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직후 당이 인사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김태랑 최고위원이 위원장을 맡고 이상수, 이미경 등 선수(選數)가 꽤 있는 의원들로 구성했는데, 나도 위원으로 들어갔죠. 국회의원도 아닌데 실세라고 알려져 있다 보니 그리된 거죠. 근데 그 위원회는 명목상의 위원회고 사실 대통령이 따로 만든 인사위가 있었어요. 김원길, 문희상, 신계륜, 정동채, 유인태, 그리고 나까지. 대통령이 믿는 사람만 모아 놓은 거였습니다.”
—‘비선’이네요.
“비선이라 하긴 좀 뭐하지만… 언론에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습니다. 소공동 롯데호텔에 방을 빌려 놓고 보안을 철저히 했지요. 정권 창출하고 나면 이런저런 곳에 보내야 할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공직은 물론 산하 공기업까지 인사 및 추천을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최고 실세들만 딱 모였던 거라고 할 수 있죠.”
—문재인, 이강철 등의 이름은 없었군요.
“이강철은 여러 이유로 대통령이 깊이 신뢰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근데 세 번째 모임을 하던 날, 문재인이 떡하니 나타난 겁니다. 당선자가 문재인을 데려와서 ‘부산에서 활동한 문재인 변호사를 올라오라 해서 이 모임에 정규 멤버로 참석토록 했다’고 말하더군요. 나는 문재인 실물을 그날 처음 봤어요. 몇 년 전부터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선거기간에도 본 적이 없고 사진으로만 얼굴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겠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대통령이 그렇게 몇 번이나 도와달라고 할 때 모른 척하고, 심지어 대통령이 되더라도 절대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던 사람이 당선되고 나니까 딱 나타난 겁니다. 이중적 태도라는 생각이 안 들겠어요? 어찌나 화가 나던지. 대통령한테 ‘이 모임 더 하면 언론에 노출될 것 같다, 비선 논란이 생길 수 있으니 이 모임은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해 버렸습니다. 그 후 모임은 없었습니다. 명분은 그랬지만 솔직히 내 사심(私心)이 있었던 거죠. 그런 사람과 함께 앉아서 국사를 논의하기 싫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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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문재인이라는 사람을 접한 때가 언제입니까.
“200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후보 선출 전당대회와 당내 경선이 2002년 4월에 있었는데, 이 전당대회를 준비할 때였습니다. 2001년 10월 무주 덕유산리조트에서 지지자 집회를 가졌는데 원래 1500명 정도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3000여 명이 와서 숙소도 모자라고 난리였지요. 이때 노 후보가 기분이 좋고 흥분이 됐는지 연설에서 원고에 없던 얘기를 합니다. 2002년 4월에 대선후보가 결정되고 6월 초에 지방선거를 치르는 스케줄인데, ‘내가 대선후보가 되면 지방선거에서 PK(부산, 경남, 울산) 지역 광역단체장 중 하나를 당선시키겠다, 실패하면 후보 사퇴하겠다’고 말을 한 겁니다. 모두 놀랐고 우리 입장에선 정말 부담스러운 얘긴데, 본인이 무슨 생각이 있나 보다 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죠. 근데 후보가 되고 나니 당장 지방선거가 걱정되는 겁니다. 안 그래도 당내에서 공격받는 후보였으니까요.”
—그때 노 후보는 문재인을 생각했던 걸까요.
“사실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때 노무현의 생각은 YS(김영삼) 측근인 박종웅 의원을 데려오는 거였습니다. 노무현은 종종 ‘DJ가 못한 일을 내가 할 수 있다’고 얘기하곤 했어요. YS 밑에서 자라서 DJ의 품으로 온 사람이기 때문에 영호남을 아우를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YS를 찾아가서 박종웅 의원을 부산시장 후보로 내 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근데 결국 실패했지요. 다른 후보를 찾아보려니 그나마 경쟁력 있는 사람이 이기택, 신상우 정도인데 노무현이 이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문 대표는 인지도가 없었죠.
“4월에 노무현이 대선후보가 되면서 인터뷰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묻는 질문에 부산에서 같이 일해 온 문재인 변호사라고 답했고, 그때부터 문재인이라는 사람이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노무현의 일거수일투족을 언론이 주목하던 시기니까요. 사실 나는 그때도 별로 인식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같이 변호사 사무실을 했던 친한 사이고 경선에서 좀 도와달라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 계속 거절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노 후보가 문재인을 내보내자고 하더군요. 어차피 안 될 거라면 이기택, 신상우보다는 새로운 인물을 내보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이) 거절했군요.
