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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일본군 0.01%
게시물ID : lovestory_684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zrider
추천 : 1
조회수 : 547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8/28 18:36:43

출처 http://mirror.enha.kr/wiki/%EC%9D%BC%EB%B3%B8%EA%B5%B0/%EC%9D%B8%EB%AC%BC#s-1

그냥 평범하게 군인으로서 잘 싸운 사람들도 이 항목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어차피 읽는 사람들은 거기서부터 싫어할 것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죄가 없다 할ㅇ만한 인물만 추려모음.


가사하라 유키오 - 창사, 구이저우, 장시 방면군 사령관. 사령관 재직 중 군을 제대로 단속하여 주둔부터 패전까지 소속 부대가 전범행위를 저지르지 않고 귀환하게 했다.


고마치 사다무 - 파일럿으로 일본군의 악습인 가혹행위를 후임에게 가하지 않았다.


구도 슌사쿠 - 구축함 이카즈치 함장. 수라바야 해전당시 자신이 격침한 영국군 중순양함 익세터의 승조원들을 자매함 이나즈마와 함께 전부 구조하여 신병 확보 후, 다음날 영국군 구축함 승조원들을 바다에서 건져 올린 뒤 이들을 하나로 모아 반저르마신에 정박 중이던 의료선 옵텐노르트에게 자신이 확보한 포로를 전부 인도했다. 그 뒤 지병 악화로 군에서 물러나며 조용히 지내다 세상을 떠나지만 쿠웨이트, 스웨덴 주재 대사를 지낸 영국인 샘 폴이 당시 중위였던 자신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인 그를 수소문하여 결국 2008년 그의 묘소에 주일 영국대사와 함께 참배하기도 했다.

 

기무라 마사토미 - 북태평양에 위치한 키스카 섬에서 고립된 일본군 수비대 5,000여 명을 전원 구출한 일본 해군 제독. 일본에서는 이를 "키스카 섬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이 공로로 그는 히로히토를 독대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 황족 군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의 바로 윗 형. 동생도 개념인이지만 형도 못지 않은 개념인이다. 다이쇼 덴노의 3남으로, 히로히토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일본 해군에서 복무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을 때 평화론을 주장했다.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쿠데타를 거부하는 등 소극적인 것과 대조적으로, 그는 적극적으로 다카기 소기치 등과 함께 도조 히데키의 암살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큰 형인 히로히토와 갈등을 많이 일으켰으며, 종전 후에는 히로히토에게 퇴위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다만, 일본 황실 내에서는 황족이라는 부심이 강해서 그런지 평민 출신의 조카며느리와 그 친정아버지를 평민이라는 이유로 무척 무시했다. 자세한 것은 미치코 황후 항목 참조.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 황족 군인. 일본 황족 중에서 몇 안 되는 개념인. 게다가 일본의 전쟁범죄와 관련해서도 자유로운 사람이다. 다이쇼 덴노의 막내 아들로, 히로히토 4형제 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전쟁 전 일본군의 만행을 잘 알고 열띤 비판을 했으며, 전후에는 일본군의 악행(특히 난징 대학살)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래서 그런지 731 부대에 재직할 시절, 이들의 악행에 경악해서 몰래 수용자들을 중립국으로 보낸 사람이기도 하다. 어느 청년 장교들이 그에게 "지금 일본은 썩었습니다. 저희가 도조 히데키와 히로히토를 제거하고 전하를 덴노 자리에 올려드릴 테니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그래도 반란은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바로 윗 형인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가 "그래, 네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지금의 이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부르더라도 후회하지 말길 바란다. 나의 사랑하는 동생아."라고 말했다. 노부히토의 말은 현실이 되었고, 다카히토는 자신이 쿠데타를 벌였더라면 수많은 인명을 살렸으리라 생각했다. 여담이지만 기시 노부스케가 이 사실을 알고 이들에게 교수형을 내리려고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만약 그가 덴노를 했더라면 일본군이 일으켰던 전쟁이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1915년에 출생한 사람으로, 2014년 현재도 살아 있다. 일본 황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미노베 타다시 - 비행대 지휘관. 자신의 부대에서 단 한명의 카미카제 희생자도 내지 않았다. 다만 본인이 적극적으로 카미카제를 거부했다고 보기는 애매하고 여러 정황상 그렇게 되어버린 케이스. 결과적으로 카미카제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본인이 부하에게 카미카제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야간에 정찰기를 출격시켜 '적의 항모를 발견하면 위치를 부대에 보고한 뒤 그대로 항모에 들이받아 전투능력을 빼앗아라. 그러면 해가 뜨는대로 본대가 출격하여 항모를 공격하겠다.'라는 작전이었는데, 정찰기가 출격하고보니 정작 카미카제로 들이받을 배를 찾지 못해서 명령을 받은 대원은 무사히 귀환(…). 본인이 직접적으로 카미카제를 거부한 것은 '연습기로 사용되는 복엽기를 이용한 카미카제'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것도 카미카제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미군 방공망을 연습기로 뚫으라고? 장난해?'라는 의미였다[2]. 하도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정말 연습기까지 사용하여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여기 계신 분들이 먼저 그걸 타고 공격해 보면 좋을 겁니다. 소관이 제로센 1기로 전부 격추시켜 드리겠습니다." 라는 소리까지 하기도. 로테이션 제도를 도입해 휴식/훈련/재편부대를 보유해서 베테랑은 후방 기지에서 신병을 교육하게 하고, 정비병을 통한 교육을 통해 우수한 파일럿들을 대거 투입하여 높은 전과를 올렸다.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 임팔 작전에서 후퇴하면서도 영국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힌 인물. 무분별한 옥쇄를 금지시킨 개념있는 사람이었다.

