기에 사람들은 항상 땅만 보며 살아간다. 검은 아스팔트 위, 숨 막힐 듯 빽빽하고 기막힐 듯 빠릿한 발들 사이 디딜 곳을 찾아야만한다. 빨리 걸어야 하는 사회에서 엉켜 넘어지지 않으려면 일단 발밑이 급한 것이다. 하지만 머리 위의 세상을 보는 일에 그런 시선은 전혀 쓸모없다. 신선놀음하듯 편안하게. 세월아 네월아 느긋하게.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심하게. 그렇게 바라볼 때 비로소 창조와 파괴의 몽환적 세계는 눈 앞에 펼쳐진다. 그것은 놀랍고도 환상적이지만 때론 잔인하고 포악하기도 하며 현실이지만 현실 일 수 없는, 거짓말로 구성된 진실이었다.
구름은 모든 것을 가능토록 할 순 있지만 영원토록 유지하진 못했고 또한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3>
‘가지마!’
애처로운 구름의 목소리. 잠시 멈추었던 나의 발걸음.
‘쿠르르릉. 쿠쿠쿠.’
구름이 또다시 사납게 짖어댄다. 허나 약해질 수 없다. 순간의 흔들림은 모든 것을 그르침으로, 그러므로 독해져야 한다. 하찮다 하면 하찮다. 하찮다 하찮다 하면 하찮음만 못하다. 그렇게 된다. 지나고 나면 하찮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 때문에 세상을 고통에 던져 둘 수 없기에 여기서 돌아서는 것이 옳다. 하지만또 지나고 나면 사랑 때문이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허나 그렇다 해도 아니 될 일. 결국 우린 말도 안 되는 사이였음을.....
헤어질 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난날을 떠올리며 쏟아지는 비, 아니 눈물 속에 있으려니 섧은 기억이 되 산다. 추억의 회상이 항상 그림동화 속 잔잔한 미소 같을 순 없다. 고통과후회의 딱지들로 잔인해지는 기억들. 조각난 기억 파편. 허나기억해내자. 마지막 회상이라는 다짐으로, 천천히 하나씩. 어디부터 잘못됐는지, 무엇으로 엇갈렸는지...
<4>
구름의 움직임을 본 후로 세상은 변해 있었다.
시장논리의 추가 똑딱대는 세상도 아니었고 음습한 외로움의 세상도 아니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 아주 멈춰버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구름을 보면 볼수록 세상의 중심은 구름임이 명확했다. 다닥다닥한 이 땅덩이도 결국 저 구름 아래 하수인일 뿐.
구름은 비와 눈을 뿌려 인간을 조종할 줄 알았고 그것의 완급조절을 완벽히 해냈다. 그러니 사람들은 구름의 눈치를 볼 수밖에. 매일같이 구름의 움직임에 대한 예측과 분석으로 뉴스는 끝을 맺는다. 그러나 맞아떨어지는 일기예보를 들어 본 적 있는가? 최신의 기상관측 시스템과 최고의 전문가를 동원해도 구름을 파악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구름을 알고 싶다면 느리게 봐야 함으로. 또한 깊게 봐야 함으로. 오호츠크 해 기단이던 북태평양 기단이던, 그 따위 건 중요치 않다. 구름의 이동이니 기압이니 아무리 분석해도 구름 내면의 움직임을 볼 수 없다면 일기예보는 언제까지나 오측이다.
나만은 알았다. 단지 내게만 구름의 내면이 보였다. 오늘 비가 올 건지 오지 않을 건지, 나는 판단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노인네들처럼 ‘아이고, 뼈마디가 시큰거려’서 아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교류라고나 할까? 이를테면, 어느 날은 구름이 만드는 모양새가 하나같이 우울하고 어둡기만 하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 유치한 표현이지만 그럴 때의 비는 구름의 눈물임에 틀림없다. 달리 그렇게 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런 나의 정성과 안목에 감동한 것일까? 어느 날 구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쩌면 끊임없는 표현의 몸짓을 아무도 몰라주는 세상에서 구름도 짙은 외로움에 지쳐 있었나 보다.
어쨌든 그것은 현실이었다. 놀랍게도.
최초의 대화.
“넌 나를 볼 수 있구나?”
그건 귓속으로 파고드는 울림이 아니었다. 귀를 막아도 또렷이 들리는 소리. 아마 코의 어느 부분으로 들었던 것 같다. 구름의 말을 들을 때면 항상 코끝이 찡해지곤 했으니까.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것을 어떻게 들었으며 어떤 식으로 말을 건넸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본능적으로 터득했다고 할까? 신기하게도 나는 당연 한 듯 알고 있었다. 구름과 대화하는 법을.
“누구지? 여긴 음지여서 아무도 내가 있는지 모를 텐데……”
말을 건네는 것 또한 입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건 아랫배로 하는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나의 말을 전 할 땐 항상 아랫배가 당겨왔으니까.
“넌 나는 볼 줄 아는 것 같다고. 신기하게도 말이야.”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분명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느꼈지만 그것이 누구인지 파악되지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지극히 현실의 사람에게 구름과 이야기한다는 건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넌 마음은 통하지만 이 환상적인 만남을 상상조차 못하는구나.”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 코 속부터 맹맹이 울려오는 소리. 나는 소리의 실체를 찾기 위해 부단히 머리를 굴렸지만 현실 속 울타리에서 철저히 사육된 나로서는 끝내 그것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다.
