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보수, 퇴폐, 반동을 지향했던 수많은 군벌들중에서 풍옥상은 아주 특이한 인물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에다 손문의 혁명과 "삼민주의"를 지지했고 민주화를 꿈꿨죠. 처음에는 장개석과 손을 잡고 천하통일에 나섰다가 장개석도 다를 바 없는 봉건 군벌임을 알자 두번이나 대권을 두고 대결했고 중과부적으로 패합니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장개석을 비난하자 결국 강제 퇴역당하고 장개석의 특무기관에 의해 암살되죠. 사리사욕을 위해 온갖 치졸한 책략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던 군벌시대에 그는 우직한 군인으로서 중국의 새로운 미래를 꿈꿨습니다. 참고로 한때 등소평도 풍옥상밑에서 고문 겸 정치위원으로 있었고(국공합작깨지면서 쫓겨나지만), 우리 독립운동에도 많은 도움을 주어 우리나라 최초 여류 비행사인 권기옥이 풍옥상의 국민공군에서 조종간 잡기도 합니다.
뭔가 강호동을 닮은 이 푸짐한 인상의 뚱땡이가 풍옥상(1882~1948)
풍옥상은 원래 안휘성 출신이지만 어릴때 윗동네 직예성으로 이사갑니다. X구멍 찢어질만큼 가난해 입에 풀칠하려고 14살때(11살때라는 말도 있음) 청국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학도병도 아니고... 아프리카에 이런 일이 많죠) 졸병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고속 승진을 했고 29살인 1911년 신해혁명때는 이미 한부대의 영장(대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난주봉기에 참여했다가 진압되어 쫓겨났다가 3년뒤 다시 복직되어 제7사단 14여단장이 되어 하남, 산서성에서 민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웁니다. 그리고 제16혼성여단장이 되었다가 원세개 죽고나서 장훈의 복벽전쟁과 호법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합니다.
풍옥상은 원래 단기서의 안휘파에 속했지만 1920년 7월 직환전쟁때는 직군의 오패부밑에 들어가 싸웁니다. 말하자면 배신때리고 상대편 진영으로 들어간 셈인데 따라서 원래 있던 애들한테 심한 차별과 견제를 받게 되죠.
한편 당시 하남성은 하남군벌 조척의 세력권이었는데 직환전쟁후 꿈많은 사내 오패부가 하남성 낙양에 커맨드센터를 박고는 병력을 뽑아대며 자기땅에 세력을 뻗쳐오자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2년뒤 1차 직봉전쟁이 터지자 직군과 봉군이 피터지게 싸우는 틈을 타 잽싸게 영토 확장에 나섭니다. 정주(현재의 하남성 성도)를 공격하여 풍옥상군과 대판 싸우지만 결국 패하죠. 덕분에 풍옥상은 1922년 5월 14일 하남 독군으로 취임합니다.
그는 조척이 개판쳐놓았던 하남성 안정을 위한 개혁을 추진합니다. 적극적인 이재민 구휼과 불법적 징수 금지, 호구조사 실시, 치안 강화, 탐관오리 척결, 공장 건설, 수로와 도로 정비, 아편 금지 등의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풍옥상의 공약은 결코 空約이 아니었는데, 그는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하여 주민들의 지지는 얻었지만 다른 기득권들의 반발을 삽니다. 특히 부패하고 썩어빠진 사찰을 강제로 학교로 개조하고 불상을 훼손하자 당연히 불교측에서 반발했고 상관인 오패부는 이런 행위는 "빨갱이 짓거리"라고 맹비난하죠.
풍옥상은 오패부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데다 군대를 대규모로 증강시키고 자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바로 옆동네인 낙양에 사는 오패부로서는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풍옥상은 조척의 재산을 몰수해 자신의 제16혼성여단을 제11사단으로 확장하고 3개 혼성여단(7, 8, 25)을 추가로 편성합니다. 병력은 총 2만명이 넘었으며 더욱이 철저한 훈련과 규율로 군벌군대로서는 중국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합니다.
또한 오패부가 추천한 참모장을 거절하고 자기 측근을 임명했고 또 매월 20만원의 군비를 바치라는 명령 역시 씹어버립니다. 이러니 오패부와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죠. 따라서 5개월만에 짤립니다. 처음에는 그의 고향인 안휘성 독군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먼저 앉아 있는 안휘독군 장문생이 초강력 반발함으로서 흐지부지되어 완전히 백수신세가 되었죠. 원래 안휘독군 자리를 받는다는 전제하에서 하남독군 자리를 내놓은 것인데 완전 계산 착오가 된 것이죠. 따라서 직군 보스인 조곤을 찾아가 "구직"을 애걸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조곤은 그를 명예직에 가까운 북경의 육군검열사로 임명하자 풍옥상은 마지못해 받아들입니다.
이는 그로서는 오패부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키우면서 와신상담하는 계기가 됩니다. 북경에 와서도 그는 시내의 기생굴, 아편굴을 퇴치하고 전사한 부하들을 위한 사당을 지었으며 약탈을 엄격히 금합니다. 또 "매국노는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 "일하지 않는자 먹지도 말라"는 표어를 직접 써서 벽보에 붙여놓기도 합니다. 백성들 뜯어먹고 아편 팔아 군자금 마련하는게 당연하게 생각하던 당시 군벌들로서는 풍옥상의 이런 개혁조치는 그야말로 파격적이었죠.
앞화에서 설명했듯 1차직봉전쟁에서 패한 장작림은 복수의 칼날을 갈며 기회를 노립니다. 그는 군비를 강화하고 군대를 근대화하는 한편, 외교적으로는 남쪽으로 쫓겨내려가 있던 단기서의 환계와 손문의 광동정부와 함께 "삼자동맹"을 결성합니다. 여기다 직군 내부에 대해서도 눈을 돌리는데 오패부군단 밑에서 가장 쌓인 것이 많을 인물로 풍옥상에게 마의 손길을 뻗칩니다. 풍옥상은 당장 장작림에게 내응하고 오패부의 뒷통수를 치기로 약속합니다.