  

사카이 사부로 - "대공의 사무라이"로 유명한 일본군의 에이스 파일럿. 전투 실력도 굉장했지만, 카미카제를 반대하는 개념인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사토 고토쿠 - 임팔 작전에서 사령관에게 항명을 하면서까지 부하들을 살린 장군이다.

 

스기노 가즈오 - 이 사람도 파일럿으로 가혹행위를 자제한 사람이다.

      

야하라 히로미치 - 오키나와 전투 당시 참모. 지구전을 제안해 미군을 괴롭히는 전술을 제안했지만 참모장인 조 이사무와 대본영이 이 전술을 이해하지 않고 1주일간 돌격전만 행하여 군에 커다란 피해를 입자 그제서야 그의 작전대로 지구전을 행하여 미군의 지휘관인 윌리엄 버크너 중장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게 되었다. 게다가 이 손실은 태평양 전선 사상 최초의 미군 고위급 지휘관 전사자다! 미군은 '그의 전략은 일본군의 보증 수표다'라고 높게 평가했다. 다만 오키나와 학살을 반대하다 작전참모 자리에서 해임된다.

 

야스에 노리히로 - 일본 육군 군인. 군인으로서는 무능했지만 수많은 유대인과 조선인들의 인명을 구한 영웅이자 성자. 유대인 2만 명을 구했으며 싱가포르 화교 학살 당시 출장중이었던 야스에가 학살 담당자에게 뇌물을 건네주고는 300명의 사람들을 구출해낸다. 게다가 자신의 부대에 위안부 금지는 물론이고 조선인 징용자들에게도 차별대우를 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사람도 복어계획의 관여자이다.

 

이노우에 시게요시 - 해군 최고의 제독. 일명 '일본군 최후의 해군 대장', '침묵의 제독'. 요나이 미츠마사 해군대신과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 차관과 같이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삼국동맹을 반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달리, 그는 처음부터 거함거포주의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 또 일본이 미국을 이길 수 없는 6가지 이유를 제시하는 등, 태평양 전쟁을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패전 후에는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이누즈카 고레시게 - 일본 해군으로 일본 해군 최대의 성자. 난징 대학살 때 민간인 2천 명을 구출했으며 상하이 주재시절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피난해 온 유대인들을 위해 입국 비자없이 상륙시킨 후 일본인 학교를 유대인의 거주지로 제공하는 덕행을 행했다. 복어계획 제목의 계기가 된 연설을 한 인물이다.

 

이마무라 히토시 - 육사와 육군대학 시절 1등만 하던 인재로, 부하들에게 포로 학대나 학살 등의 전쟁 범죄를 금지시켰다. 라바울에서 농사를 지어가며 패전까지 버텨낸 것으로도 유명한 일본군 육군의 개념인. 게다가 위안부를 전면 금지까진 아니라도 전면 자제령을 내렸다. 게다가 후일 후회하는 것이 위안부를 전면 금지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마이 다케오 - 일본군 최고의 인도주의자. 중일전쟁을 빨리 협상으로 끝낼 방법을 연구하였지만 삼국동맹 체결 때문에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필리핀 제14군으로 배속되어 당시 바탄에서 미군들과 사투를 벌여 승리했으나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에 의구심을 품고 자기가 잡은 미군 포로들을 무장 해제시켜 석방시켰다. 그 뒤 마닐라 방위 사령관으로 루손 섬을 안정시키고 대동아성에 배속되어 난징 괴뢰 정부에서 재직하였다. 국부군과 협상하여 휴전협상을 국부군 측 대표인 허잉친과 만나 단번에 성사시켰다. 그 뒤 패전 당시 허잉친에게 억류되었지만 허잉친이 그를 전범 취급하지 않고 훈방한 뒤 적극적으로 그와 함께 중국 거주 일본인 귀환을 주도하여 소련으로 끌려가거나 중공에서 남아 혹독한 삶을 보낸 만주국 거주 일본인과는 달리 200만의 일본인을 귀환시키고 본토로 복귀했다.