“난 너의 소망이자 욕구인 걸. 끝내 나를 모르겠니? 그렇담 할 수 없지만 나는 적잖이 실망했어. 하지만 네가 싫어졌다거나 한 건 아냐. 넌 나를 알아볼 수 있으니 말이야.”
도통 알 수 없는 말뿐 이었다. 다만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꽤나 수다스럽다는 점은 알 것 같았다.
“좋아. 난 특별한 형태를 지니고 있진 않아.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모습으로도 존재해. 아주 다양하고 복잡한 거야. 천천히 흐르지만 순간적으로 나의 쏜살같음을 느낄 수도 있어. 그래, 난 구름이야. 네가 그토록 사랑스런 눈길로 동경하던 구름. 언제나 쓸쓸히 변화하던 나를 네가 알아줬어. 종일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생각했지. 그래서 난 결심했어. 나도 널 알아주기로. 빽빽한 인쇄지 속 작게 튀어버린 잉크 방울처럼 눈에 띄진 않지만 신경 쓰이는 널 알아주기로."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구름이 내게 말을 걸어오다니! 이렇듯 다정하게 다가오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금세 나는 이 상황을 인정했다. 마치 예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고 안정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렇구나, 넌 구름이었어. 그토록 내가 사랑하고 동경하는 백색의 천사. 반가워. 언어를 구사하는 법 조차 잊을 만큼 반가운걸. 헌데, 넌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니?”
내가 물었다.
“물론이야. 너에 대해서라면 뭐든 알고 있어. 네가 나를 바라본 것처럼 나도 너만을 보고 있었으니까.”
구름이 속삭이듯 대답했다. 생각하면 지극히 이상한 대화였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내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화였기에 더욱 이상했다. 누군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내가 행위예술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나는 구석의 그늘진 회색 벽에 차갑게 기대어 고개를 꽃꽂이 젖힌 채 쪼그리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일체의 미동도 없었다. 다만, 우리의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표정만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크게 미소 짓는가 하면 어느새 굳은 얼굴이 되기도 했다. 기실 실성한 사람과 다름없었다.
“어쩌면 이 만남을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아. 아주 오래전부터 말이야. 내가 전혀 놀라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거든. 지금 이 순간이 아주 자연스러워. 마치 아기가 엄마를 알아보듯.”
난 아주 차분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 순간 구름이 미소를 보였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너그럽고 따스한 웃음이었다. 모든 것을 포옹하는 성모 마리아의 그것만큼이나 평온한 미소였다.
“사랑하는 사이니까. 그러니까 당연한 거야.”
사랑하는 사이. 알 것 같지만 어려운 말이다.
“사랑한다고? 너와 나를 말하는 거야?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
“그래, 그것도 아주 특별하고 고귀하지.”
“하지만 나는 남자아이인걸. 너는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여자는 더욱 아니야. 게다가 난 널 사랑한다는 일은 생각조차 해본 적 없어.”
“역시 사랑스러워. 난 네가 온몸에 따가운 가시가 돋은 고슴도치라 해도 널 안아버릴 것 같아. 어쩜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다소 건방진 말투. 하지만 끌리는 이유는 뭘까? 구름과 같이 내 마음도 갖은 모양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것도 잦은 주기로.
“사랑이라는 건 생각해 보는 게 아냐. 그건 자신도 알아챌 수 없는 사이에 빠져있지. 담배와 같은 거야. 왜 피우는지 생각하지 않지만 피우지 않을 수 없거든. 넌 어느새 사랑하고 있어. 날 보는 이유는 없지만 바라보지 않을 수 없으니까. 넌 항상 나를 바라보고 동경하고 이해하고 느낄 수 있잖아. 나의 언어와 몸짓을 알잖아. 더구나 넌 나와 대화를 할 수 있지. 대화를 나눈다는 건 실로 대단한 거야. 사랑하는 사이란 대화가 통하는 사이니까.”
“그렇지만 나는 사람이고 사내아이야. 사랑한다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한걸.”
“아하하하하하하하.”
너무 크게 웃어버려 공기가 온통 진동했다. 온 대지가 울리고 하늘이 갈라질 정도의 웃음이었다. 그건 비웃음이었다.
“넌 나와의 관계를 원하니? 사랑이 섹스를 매개로 귀결된다는 근거 없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거지? 우리는 말이야 섹스 이상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어. 아주 새로운 종류의 오르가즘이지. 만약 네가 원한다면 난 이성으로서 존재할 수도 있어. 타액의 교환과 정성스런 애무가 없어도 괜찮아. 우리의 쾌락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묘한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사실 섹스라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다만 나의 관념 속에서 사랑이란 실로 한정적이며 빈곤한 것이라 남자와 여자의 사귐만이 그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나 그것도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신념이라기보다 매체와 환경 속에서 그런 것이라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앞선 나의 질문은 매우 어리석었다.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순간적인 당황스러움에 반사적으로 내던진 물음이었다. 뭔가 반문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비현실성이 한층 더 바보 같은 말을 내뱉게 만들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구름이 해준 말은 정확한 실체로 다가왔다. 무심코 지나친 오늘의 운세가 맞아 드는 순간의 신뢰성 같은 것이 구축되어갔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면서 특별한 우리만의 쾌락이 무엇인지 우리만의 오르가즘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교활한 장치로 옭아매는 덫처럼 내 마음의 모든 것을 놓지 않았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구름을 바라보는 안목은 날이 갈수록 깊이를 더했고 우리의 내면과 언어는 운명 같은 교감을 이루어갔다.