“단순히 거절했으면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그 사람 설득하러 갔던 캠프 후배가 이렇게 전하더군요. ‘제발 나한테 그런 소리 좀 하지 마라, 난 정치에 관심 없다, 변호사 하게 좀 놔 둬라, 노무현이 대통령 돼도 그 근처에 얼씬도 안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말입니다. 노무현이 대통령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때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던 노무현의 흔들림과 아픔은 옆에서 본 사람으로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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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 때 외면했다면 그럴 만도 하겠군요.
“아닙니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나라종금 사건으로 구치소에 100일간 있다가 2003년 4월에 나왔어요. 나와 보니 당이 깨져 열린우리당이 생기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호남에서는 배신자라며 인기가 바닥인 상황이었죠. 2004년 4월이 17대 총선이니까 당이 총선준비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이 상태로는 지지를 얻기 어려운 상황인 겁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 대통령한테 얘길 했어요. 청와대나 정부에서 인지도와 인기 있는 사람들을 총선에 내보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1년 가까이 벼슬살이 했으면 은혜도 입었고 이제 보은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대상에 문재인 민정수석이 있었나요.
“문재인 민정수석, 정찬용 인사수석, 이창동 문광부장관, 강금실 법무부장관 네 명은 꼭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이 살아야 대통령도 살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때 내가 당에서 맡았던 직책이 ‘정무조정위원장’이었어요. 관료들 등 떠밀어서 출마하게 하는 역할이라 관료들은 내 전화 피하면서 ‘저승사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측근이라는 걸 다들 아니까 그런 자리에 앉힌 거죠. 근데 4명 출마를 요청하고 며칠 후에 대통령 전화가 온 겁니다. 내가 말했던 넷 다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고요. 대통령이 임명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부탁하는데 모른 척하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내가 기자들 앞에서 ‘가빈사양처 국난사명상(家貧思良妻 國亂思名相·집안이 어려우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가 혼란하면 훌륭한 재상을 그리게 된다)’이라며 네 명을 사정없이 비난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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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권 주요 인물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염 전 의원은 ‘대체 얼마나 실세이기에 저 정도로 강하게 나오느냐’는 시선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래서 ‘비선 실세’라는 시선을 받았던 거군요.
“대통령이 네 명 설득에 실패했다고 전화가 왔을 때 내가 책임지고 하겠다고 말했더니 허허 웃더군요. 그 뜻은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기자들 앞에서 비난도 하고 총선 내보내려고 한 건데 ‘염동연이 다 잘라 낸다’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다 대통령 위한 거지 설마 내 욕심이겠습니까.”
—당시 기자들 앞에서 문재인 수석을 특히 심하게 비판했던데요.
“대통령 어려울 때 대통령 뜻에 좀 따르라고 강조했습니다. 근데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그때 문재인 수석이 사표를 내길래 대통령은 그래 이제 결심했나 보다, 나를 위해 출마하나 보다 하고 사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건강상 사유 운운하더니 네팔로 트레킹을 간 겁니다. 대통령이 피눈물을 흘리는 시점에 측근이라는 사람이 해외로 트레킹이라니요. 정말 기가 막혀서 입이 안 다물어지더군요. 그런 사람이 친노라고요. 정말 그때 생각만 하면….”
그는 이 얘기를 하며 잠시 침을 삼키고 말을 멈췄다. 당시 17대 총선을 앞두고 그는 열린우리당이 호남에서 ‘DJ를 배신한 배신자’라며 지지율이 5%대로 바닥을 칠 때 수도권 출마를 포기하고 광주 출마를 선언했다.
—선거 때마다 문재인 차출론이 있었잖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서거 전까지 총선, 지방선거, 재·보궐선거 때마다 문재인에게 제안을 했어요. 민주당이 아무리 영남에서 약세여도 노무현 주변인물인 송인배, 이봉수 이런 사람들이 야당후보로 총선 출마해서 거물급인 박희태, 김태호와 몇백 표 차이로 선전하곤 했잖습니까. 김정길 후보가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해서 45% 득표했죠. 전부 다 노무현 생각대로 문재인이 나갔으면 이기는 선거였습니다. 근데 끝까지 거절하고 안 나간 거예요.”
—문재인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입니다.
“《운명》(문재인 대표 자서전)이라는 책 봤죠. 운명이 뭡니까. 노무현 서거가 자기 성공할 운명입니까. 노무현 동정론 업고 정치에 나선 인물이잖아요. 성공할 수 있었던 노무현 정권에 기여는커녕 역행한 인물입니다. 그럼 그대로 조용히 있든가. 당 대표라고 당을 저렇게 사분오열 만들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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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문재인씨를 정말 좋아했던 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 증언을 보면 문재인도 그러하였다고는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