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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계에 대한 하나의 짧은 추측
게시물ID : history_178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려
추천 : 5
조회수 : 156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8/23 19:44:42
부여는 고리국 출신 동명이
예족의 땅에 들어와 세운 나라입니다.
 
기원전 4~3세기부터 중국 문헌에 나오고
 
만주 평원에서 반농반유의 부유한 나라로서
읍루를 복속시키는 등 강국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다 기원후에 서쪽과 북쪽의 선비족(유목민),
남쪽의 고구려(산악민)가 치고 올라오면서 쇠퇴했습니다.
 
285년 선비족의 도성습격, 부여왕 살해로 끊어질 뻔한 왕계는
진나라(晉,사마씨)의 원조로 다시 이어집니다.
 
이후 345년 재차 선비족이 쳐들어와서 부여왕 현을 비롯한
왕족과 백성 5만호를 생포하여 요서로 끌고 갑니다.
(이 부여유민들은 5호16국의 장에서 활약?합니다.
부여유민들의 한반도와 왜를 향한 망명루트도 가설로 존재합니다.)
 
부여땅에 남은 부여인들은 왕조를 이어갑니다만 
결국 494년 고구려에 나라를 들어 바칩니다.
(410년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부여는 동부여)
 
고구려에 멸망 이후 일부는 송화강과 나하를 건너
북쪽에 두막루국을 세웁니다.
기록에 의하면 부여의 후예를 자처하고 부여와 습속이 같았으나
언어가 실위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 북쪽 실위의 영역과 가까운 곳에 가면서 언어가 섞인 것 같습니다.
(남북한이 분단 50년 만에 한번 걸러들어야 하는 정도인 것 만큼 언어의 변화성은 큼,
중국 조선족들이 중국어를 더 많이 쓰는 상황도 참고)
 
부여의 왕으로는
부여시조 동명,
북부여 해모수(해머슴,태양의 아들,하늘의 아들)
1세기경 동부여 해부루왕-금와왕-대소왕
갈사부여 갈사왕-도두왕
졸본부여 연타발, 우태,소서노
 
2~3세기 부태,위구태,간위거,마여,의려,의라
4세기 부여현
4세기 모용씨의 연나라에서 봉한 부여왕 부여울(모용씨 황실의 부마,부여유민세력 영도)
5세기 고구려에 나라를 넘긴 잔왕(정식시호가 아닌 조선시대 문헌상 호칭)
 
부여의 왕계는 온전히 전해지지 않습니다.
전해지지 않은 기원전의 경우
부여의 왕계가 적자계승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각 지방의 우두머리인 가(加,家)들이 독자적인 힘이 있었죠.
 
다른 한편으로는 그나마 남은 왕계도
부여와 서로 상부상조하며 선비족,고구려,흉노 등을 견제했던
중원 왕조의 문헌에 있습니다.
 
자체 기록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제 생각에는 고구려가 부여를 합병하고
부여의 종묘 제사를 끊어버리고 기록을 없앤 것은 아닐까하고 추측해봅니다.
 
고구려는 결과적으로 부여를 멸망시켰으며,
수백년간 만주의 주인이었던 부여 시조설화의 위엄을 그대로 차용하여
고구려 시조 추모왕에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후대 고려시대에는 부여시조의 왕호를 그대로 따서
추모왕의 시호로 동명성왕을 삼습니다.
 
부여 시조를 고구려의 시조로 했던 고구려가
추모설화의 원조인 동명설화 부여 왕계를 그대로 전해지게 하지 않았을거란 추측입니다.
 
어쩌면 부여의 왕계는
고구려 초기 왕들이나 북한에서 고구려 왕계에 추가한 삼국사기에 없는 기타 왕호들에
부여의 유력한 왕들이 몇몇 끼워져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남쪽으로 눈을 돌려,
부여의 적자임을 강조했던 부여씨의 나라, 남부여 백제의 초기 왕계가
부여의 왕계 상 있었던 왕호들일지도..
 
아니면... 기원전 6세기에 시작한 일왕들의 초기 계보??
 
이상, 여러가지로 추측해보다가 상상(!)해본 "경우의 수"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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