나의 고정석이었던 그늘 진 구석은 구름의 도움을 받아 볕이 가장 잘 드는 곳이 되었고 눅눅한 진흙처럼 달라붙어 있던 외로움도 깨끗이 떨어져 나갔다. 하루하루는 기대감과 두근거림으로 충만했고 처음으로 삶이 재미있다고 느꼈다. 눈을 뜨면 보고 싶은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결코 질리지 않는 신비로움과 새로움으로 가득 찬 연인.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인류 역사상 존재치 않았던 초월적인 사랑을. 국경도 넘어버리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사랑이라지만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초월적인 사랑을 했다. 몇 달이 지나도록 사랑은 쉼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5>
그 남자는 소리 없이 다가왔다.
사람이라면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인기척 조차 없었다. 육체는 사라지고 상(状)만이 스르르 기어 오는 느낌이었다. 그는 검은 비니를 눌러쓰고 검은 뿔테 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오래도록 다듬지 않아 지저분한 수염은 검정 그을음 같았다. 검정 바탕에 하얀 줄이 간 아디다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두 손을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고 안경 너머 흐릿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모든 것을 꿰고 있다는 듯 예민한 눈초리. 그래 너였어.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어쩔 수 없는 말을 건넬 것만 같았다. 그의 모습 자체가 어쩔 수 없는 모습을 한 어쩔 수 없는 사내였다.
“그래 너였어.”
어쩜, 정말 그렇게 말하고 있다니.
“그래 너야. 그럴 줄 알았다니까.”
꼭 대본 연습을 하는 것 같군,
“넌 구름을 볼 줄 아는구나!”
뭐라고?
갑자기 시간이 멈추었다. 우리의 관계는 세상이 몰라야 하는 것. 세상은 그런 비현실적 관계를 인정치 않으며 나아가 나를 인정 없는 하얀 공간에 가둘지도 모르기에. 나는 이런 위태로운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내는 대체 누구인가? 어떻게 우리의 비밀스런 관계를 알고 있단 말인가? 불안한 사내였다. 초조했다. 가슴이 두 방망이질 치며 온몸의 혈관이 팽창하는 것 같았다. 어김없이 구름을 바라보며 우리의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 다가온 남자. 소름 돋도록 인기척이 없던 사내. 그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짝사랑의 비밀을 알아버린 짓궂은 친구가 전교에 비밀을 퍼뜨릴까 안절부절못할 때와 같은 초조함이 온몸을 뒤덮었다.
“바로 이곳에 있었구나. 역시나 고개를 젖히고 미소를 짓고 있어. 맞아, 나도 그랬지. 넌 언제부터였지? 그러니까 언제부터 구름을 볼 줄 알았냐는 거야.”
도대체 이 의심스러운 사내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아냐, 그건 불가능해. 난 지금 환상을 보고 있어. 완벽한 행복이 불안해서 검은 허상을 만든 거야.
“이봐, 대체 언제부터냐고 물었어.”
젠장! 허상 일리 없잖아. 이렇게 또렷이 들리는 음성인걸. 게다가 이건 실제 하는 존재야.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인 걸!
“누구예요 당신은?”
떨려오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담담히 물었다. 결코 난 겁먹지 않았어 긴장하지도 않았고. 스스로를 달랬다. 상대에게 눌려버리지 않기 위해 아주 태연히 물었다.
“아,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 난 결코 내게 해를 끼치지 않아. 믿어도 좋아.”
전혀 소용없군.
“초면의 당신을 대체 무슨 근거로 믿으라는 거죠? 게다가 구름을 볼 줄 안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요? 그런 엉터리 같은 차림으로 엉터리같이 나타나서는 엉터리 같은 말을 하고 있잖아요 당신.”
“이봐 어디가 엉터리라는 거야. 자네는 패션센스가 영 꽝이군 그래. 그리고 난 결코 엉터리 같은 말을 한 적이 없어. 자네의 서투른 거짓말은 눈에 보이잖아. 난 이미 알고 있네. 자네는 꼭 정치인처럼 둘러대는군.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덮어버리려 말을 돌리니 말이야. 어쨌든 우선 내가 누군지 알려 주어야겠어. 자네 말대로 초면의 나를 믿을 근거는 없으니까. 나는 자네와 크게 다르지 않아. 나는 말이야......”
“쿠르릉!”
갑자기 날카로운 고함이 내리쳤다.
“듣지 마!!"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그 새끼가 하는 말 따위에 귀 기울이지 말아!”
그렇듯 악다구니가 난 구름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겁에 질려 소리 지르는 약자의 발악처럼 들렸다.
“쿠릉, 쿠르릉.”
