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군벌들이 점령한 구역별로 8개 편견구로 나누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제1편견구 : 장개석의 제1집단군(복건성, 절강성, 강소성, 안휘성, 강서성)
제2편견구 : 풍옥상의 제2집단군(산동성, 하남성, 섬서성, 감숙성, 청해성, 영하성)
제3편견구 : 염석산의 제3집단군(찰합이성, 직예성, 산서성, 수원성)
제4편견구 : 이종인의 제4집단군(광동성, 광서성, 호남성, 호북성)
제5편견구 : 장학량의 동북변방군(길림성, 흑룡강성, 열하성, 봉천성)
제6편견구 : 사천, 운남, 귀주, 신강
제7편견구 : 해군
중앙편견구 : 중앙직할부대
< 아시다시피 앞화에서 이미 써먹은 지도입니다만, 참고하삼...^^ >
또한 전국에 산재한 220만에 달하는 병력을 80만명으로 60%이상을 감축하고 관리들의 봉급을 2할씩 삭감합니다. 모든 해공군은 재편되어 중앙군에 복속되며 일본을 "가상敵"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총세입 4억 5천만원의 78%에 달하는 군비를 40~45%(1억 9200만원)이내로 제한키로 합니다. 기존의 군벌중심의 집단군 체제를 없애고 중앙의 통제를 받는 일원화된 지휘체제로 통일시키고 지방 병기창의 임의 제조 금지, 모든 무기와 급료 등 군비는 중앙에서 지급, 군벌의 사사로운 세금 징수도 금지시킵니다.
한마디로 군벌들의 힘을 빼앗고 중앙정부가 통제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중국의 통일과 내전 종식, 중앙정부의 권위 강화라는 측면에서는 올바른 것이나, 자기 동네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이 사는 군벌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죠. 여기다 8개 편견구중 제1편견구와 중앙편견구, 제6편견구, 해공군은 모두 장개석이 차지하여 8개 편견구중 절반을 그가 독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장개석 자신이 군벌이면서 또한 중앙정권 역시 그가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군벌들은 장개석에게 반발하면서도 정작 자기들끼리도 서로 견제하고 질시합니다. 풍옥상은 일률적인 군대 감축을 반대하고 질에 의한 감축을 주장합니다. 즉 잘 훈련되고 무장된 부대는 재편하고 오합지졸 부대는 해산시켜 제1, 2집단군은 12개사단으로 개편, 제3, 제4집단군은 8개사단으로 감축하자고 주장합니다. 염석산은 여기에 반대하고 현재의 각 집단군 규모에 맞추어 일률적인 감축을 주장합니다.
어쨌든 힘없는 조무래기 군벌들이야 그렇다치고 풍옥상, 염석산, 이종인 등 대군벌들은 반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군대 감축이 자신들의 힘을 축소시키는 것도 있지만, 당시 생계형 용병들이 대부분인 병사들을 해고하려면 퇴직금이라도 몇푼 쥐어줘야 하는데 워낙 쪽수가 많다보니 그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무작정 쫓아내면 얘네들이 어캐 나올지는 불보듯 뻔하죠.(월급도 몇달씩 체불되기 일쑤였음) 그럼에도 장개석은 약속했던 군비도 제대로 주지 않고 "병력을 다이어트하라!"라는 엄명만 내립니다. 현실적으로 그걸 모를 리 없는 장개석이 자기 세는 오히려 불리면서 다른 군벌들만 죽으라는 얘기나 다름없었죠.
결국 군대 축소 자체는 분명 절실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군벌들간의 복잡한 이해관계때문에 제대로 실행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한계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80만명이라는 숫자도 당시 중국의 경제 규모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지만 무턱대고 줄일 수도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병사 대부분은 농토를 잃고 유랑하는 실업자, 비적들이 모병에 응모하여 병사가 되었는데 이들을 해산시키면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었죠. 무기도 있겠다, 조직력도 있겠다, 그대로 비적으로 돌아가 한탕하기 딱 좋은 시츄에이션이죠. 안그래도 이미 도처에 늘린 것이 비적인 시대에 말이죠. 결론적으로 말하면 장개석은 편견에 성공하지 못했고 29년부터 30년까지 대군벌들끼리 대규모 내전을 거치면서 흐지부지되어 버립니다.(자세한 것은 앞화에서 설명했으니 생략)
내전은 결국 장개석의 승리로 끝났지만 풍옥상만 몰락했을뿐, 염석산을 비롯한 다른 군벌들은 장개석에게 패했음에도 세력은 그대로였고(다소 줄기는 했지만) 군대의 숫자는 줄어들기는 고사하고 되려 더 늘어났습니다.(200만에서 400만으로) 장개석은 다른 군벌에 비해 군사적 우위는 차지했지만, 이들을 완전히 제거하기에는 아직 자신의 세 부족을 절실하게 깨달았고 군벌들 역시 장개석을 보스로 인정하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이 내전은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한채, 양측 합해 30만 가까운 사상자에다(중앙군 10만, 반란군 20만) 중국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고 전쟁 재원 확보를 위해 통화를 남발하는 등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군벌들도 극도의 재정적자에 시달리게 됩니다. 염석산 역시 중원대전전까지 산서성의 재정을 매우 알뜰하게 사용하여 그런대로 재정 균형을 맞추었는데 중원대전이후 거의 파탄직전에 직면합니다. 이 내전은 이후 일본의 침략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는 중대한 이유중의 하나가 됩니다.
