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게임, 크래킹하는거 포기했다고 하더라. 뭐, 그래봤자 시간 문제겠지만."
카페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 녀석이 인사도 없이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글쎄, 뚫는게 불가능한 보안 키도 있어."
역시 인사는 건너 뛰며, 나는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그러며, 마음 속 메모장에 '1. 게임 락과 크래킹.' 이라고 적었다.
이 녀석과의 대화는 항상 이렇다. 이게 오늘의 주제인 것이다.
...망할 녀석. 1년 만이다. 뭔놈의 태도가 오늘 아침에 봤다는 식이냐?
"그래? 왜? 어떤 비밀번호라도, 어차피 계속 대입하다 보면 답이 나오는 거 아냐?"
"그야 그렇지. 그런데, 예를 들어, 무작위로 생성한 26자리 비밀번호를 맞추려면 몇 번을 대입해야 할 것 같아?"
"26의 26승?"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스마트폰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그 결과를 보고 잠시 침묵했다.
"어쨌든 답이 나오네?"
그리고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듯이, 스마트폰을 뒤집어 덮어놓으며, 그런 무책임한 말을 내뱉었다.
"양자컴퓨턴가 뭔가도 나온다고 하고, 컴퓨터 성능도 계속 좋아지고 있으니, 아무리 긴 암호를 만들어 봤자 언젠간 뚫리는 거 아냐?"
특수문자를 포함한 100자리 암호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네.
아니, 저 녀석은 실제로 그렇게 말할 것 같지만.
"그럼 좀 더 복잡한 암호는 어떨까? 26자리 암호에, 각 자리의 입력 순서를 추가한다면?"
"뭐야, 그건?"
"그러니까, 각 입력 순서에 대해, 그 26의 26승짜리 대입표를 전부 처음부터 다시 대입해야 한다는 거야."
26 펙토리얼이면, 얼마가 나오려나...?
"숫자로 나타낼 수 있으면, 풀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런 쓸데없이 긴 암호를 누가 쓴다고?"
"문제는, 암호를 생성하는 것은 단순한 다항식인데 비해, 그것을 푸는 것은 지수함수적이라는 거야."
"뭐야, 그거?"
"기본적으로는 소수와 소인수분해에 대한 문제와 같으니까. 두 소수를 곱한 숫자를 만드는 연산은, 그 길이에 비례하지만, 그 숫자를 두 소수로 소인수분해하는데 필요한 연산은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하거든."
"아니, 내 말은. 시간이 지수적으로 증가하든 말든 답이 나오는 문제는 전부 언젠가는 풀 수 있다는 거지."
나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너, 그거 증명하면 100만 달러 받을 수 있을걸?"
녀석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나로서도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답이 있다는 것 자체가, 푸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거 아냐?"
"암호키로, 어떤 화가가 그린 그림을 사용한다면? 그것도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어차피 픽셀일거 아냐? 65535 곱하기 그림 싸이즈 하면 답이 나오네."
난 그 어마어마한 숫자에 현기증이 났지만, 무량대수를 가볍게 넘어가는 그 숫자로도, 녀석을 설득시키는건 무리였다. '그게 어떻게 답이냐!' 라고 외치고 싶지만, 일단 진정하자. 후우. 후. 심호흡을 하고.
"그러니까, 그 답이 답이 아니야. 네 말처럼 이론적으로는 가능해도, 실질적으로는 이 우주의 모든 리소스를 총동원해도, 우주의 마지막 엔트로피가 끝장나는 그 날까지도 풀 수 없는 암호키를 만드는게 가능하다는 말이니까."
나는 조금 짜증이 나려 했지만, 다음 순간, 녀석이 조금... 아주 조금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그럼, 이 우주가 아니라면?"
"응?"
"이 우주에서 불가능하다 해도, 다른 우주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잖아?"
"그건 또 무슨 판타지냐...."
어차피 이 우주에 모든 것이 종속되어 있는 우리들에겐,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다. 애초에 우주 외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없다. 그러니, 실질적인 불가능과 절대적인 불가능은 같다. 같지 않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평행차원 같은 것도 있잖아?"
...아니, 없는데.
"이 우주는 유한해도, 가능성이 무한하다면, 우리 세계랑 완전히 똑같은 우주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냐? 그러니까 우리 우주는, 그 자체로서 답이 있는 문제라고."
"대체 뭘 위한 답인데?"
"글쎄? 뭔가 열기 위한 암호키라던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뭘 열겠다는 건데? 애초에, 평행차원 같은게 존재해서, 이 우주를 완벽하게 복사해 냈다고 하자,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어?
살짝, 등에 오한이 일었다.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날까?"
녀석은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림이니, 문학이니, 애초에 쓸데없이 너무 복잡하다는 생각 안 들어? 마치 네가 말한 26자리의 암호키처럼? 그리고 그림 암호키처럼? 그리고 어쩌면 이 세상처럼?"
말도 안 된다. 애초에 논할 가치도 없다.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하늘을 나는 스파게티 몬스터 같은 얘기다.
녀석은 입을 다물고 있는 나를 보며 웃었다.
"이 우주가 뭔가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실시간 암호키라고 할 때, 그 보안이 뚫려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글쎄, 뚫는게 불가능한 보안 키도 있어."
"뭐, 그래봤자 시간 문제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