구름은 이지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흩어지며 사납게 짖어댔다. 그리고 몇 줄기의 벼락을 내리치며 크게 분노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발작에 놀란 나는 얼이 빠져 어찌할 바를 몰라 떨어댔지만 그 사내는 아주 태연하고 침착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나는 구름의 무섭도록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그의 말을 분명히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심한 두통이 몰려왔고 온몸의 신경이 서로 뒤엉켜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 그럼 그때 보도록 하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때 보도록 하지. 다시 나를 찾아온다는 말이었다. 대체 왜? 무슨 이유로 그는 나를 찾아왔으며 왜 물러서는 것인가? 그리고 구름은 왜 저토록 분노하는 걸까? 다시 찾아온다고 했다. 그렇게 말했다. 구름이 소리치며 날뛰는 바람에 확실히 듣진 못했지만 그것은 확실했다. 대체 왜??
하지만 나는 오래도록 고민할 수 없었다. 두통이 너무 심해져 구역질이 났다. 못 당할 꼴을 당하고 약이 바짝 오른 심술보 팽팽한 파마 아줌마처럼 구름은 좀체 화를 삭이지 못했다. 약이 오르고 억울해 죽겠다는 듯 길길이 날뛰었고 그럴수록 두통은 예리하게 관자놀이를 저며왔다.
한참이 지나고 두통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질 즈음 구름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흩어졌던 구름의 날카로운 조각들이 하나 둘 융합되며 포근한 몽실 구름의 형태를 찾아갔고 고막을 찢을듯한 울림도 점차 잠잠해졌다. 그리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아주 힘겹게 입을 떼었다. 무거운 유리를 들어 올리듯 조심스럽고 천천히,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말하는 것이었다.
“그와 이야기하지 마. 제발 부탁이야. 그와 만나지 말아줘.”
쥐어짜듯 지쳐버린 목소리였다.
“난 지금 지친 것 같아. 너무 힘이 들어. 미안하지만 이제 좀 쉬어야겠어.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그와 만나선 안돼.”
그렇게 말하고 구름은 옅은 수채화처럼 흩어져갔다. 난 갑작스런 소란에 영문도 모른 채 얼이 빠져 아무 말도 못 하였다. 그저 멍하니 선채로 있었을 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머릿속의 회로가 합선되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6>
그날 밤하늘은 짙은 그림자를 평소보다 일찍 드리웠다. 어둠이 깔리면 구름은 마치 사라진 듯 보이지만 사실 검은 커튼 뒤에 가리어져 있었다. 속 깊은 어둠은 지쳐버린 구름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조금 일찍 감싸주었고 조용한 어둠 속에서 구름은 나지막이 숨 쉬며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쉽게 안정을 찾지 못했다. 맞아 들지 않는 상황들이 머리에서 어지러이 춤추며 깊은 혼란의 골을 형성했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 눅눅한 어둠에 몸을 담고 이리저리 생각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차가운 그네의 쇠줄만이 기분 나쁜 울음을 퍼트리며 좁고 불편한 가죽의자를 흔들었다. 어지러웠다. 어떤 것도 정리되지 않았다.
“구름은 잠들었군.”
사내였다. 어둠 속에서 그는 더욱 불길했다. 소름 돋도록 낌새가 없었다. 마치 어둠이 그고 그가 어둠인 듯 어둠 속에서 형체 없이 목소리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좋아, 지금이라면 안전하지. 약속대로 나를 기다렸군.”
“아뇨, 그저 앉아있었어요. 당신의 말은 제대로 듣지도 못했는걸요.”
그는 자연스레 왼편의 그네에 걸터앉았다. 그의 존재가 불편한지 그네의 쇠줄이 철렁이며 삐걱댔다
“어찌 되었든 수월하게 됐어. 자네가 이곳에 있는 덕에 나는 자네를 찾아다닐 수고를 덜었거든.”
“당신이 왜 날 찾는 수고를 해야 되죠?”
“책임을 져야 하니까.”
“책임?”
난 원망스레 그의 눈을 응시했다. 아니, 눈이 라 짐작되는 곳을 바라보았다. 검은 뿔테 안경 뒤 그늘진 동그라미를.
“그래, 책임이야. 난 책임을 져야 해. 짊어져야 할 죄야. 살아가는 것과 같아. 좋고 싫고를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냐. 난 자네에게 아주 끔찍한 존재가 될 걸세. 자네의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기 위해 왔거든.”
끔찍했다. 예감이 맞았다. 사내는 결코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내 인생의 의미를 증발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이 무슨 수로 그런다는 거죠? 아니 그럴 권리는 있나요? 게다가 내가 가진 행복을 당신이 알기나 해요?”
“권리는 없어. 하지만 방금 말했듯 책임이야. 자네에겐 대가라고 할 수 있지. 강제로 자네를 어찌 할 수는 없어. 모든 것은 자네에게 달려있지. 난 그저 현실을 보여줄 뿐이야. 자네와 무책임한 저 구름의 관계는 현실의 것이 아니니까.”
어줍잖은 속임수로 우리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감출 수 있으리라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다. 모든 사람에게 일부러 알리려 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너무 놀랄 필요는 없네. 나 또한 구름을 사랑했어.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알고 있네. 오래전 일이지. 자네도 알겠지만 그 영롱한 세계를 보게 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잖은가. 꺼져있던 샹들리에의 스위치를 올려버린 것처럼 환상적이고 화려한 빛이 스며들지. 하지만 말이야 그건 현실의 것이 아냐. 초상화 속 절세미녀를 사랑할 순 없단 말일세. 자네의 무지갯빛 사랑이 대체 어떤 결말을 초래하는지 알고 있나?”