 

츠노다 도모시게 - 일본 육군 소령으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와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를 평생 주군으로 모신 충신. 히로히토와 도조 히데키를 경멸하여 이들을 쓸어버리려고 했다. 이와 연루된 사람이 수백명에 달했는데 아래 항목의 군국주의자들의 대부분과 인간쓰레기의 절대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이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어쩌면 지금의 일본은 매우 달라져 있을지 모른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사람이 용자 방송국 TV 도쿄 창업주 되시겠다. 그래서 아베 신조를 씹는 건지도

 

츠치야 코겐 - 전 일본변호사회 회장이자 일본 육군 소위이자 위안부 수요집회의 창시자.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 당시 웨펜 본 중위를 베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명령을 거부하다가 명령불복종이라는 이유로 마토바 스에이사무와 다치바나 요시오, 이토 기쿠치에게 잔혹하게 두들겨 맞았다. 가족 살해 위협까지 받게된 츠치야는 결국 본 중위를 벤다. 그러나 인육은 먹지 않았는데 육류 알레르기가 있다고 거짓말로 속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일이 엄청나게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육지에서 나는 고기는 입도 대질 않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비운의 군인일 수 있으나 731부대의 만행을 까발린 분이시다. 그리고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했었고 위안부 수요집회를 만들어 낸 분이시다. 2009년 신장암으로 영면하셨다.

 

쿠사카 진이치 - 해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물, 최종 계급은 중장. 이마무라 히토시와 함께 라바울을 지켜낸 장본인이자 기사도를 아는 장군. 그와 그의 부하들은 반인륜 범죄를 절대로 저지르지 않았다. 성격이 불 같아 이마무라 히토시와 격렬한 설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뒤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껄껄대면서 이마무라 히토시와 같이 술을 마시곤 했다고 한다.

 

타다 하야오 - 이마이 다케오와 함께 친중파 겸 인도주의자 인물. 역시 노구교 사건을 협상으로 종결하려고 하였다. 이후 고노에 내각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화평공작은 절대 철회할 수 없으며, 정부에서 안 된다고 한다면 나 혼자서라도 하겠다."라고 통첩을 정부에 올렸으나 묵살당하고 예비역으로 쫓겨난다. 전후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어 심문, 수감중에 지병인 위암이 악화되어 죽었지만 극동재판측에서 이 사람은 수사 결과 무혐의로 석방 예정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로 육군대학 교두시절 학생들에게 "중국군 1만을 포로로 잡았다. 어찌 해야 하는가?"라 문제를 냈는데 다양한 답변이 오고간 뒤에 조용히 문제의 모범 답안을 썼는데, 그 답안은 전원 무장해제 후 훈방 조치하여 생업에 종사케 함이었다고 한다.

 

히구치 기이치로 - 복어계획의 창시자. 일본 육군 장군으로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한 인물로 비록 처음에는 군국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삼광작전으로 군국주의의 실체를 깨달은 후 성자의 길로 간 인물. 이마이 다케오나 가사하라 유키오마저 능가할 정도로 일본 육군 최고의 성인이자 영웅으로 거듭났다. 난징 대학살이 일어날 무렵 상부의 "모든 인간을 죽여라."라는 공지에 의문을 품고 포로 1,500명과 민간인 30,000명을 석방시켰으며, 유태인을 2만명이나 구해낸 위대한 인물이다.

 

호리 테이키치 - 일본 해군의 참다운 의미의 개념인. 평소 "국방은 군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쟁 그 자체는 악이다[5]라는 생각을 가지고 1930년의 런던 군축회의에서 보조함의 비율은 미국 및 영국과 비교해 7할은 필요하다는 함대파의 의견이 해군 내부에 강경했을 당시 군무국장이던 호리 테이키치는 영미와 전쟁보다는 타협한다는 입장인 조약파의 일원이었다. 결국 타협에 성공하여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공로로 중장으로 승진되지만 이듬해 함대파가 해군성을 장악한 상태의 인선에 휩쓸려 결국 압박을 받고 예비역으로 강제 편입되어 버렸다. 이때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펄쩍 뛰었을 정도. 하지만 호리 테이키치는 날뛰는 그를 말리고 난 뒤 겸허히 예비역으로 편입조치를 받아들이고 민간인으로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후나사카 히로시 - 일본군의 오토 슈코르체니. 단지 싸움만 잘 한 게 아니라 포로를 보호하고 전후에는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한 위령비 건립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등 그 힘에 걸맞는 정신까지 겸비한 인물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이 항목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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