이런 와중에 오패부는 막대한 군비를 조곤 총통 만드는데 낭비한데다, 병력을 남쪽으로 보내 남방과 사천을 공격합니다. 손전방이 복건을, 진형명이 광동을, 양삼은 사천을 공격하지만 전선은 지지부진한채 되려 격퇴당하죠. 따라서 병력과 군비가 피폐해지고 직군 내부에서는 마구 설치는 오패부의 독주에 대해 견제와 질시만 심화됩니다.
드디어 1924년 10월 제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남하해 오는 봉군에 대항해 오패부는 3로군을 편성하고 풍옥상에게는 봉군의 배후를 공격할 것을 명령합니다. 양자 모두 총력을 기울이는데 이 전쟁의 승자가 곧 천하를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풍옥상은 휘하 제11사단을 거느리고 열하성으로 진군합니다. 그러나 10월 20일 전선으로 향하던 풍옥상은 만리장성의 고북구에서 병력을 돌려 북경으로 진격합니다. 그리고 자군을 "국민군"으로 선포합니다.
당시 북경방위를 맡고 있던 손악의 제15 혼성여단도 풍옥상의 반란군에게 호응해 쿠테타를 일으켜 무방비상태인 조곤의 총통부를 포위합니다. 말만 직군의 총대장이지 허수아비나 다름없던 조곤은 제대로 대응도 못한채 무장해제되었고 오패부 파면과 하야를 선언합니다. 이는 오패부에게는 완전히 뒷통수 맞은 격이었죠. 또 풍옥상은 "중화민국에 황제가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자금성을 차지하고 있던 "마지막 황제" 부의한테도 당장 집비우고 나가라고 합니다.(영화에도 나오죠.) 부의는 자금성에서 쫓겨나 천진의 일본조계로 갑니다.
풍옥상의 북경정변을 알리는 당시 우리의 동아일보.(1924년 10월 25일자)
풍옥상의 배신으로 팽팽하던 전선은 완전히 붕괴됩니다. 원래 풍옥상을 신뢰하지 않았던 오패부는 그를 감시하기 위해 참모장인 왕승빈을 붙여 놓았는데 실상 왕승빈도 오패부한테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죠. 따라서 되려 풍옥상에게 붙어 버립니다. 오패부는 1만명의 직속 병력을 빼돌려 허둥지둥 북경으로 돌아오다가 천진 외곽에서 풍옥상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당합니다. 이로서 오패부는 몰락하게 되죠. 간신히 패잔병 2천명을 수습하고 배를 타고 강남으로 갔다가 다시 자신의 근거지인 호북으로 후퇴하죠.
이로서 북경의 대권을 장악하게 된 풍옥상이었지만, "타도! 오패부"를 달성하자말자 장작림과 풍옥상 동맹 역시 금새 깨집니다. 장작림은 대군을 거느리고 보무도 당당히 북경에 입성합니다. 이는 풍옥상에 대한 위압이었죠. 또한 양우정, 이경림등 봉군 지휘관들은 풍옥상군 2개여단을 기습해 무장해제시키고 멋대로 자기편에 편입시켜버립니다.
이런 날도적같은 행동에 격분한 풍옥상군 지휘관들이 장작림이 북경에 오자 암살할 계획을 수립하지만 풍옥상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만약 실패할 경우 봉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을 것인데 세력이 약한 자기들로서는 이길수 없고, 설령 성공해도 나머지 봉군 지휘관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기 때문이었죠. 한편, 장작림 쪽은 그쪽대로 풍옥상 암살을 추진하는데 마찬가지로 장작림 역시 거부합니다.
결국 장작림의 압박을 받은 풍옥상정권은 한달 천하로 끝나고 11월 24일 단기서가 총리가 됩니다. 풍옥상은 북경을 내놓고 서쪽으로 철수합니다. 북경, 천진 등 황하강의 알짜배기땅은 장작림이 차지하고 풍옥상은 섬서성, 수원성 등 찢어지게 가난한 동네만 차지하게 됩니다. 이러니 갈등이 점점 심화되죠.
더욱이 군벌들이 "빨갱이"하면 치를 뜨는 시절에 풍옥상은 공산 소련과 손을 잡아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다음해 11월 23일에 일어난 곽송령의 반란에도 지원하여 패잔병들을 자군에 편입시키자(국민군 제4군으로) 지가 한 짓은 까먹은채 격분한 장작림은 1926년 6월 28일 천진에서 오패부와 다시 만나 서로 화해하고 동맹을 체결합니다. 오패부로서는 장작림이 철천지 원수일터인데도 자기 뒷통수를 친 풍옥상이 더 미운 나머지 장작림과 손을 잡죠. 두 사내는 화해하는 댓가로 장강을 경계로 남북통치키로 합의하죠. 여기에 풍옥상이 산서성을 넘보자 염석산도 이들과 동맹을 맺습니다.
< 1926년 직봉풍전쟁때 형세도, ※ 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
5월 18일 풍옥상의 국민군이 산서군을 선제 공격하고 장작림의 봉군과 오패부의 직군이 산서군에 가세함으로서 직봉풍전쟁이 발발합니다. 여기에 남쪽에서는 풍옥상에 호응한 장개석의 국민정부군이 출동해 오패부를 뒷치기함으로서 그야말로 전쟁은 중국 전역으로 확대됩니다.
>욱이님의 블로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글의 길이상 가독성을 고려 상하로 나누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