“몰라요 그런 거. 그저 난 조용히 사랑을 해요. 요란스럽지도 화려하지도 않게 우리만의 사랑을 해요. 누구도 모르게 기척조차 없이 차분한 사랑을 한다 구요.”
사실이었다. 우리는 특별했지만 조용했다.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았다. 어떤 결말을 초래할 만큼 대단한 것도 없다. 단지사랑의 상대가 조금 다르다는 것 뿐. 문제 될 건 없었다. 우리만의 세계에서 우리만의 사랑을 했다. 아무에게도 거슬리지 않았다.
“뉴스를 봐?”
“아뇨, 근래엔 거의...... 그건 왜?”
“자네가 말하는 우리만의 사랑이 문제라네. 자네 눈엔 구름뿐이지. 자네는 구름만을 생각해.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형체 때문에 스스로를 깊은 굴 속에 파묻고 있다구. 곁을 떠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자넨 지금 우선순위라는게 없어. 사랑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잖은가? 뉴스를 보지 않는다고? 비단 그것뿐이 아닐 테지. 자네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가? 가끔은 뉴스도 보란 말일세. 그저 흘러가는 감정에 취해 장님이 되지 말고.”
뉴스를 본다 해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언론의 일방적 보도를 어떤 근거로 신뢰해야 하지? 그보다 거짓 없는 구름을 보는 것이 훨씬 의미 있는 일이다. 영원하지 않으며 뚜렷한 형체도 없지만 그것만이 나를 알아준다. 주위에는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그랬다. 떠날 사람 따위 없다.
“자넨 스스로 혼자가 되었어. 물론 자넨 여리고 아주 느리지. 이 사회와는 상반된 사람이야. 그렇다고 해도 스스로 걸을 생각조차 없어. 상상의 세계에 집을 짓고 꽁꽁 문을 걸어 잠근 채 나오지 않아. 작은 창문 위로 구름만을 보지. 창조보다 파괴가 지배적인 저 하얀 먼지 덩이를 말이야. 알고 있나? 가뭄일세. 지금 세상은 지독한 가뭄으로 말라가고 있다구.”
“근데요? 가뭄이 무슨 상관이죠? 우리 사랑이 뭐가 어떻다는 거냐고요!”
나는 점차 흥분했다. 사내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트집 잡았고 나 또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모욕에 약이 올랐다. 사내의 억양에는 나무라는 엄중함이 묻어있었다.
“자네 때문이야.”
“대체 뭐가요? 억지를 쓰며 내게 시비를 걸고 있을 따름이잖아요!”
“억지는 자네가 쓰고 있네. 구름은 본분을 잊었어. 네게 보여줄 모양을 빚어내느라 본분을 잊었다고. 영원하지도 않고 금세 사라져버릴 형체 만들기에만 분주해서 할 일을 못하고 있어. 일기예보도 무용지물이란 말일세! 지금의 구름은 좀체 그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어. 그저 환상의 행복에 젖어 있으니까. 구름은 잊어버렸어. 비 내리는 법을. 그건 우는 법을 잊은 것과 같아. 자네와 구름의 관계는 진실이 아닐세. 진실의 사랑은 눈물을 동반하거든.”
“집에 가야겠어요, 피곤해요.”
그네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말했다. 발 밑, 말라붙은 모래들이 서걱거렸다.
“내 말을 흘리지 마. 뉴스를 봐. 그리고 주위를 봐. 흘려버려 무시할 문제가 아니란 걸 명심해.”
나는 대꾸 없이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향했다. 사내의 모습은 어둠과 하나 되어 뭉쳐 버렸고 그네의 쇠줄만이 두려운 듯 덜덜 떨며 목쉰 소리로 울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묵직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누린 천 조각 냄새와 옅은 담배 냄새가 풍겼다. 리모컨을 집어 전원을 눌렀다. 뉴스였다. 남자 앵커가 마른 목소리로 보도했다. 가뭄을. 기름졌던 대지는 말라비틀어진 호박처럼 이리저리 갈라졌고 오래도록 씻지 못해 꼬질꼬질한 사람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가뭄은 비참했다. 심지어 마실 물이 없어 썩어가는 개울물을 마신 마을이 단체로 식중독에 걸렸다는 내용도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가뭄이 시작된 걸까? TV우측 상단에는 성금 모금 ARS 현황판이 표시돼 있었고 앵커는 급박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이곳저곳의 상황을 보도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른 김을 뿜는 기관차처럼 공기를 한층 건조하게 했을 뿐. 목이 따끔거렸다. 냉장고의 문을 열고 손을 넣는 순간 깨달았다.
물통이 비어있다는 걸.
<7>
며칠이 지났다. 어떠한 사실을 지각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것이 한번 알아차리면 온 통 그것만 보이듯, 그날 이후 내게는 가뭄만 보였다. 말라비틀어진 수도꼭지, 1.5리터 한 병에 일 만원을 호가하는 생수. 척박한 대지와 마른 먼지투성이의 공기. 기본적인 식생활조차 영위하기 힘들어져 해골 같아진 사람들. 우산은 창고 속의 폐품이 되었다.