내전에서 패하자 염석산은 일시 하야를 선언하고 만주땅 대련으로 잠깐 피신했다가 장개석과 타협하고 다시 돌아옵니다. 35년에는 대장정에 쫓긴 모택동 일당들이 산서성과 섬서성 북쪽의 변경땅 오지에 자리를 잡습니다. 염석산은 장개석의 "초공"에 적극 호응해 공산군이 황화를 넘어 산서성으로 들어오자 중앙군, 서북군, 동북군과 연계해 이들을 토벌하죠.
그러나 36년 12월 12일 서안사변이 일어난후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 모택동-주덕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이자 제18집단군으로 재편되었고 이들은 염석산의 지휘를 받게 됩니다. 염석산은 항일을 위해 공산당과 적극 협력키로 하고 "희생구국동맹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자기가 회장이 됩니다. 또 주은래가 그의 정치고문을 맡습니다.
< HOI2에서도 "산시성"이라는 세력을 고를 수 있죠. 대략 북경을 비롯해 화북일대가 그의 세력입니다. >
37년 7월 7일 노구교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합니다. 염석산은 중국군 일급상장(4성장군)이자 제2전구 사령관을 맡아 북중국에서 일본의 공세에 맞서게 됩니다. 산해관을 돌파한 일본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한달만에 북경, 천진을 장악하고 9월에는 수원성의 대동을 점령하고 산서성까지 위협합니다.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찰합이성과 수원성을 포기하고 산서성 북쪽의 흔구에 병력을 배치하고 결전을 준비합니다. 흔구는 산서성의 성도 태원을 방어하는 최후의 요충지였습니다. 여기에는 휘하 약 8만의 산서군외에 위립황 이급상장(3성장군)의 중앙군, 서북군과 8로군 등 11개군 20개사단 토탈 20만에 달합니다.
< 일본군 전차대와 싸우는 팔로군. 지들이 그린거지만 전차 한대에 몇명이 죽어나는건지...--; >
10월 13일 일본군 제 5사단을 비롯해 1개 사단, 2개 여단으로 흔구를 공격하여 21일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집니다. 공산당이 자랑하는 임표의 평형관대첩은 이 전투의 단지 한부분에 불과하며 팔로군은 보조전력으로서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일본군은 제20사단과 제109사단을 추가로 투입하여 태원 동쪽의 낭자관을 공격해 돌파함으로서 그때까지 잘 싸우던 국민당군의 방어선은 결국 무너졌고 11월 9일 태원은 함락됩니다. 산서성 거의 대부분이 함락되고 염석산은 잔존병력을 이끌고 서쪽의 임분으로 후퇴합니다. 태원은 중국 파견군 북지나 방면군 제1군 사령부가 설치되죠.
전쟁이 교착상태가 되자 염석산은 일본군과 밀약을 맺고 상호 불침범키로 합니다. 전쟁에 지친 지역 군벌들은 장개석의 명령을 어기고 일본군에게 몰래 뇌물을 먹인다음 "우리말고 옆동네를 공격하라"따위의 매국노 짓을 합니다. 서로 도와서 싸워도 부족할 판에 내만 살자는, 실로 한심한 짓이죠. 게다가 점차 국공의 관계가 악화되고 장개석의 방침이 반공으로 바뀌자 염석산은 적극적으로 공산당 토벌에 나섭니다. 대표적인 것이 39년 12월 자기가 회장으로 있는 진보성향의 "희생구국회"와 "산서청년항적결사대"를 공격해 말살시켜 버리는 "진서사변"을 일으킵니다. 그야말로 비열의 극치였죠. 이때문에 공산당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됩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서 중일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염석산은 태원으로 돌아오죠. 그러나 곧 국공내전이 발발합니다. 염석산은 산서성내의 공산당을 토벌하는 한편, 위립황, 호종남 등 중앙군과 연계해 섬북의 연안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49년에 오면서 국민당군이 이른바 3대 전역(요심, 회해, 평진)에서 대참패를 당하고 화북 전역을 상실하고 장개석은 하야합니다. 염석산의 산서성 역시 섭영진, 서향전의 화북병단의 공격을 받아 49년 3월 태원이 함락됩니다. 태원전투는 국공내전 말기 국민당군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였는데 수천명의 일본군 투항병들까지 염석산의 진군에서 싸웁니다.
염석산은 광주로 튄 다음 장개석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가죠. 이종인, 풍옥상과 달리 너무 수구적이었던 그는 공산당에게 투항했다가는 바로 인민재판감이었죠. 그는 국민당 행정원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으나 대만으로 건나간후 장개석은 염석산이 더이상 필요가 없는지라 국민당 중앙평의회 위원이라는 명예직만 맡깁니다."대동의 길", "300년의 중국"같은 책이나 쓰며 조용히 살다가 1960년 7월 22일 77살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올라갑니다. 수많은 군벌들이 비명횡사하거나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는 점에서 나름 천수를 누린 것이죠.
노년의 염석산. 맨위의 사진과 달리 산전수전 공중전겪은 독재자라기보다 그냥 맘씨 좋은 동네 영감님 같네요. 빈털털이 되어서 대만으로 쫓겨온 이후 많이 둥글둥글해진 느낌.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이 20년대에 염석산 휘하 비행단에 있기도 했죠. 이리저리 우리 독립운동가와 연계된 사람들이 많다는..
>욱이님의 블로그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가독성을 고려하여 임의로 글을 상 하로 나누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