세상은 생기를 잃었고 푸르렀던 잔디와 알록달록한 꽃들도 누렇게 뜬 채 말라갔다. 구름과의 사이도 예전 같지 않아 서로 무언가 숨기는 듯 눈치만 보기 일쑤였다. 전엔 구름을 볼 때면 아무런 생각 없이 경이로운 창작의 향연만이 삶을 충만하게 했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어떤 모양도, 구름이 하는 어떤 말도 온전히 나를 휘감지 못했다. 함께 있는 순간에도 어느 한 구석에 가뭄에 대한 생각과 걱정이 회오리 쳤다. 그것은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지긋이 조여 오는 나사못처럼 점차 깊숙해지고 견고해지는.
이제 사랑은 후회였다. 재미와 쾌락과 보이는 형체와 특별하다는 우월감과 신비로운 허물에 본분을 버렸었다. 눈물이 없음은 아련함이 없음이었다. 아련함이 없음은 진실이 없음이었다.
견디기 힘든 죄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며 삶의 행복을 좀먹었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놀이터에서 사내를 기다렸다. 그저 늦은 밤까지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기약 없이. 그네의 삐걱임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 목이 따끔거렸다. 마른기침 소리가 건조한 공기 속에서 아프게 울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네에서 깜박 잠든 모양이었다. 사내가 내 어깨에 소름 끼치는 손을 얹어 깨우는 순간 난 그네에서 떨어졌다.‘풀썩’ 하는 힘없는 소리와 함께 작은 모래먼지가 일었다. 건조한 먼지였다. 먼지 입자가 코 속을 통해 온몸의 혈관으로 퍼져 몸 안의 수분을 모두 빨아들일 것 같았다. 아주 크게 코를 풀고 싶어 졌다.
“ 휴지 있나요?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물었다.
“아니, 이걸 사용하도록 해.”
그는 트레이닝 복 상의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버버리 패턴이 고풍스레 새겨진 오렌지색 손수건이었다. 나는 손수건을 코로 가져가서 힘차게 코를 풀었다. 어쩌면 코 밖으로 기도가 빠져나올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고마워요, 감촉이 보드랍네요. 역시 명품은 다르군요.”
그에게 손수건을 돌려주며 말했다.
“천원이야. 지하철에서 살 수 있지.”
손수건을 받아 들며 그가 답했다.
“감쪽같군요. 요즘의 이미테이션이란.”
“감쪽같지. 이러다간 진짜가 가짜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몰라.”
“그렇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게 있을까요?”
“그나저나 오늘은 자네가 먼저 와 있군. 난 며칠 동안 자네를 기다렸네. 아마 자네가 날 다시 찾을 것만 같아서.”
“아마가 아니었겠죠.”
밤은 한층 깊어져 옅은 달빛만이 희미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너무 많이 세탁하여 색이 바랜 빨래 같은 달빛이었다. 사내도 역시 바랜 빛을 띠었다.
“그래 나를 찾은 이유가 있을 테지?”
사내의 입가에 교활한 웃음이 번졌다. 자신이 그린 청사진대로 착착 풀려나가는 환의를 충분히 음미하는 웃음이었다.
“가뭄이더군요. 정말 끔찍할 정도의 가뭄이죠. 우습게도 당신의 충고 이후 세상 전체가 가뭄으로 보이더란 말이죠. 말라비틀어진 세상이었어요. 인정하죠. 구름은 본분을 잊었어요. 그 원인이 나란 것도 받아들일게요.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말 같은 것 하는게 아니었어요. 이제 어떡해야 하죠? 본분을 잊지 않도록 깨우치면 되나요? 구름을 설득하면 될까요?’
“아니, 설득되지 않아. 설명할 수 없어. 구름은 한번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으로 끝이지. 사랑을 하며 비를 내리지는 못해. 비는 곧 구름에게 눈물을 의미하지. 구름은 울어야 해. 그것도 경악할 만큼 많은 눈물이 필요해. 기쁨의 눈물 따위 생각도 하지마. 그걸론 턱도 없으니까. 외롭고 슬프고 억울하고 화가 나서 주체하기 힘들 만큼 울어야만 해. 그것만이 지금의 세상을 적실 수 있어.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건 이별이야. 한 없이 울도록 해야 해. 구름과 자네, 헤어져야 해.”
<8>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나는 차라리 그것을 바랐다. 그러나 구름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늘 그랬듯 어김없이.
구름은 조각들을 한데 모아 커다란 하트를 만들었다. 몽실몽실 작은 하트의 퍼즐로 이루어진 큰 하트였다. 내가 우울해 보일 때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종종 만들던 모양이었다. 눈치 빠른 구름은 역시 내 마음의 동요를 알아차린거다. 놀라운 통찰력. 때때로 구름의 영리함은 소름 돋을 정도였다. 빼곡히 쌓아 올려 구석까지 시멘트로 메워 버린 벽돌 담장처럼 빈틈없다. 그 사이로 공기가 드나들긴 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넌 숨기고 있어.”
아이를 나무라듯 다정함 속 엄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구름이 말했다.
“그런 거 없어.”
토라진 아이 같은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넌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그럴지도 모르지.”
“그를 만났구나!”
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머리속엔 온통 헤어짐과 가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두 단어는 뇌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첨예하게 파고들며 이리저리 쑤셔댔다.
구름은 본분을 잊었어. 나의 책임이야. 그리고 대가야.
“넌 그를 만났어! 내가 간절히 부탁했는데도 만난 거야! 넌 내게 상처를 주었어. 그를 만났다고! 그는 너를 더러운 속삭임으로 꾀어냈겠지? 너도 그처럼 나를 배신할 거야. 그래, 넌 나를 배신하겠지. 고마움도 소중함도 잊고 뒤통수를 칠거야. 인간이란 그렇지. 언젠가는 배신해. 주인도 몰라보는 물고기처럼 냉정하게 말야! 넌 다를 줄 알았는데. 너는 아니라고 믿었는데. 네게 전부를 주었어. 하지만 넌 배신할거야. 매번, 매 순간, 인간은 배신한다구! 너 조차도 그런 쓸모없는 생명일뿐야!”
마른하늘에 날벼락, 그대로였다. 번쩍이는 섬광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그래, 나도 인간이야. 죄책감을 피할 수 없어. 우리의 첫 대화처럼 본능적 책임감을 느껴. 대체 왜 비를 내리지 않지? 어째서 본분을 잊었지?”
“어쩜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너를 위한 거였어. 모두 너를 위한 거라고! 네가 비를 맞아 젖는 게 싫어. 먹구름으로 검어진 모습을 보이기도 싫어. 게다가 모양을 만들어내는 건 아주 힘든 일이야. 네 생각보다 상당하지. 온몸의 신경이 마비될 정도야. 네게 보이는 모양들은 더욱 힘이 들어. 출산의 고통이 매 순간 지속돼. 그걸 참아내는 건 아무도 날 바라보지 않는 외로움이 더 아팠기 때문이야. 난 매일 밤 어둠 속에서 녹초가 되어 쓰러져. 비를 내릴 기력 따위 남아 있지 않단 말이야! 넌 정말 이기적이구나.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건 옳지 않아. 왜 좋은 것만 보이려 해?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냐. 너는 나를 왜곡되게 길들였어. 외롭지 않기 위해 본분을 잊는다면 그건 가면이잖아. 너를 망가뜨리고 주위를 망가뜨리는... 우리는 눈물이 없었어. 그래서 가짜야. 너 때문에 내 생활도 전부 엉망이 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 볕을 쬐지 못해 퇴화된 식물처럼 처량해. 나도 지쳤어. 이젠 감당이 되지 않아.”
나의 냉정한 태도와 쏟아지는 독설에 나도 구름도 놀랐다. 원래 나는 말 수 적은 소심한 사람이었다. 이런 분명한 의사 표현은 나와 거리가 멀었다. 저 은하계 너머 외계인 이야기처럼 희미한 것. 하지만 나는 그 순간 놀랍게도 그 외계인 친구를 불러들여 갖은 말을 뱉어냈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아. 외로운 건 싫어.”
“그럼 비를 내려.”
“불가능해. 부탁이야, 제발.”
구름이 낮게 말했다. 망설임과 두려움이 섞인 음성. 슬픈 떨림이 코끝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나는 굳게 말했다.
“헤어지자.”
구름은 말이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별이야. 너와 나, 헤어져야 해.”
<9>
젖은 담배에서 쓰디쓴 진액이 스며 나온다. 이별 뒤의 눈물처럼 검고 탁한 진액. 어려웠던 우리의 만남에 비해 이별은 허무하도록 간단했다. 실로 간단하다. 만남이란 셀 수 없는 기다림과 서로에 대한 신비감과 신뢰, 그리고 헛된 노력과 때론 운도 따라야 이루어지는 실로 복잡하고 어려운 시작이다. 하지만 이별은 한마디 말이면 끝난다. 조금 신경 써서 성대를 울리기만 하면 된다. 정말이지 사소한 일이다.
처마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입술로 다가와 스르르 녹아든다. 짜다. 눈물이었다. 구름은 아직도 울고 있다. 헤어짐 이후 줄곧 울고 있다. 처음의 눈물은 세상을 구원했다. 마른대지 위엔 생명이 피어났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탱글탱글한 축복이 가득했다. 바다는 춤을 추고 숲은 싱그러운 노래를 불렀으며 우산들은 행진했다. 비는 메마른 감성과 말라비틀어진 마음의 여유까지 적시며 세상을 구원했다. 초라하고 말랐던 세상이 물에 담근 목이버섯처럼 물컹이며 부드럽게 팽창했다.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신음했다. 다시 습한 모서리로 돌아가 어둠 속에 쪼그렸다. 하지만 책임이었다. 또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허나 너무 쉽게 생각했다. 벌써 보름 째 구름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짜디짠 비. 비로소 우리의 사랑은 진실 됐다.
사내는 사라졌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 잠시 나타났을 뿐.
“대단하네. 자넨 희생할 줄 아는군. 본격적으로 구름이 울기 시작하면 많은 비가 올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하늘에 뚫린 구멍을 보고 놀랄 테지만 금방 그치니까. 사흘이면 충분하지. 그 이후에는 이슬비일 뿐이고 그러다 곧 그쳐버려. 걱정할 것 없네. 자네 마음도 그동안 추스르길 바라. 자네는 정말 위대한 일을 한 거야.”
그리곤 사라졌다. 증발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군. 그는 증발했다. 이젠 없다 무책임하게도.
보름 동안 내리는 비. 보름 내내 퍼붓는 저주. 어찌해야 이것을 멈춘단 말인가? 가뭄은 사라졌지만 이젠 홍수였다. 다소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뭄은 서서히 말려가며 고통을 주지만 홍수는 조금의 틈도 없이 갑작스레 모든 것을 부수고 더럽게 세상을 쓸어버린다. 이젠 막아야 한다. 비는 멈추어야 한다. 눈물을 거두어야 한다.
문제는 이제 난 구름과 말하는 법을 모르겠다는 점이다. 공식으로 그 방법을 외우지 않은 것처럼 본능적으로 잊어버렸다. 어찌해도 알 수 없었다. 사랑이 끝나며 대화도 끝났다. 하지만 말을 전해야 한다. 구름은 너무 오래 울고 있다.
<10>
우선 처마 밑에서 몸을 빼어 어디론가 이동해야 한다. 물은 벌써 발목 언저리까지 차 올랐다. 철벅거리는 소리를 내며 신발과 양말, 바지 밑단을 흠뻑 적신 채 거리로 나선다. 체온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온몸을 추위로 에워싸고 내딛는 걸음마다 차가운 숨결이 발을 무겁게 한다. 잠시 몸을 녹일 곳을 찾으려 해도 죄다 바닥에 고인 물을 퍼내기에 바쁘다. 어찌 해볼 방도가 없다. 더 이상 책임질 수 없다.
우두커니 선 채 하늘을 바라본다. 두 발은 온통 물속에 잠겨있고 주위는 황색 처량함으로 물들었다. 거친 물줄기가 따갑게 얼굴을 내려친다. 구름에게 아무 말이라도 건네고 싶지만 허사다. 이젠 도저히 불가능하다. 갑작스레 가슴이 뻐근하고 코끝이 따갑다. 한줄기 눈물이 흐르고 터져 버린 눈물샘은 고장 난 파이프처럼 한 가득 쏟아내기 시작한다. 내 눈물과 구름의 눈물이 한데 섞여 입술로 흘러든다. 쓰다.
“토옥, 토옥.”
그 순간 물줄기가 갑자기 사그라지더니 이내 작은 물방울을 몇 개인가 떨구고 그친다.
검은 먹구름이 순식간에 흩어지고 인자한 빛이 하늘 사이로 스며든다. 젖은 거리는 점차 따스함을 찾아가고 빗물의 콸콸거림만이 귀를 때리며 쓸어내린 세상의 재료들을 흘리고 있다. 허나 불안하다. 구름은 휴식을 취하는 것뿐. 다시 울 것만 같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개를 젖혀 다시 하늘을 보았다. 흩어졌던 구름이 다시 모여든다. 또다시 눈물이 시작되려나 생각했다. 그러나 구름은 먹구름이 아닌 이전의 하얀빛으로 돌아간다. 뭉쳐진 구름 덩이가 이내 도넛 모양으로 변한다. 도넛의 뒤편 하얀 포크가 도넛을 잘게 부수고 그 조각은 다시 뭉쳐 익숙한 형태의 백룡이 된다.
‘곧 있으면 토끼가 되겠군.’
정말 그랬다.
나는 다시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여전히 소통은 단절되어 있다. 철벅. 철벅. 물소리만이 지속적으로 신경을 거스른다. 한동안 구름을 보며 거리를 걸었지만 여전히 말을 건넬 수 없다. 걷던 나는 처마가 무너진 편의점의 모퉁이를 돌아 좁고 비린내 나는 골목에 접어들었다. 골목의 그늘진 구석.
나는 보았다. 고개 젖힌 아이를.
경직된 미소의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남색 우산. 그 속에 아이가 있다. 노란 장화와 젖은 청바지를 입고 웃는 구름이 그려진 티셔츠. 아이는 꽃꽂이 고개를 젖힌 채 하늘을 보고 있다. 홀딱 반해 버린 듯 한 눈빛. 외로움에 젖은 미소. 순간마다 변화하는 경이로운 표정. 자신 없는 몸짓과 연약한 몸뚱이. 하지만 부들부들 떨면서도 끝내 신경을 공중에 집중하고 때로 코끝을 찡그리다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는 손동작. 맙소사!
나는 아이에게 말을 건넬까 고민했지만 이내 그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거다. 이제 홍수는 끝이었다. 하지만 서서히 가뭄이 다가올 것이다. 작위적이다, 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골목을 뒤로 한 채 허망한 발걸음을 뗀다.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고 그곳에서 구름은 교활한 뱀의 형상으로 토끼를 잡아먹는다. 서서히, 조심스럽게,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창조와 파괴의 세계가 다시 움트고 있다. 아이는 구름을 사랑하고 구름 역시 아이에게 모든 것을 내주겠지. 하지만 때가 되면 나는 아이를 찾아야 한다. 아직 내가 변화하는 구름을 볼 수 있는 건 남아 있는 책임 때문이리라.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안도의 한숨이었고 다가올 날에 대한 막연한 한숨이었다. 거리는 최대한 망가졌고 인정 없는 홍수의 잔해는 아직 흐르지만 구름은 울음을 그쳤다. 지금은,
구름이 눈물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