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중독자모임에 나가려면 최소한 저런 멘트를 해줘야 해.
이래 뵈도 다들 나를 '자기 할 일은 하는 알콜중독자'라고 불러.
직업도 있고, 취미생활도 하고,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거든.
여태까지 나한테 음주문제가 있다고 완전히 받아들이질 못했었어.
왜냐하면 그게 정말로 문제가 되지 않았었거든.
애비라는 새끼때문에 열여섯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지금 마흔하난데 아직까지 경찰에 잡혀가거나 강제 입원을 당한 적은 없었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번도 곤경에 처한 적이 없던 건 아냐.
우리 집사람 로렌이 내가 술을 마시면 항상 신경이 곤두섰었거든.. 애들도 둘이나 있고 해서.
애들 이름이 에릭이랑 넬리인데 얘네들까지 험한 꼴을 보게 할 순 없잖아.
나도 우리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술문제를 해결해보자 마음을 먹게 됐지.
중독자모임에도 나가보고, 재활원에서 통원치료도 받고, 수업도 들어보고, 심지어는 30일짜리 감금 치료도 해봤어.
상담사도 만나보고, 심리학자도 만나보고...근데 내가 정말 안정을 찾는 곳이 집이더라고.
오랫동안 술을 마셔서 그런지 주량이 엄청 많이 늘어 있거든.
금주를 하면 어떤 느낌인지 전혀 들은 게 없었는데.
처음엔 손이 떨리고 식은 땀이 나고 그 정도 였다가 점점 해가 갈수록 구토증세가 생기고 심지어 공황 장애까지 가지게 됐어.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어.. 다시 눈을 뜨자마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니까.
이젠 술에서 술맛도 안느껴져.
혓바닥이 맛이 갔나봐...
직장은 어떻게 유지하는지 궁금하지?
재택근무를 하면 어렵지 않아.
상사는 뭐가 잘못돼도 잘 모르는 거 같아.. 내가 그정도로 일을 잘해.
알딸딸한 상태일 땐 더 잘 하지.
애들은 지금 초등학생이고 로렌은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하는 전형적인 보험 설계사야.
집에 혼자있으면 술이 술술 넘어간다니까.
그래도 집에는 절대 술을 쟁여놓지 않는 것으로...
내가 아직까지 술을 마신다는 걸 알게되면 엄청 화낼거야.
그래서 나만의 '숨기미구멍'에다가 몰래 쌓아뒀어.
금주 때문인지 내가 6시간 이상 잠을 못자거든.
매일같이 아침에 로렌이 깨기 전에 전날 밤에 마시던 술을 싹 치워놔.
로렌이 8시에 출근을 하기 전까지는 진짜 맛탱이가 갈 것 같고 손이 떨리고 그래.
그 시간이면 애들은 벌써 학교 버스를 타러 나간 뒤야.
동네 주류점이 4키로 정도 떨어져있는데 거기까지 걸어서 가면 정확히 개점시간 9시에 맞출 수 있어.
그리고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골아 떨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런 식으로 반복해.
오늘은 근데 조금 달랐어.
어제 술을 너무 많이 사서 나갈 필요가 없겠더라고.
보드카 한 병으로 시동을 걸고 애들을 학교로 보낼 채비를 했어.
로렌이 좀 싸늘하긴 했지만 한마디도 안하고 나가길래 한시름 덜었지.
분명 술마신 걸 알았을텐데..
어쨋거나 잔소리를 하나도 안들었으니 다행이지 뭐.
오후 2시쯤인가 초인종이 울렸어.
컴퓨터 책상에서 일어나서 현관으로 가는데 오늘따라 좀 어지럽더라고.
주량을 한참이나 넘겼었나봐.
문구멍으로 보니까 땅딸막한 남자가 밖에 서 있었어.
"누구쇼?"
너무 궁금한 나머지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지 뭐야.
"안녕하세요, 미치씨. 저는 화이트라고 합니다. 잠시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뭘요?"
나는 판매원 나부랭이한테 걸렸나 싶었지.
"실은 가족분께서 저더러 미치씨를 만나보길 원하셨어요."
'오메 시발.'
술 마시는 걸 알아채고 제 3자가 개입하길 원했구나.
일단 남자를 집 안으로 들여서 해명이나 해보자 싶었지.
내가 일하고 있던 거실 쪽으로 오시라고 손짓을 하고 소파에 마주 앉았어.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보드카병을 발견하고는 시선이 딱 멈추더라고.
알겠다는 듯한 옅은 미소를 짓더군.
"미치씨, 가족 분들이 걱정이 참 많으셨어요."
"그래요?"
"미치씨는 본인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철두철미하지 않으세요. 아내분께서 벌써 다 알고 계시더라고요.
자녀분들도 뭔가 잘못된 건 알고 있고요. 눈에 뻔히 보이잖아요... 미치씨 경우에는.. 코에 뻔하달까.."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필요하니까 마시는 거고요. 멀쩡히 일하면서 가족들 먹여살리는데 왜요."
"헌데 자녀분들이 많이 두려워해요, 미치씨. 아내분도 한계에 달하셨고요. 곧 가족 분들이 오실 거예요."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고 로렌이 들어왔어.
심장이 미친듯이 뛰는데 에릭과 넬리도 뒤따라 오더라고.
시계를 보니까 5시야.
어떻게 된거지?
로렌과 애들이 화이트씨 옆으로 가 앉았어.
"도저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로렌이 한참이나 뜸들이다가 입을 열더라고.
"미치. 당신 술마시던 거 알고 있었어. 나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래. 애들도 마찬가지고."
진짜 눈물만 나더라.
"더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로렌이 내 옆으로 와 앉고서는.
"괜찮아 미치. 내가 도와주려고 한다니까. 애들도 그래."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는거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로렌을 보니까 나도 눈물이 났어.
근데 가만히 아내의 눈을 들여다보니 무언가 검은 빛이 일렁이고 있더라고.
고개를 돌려 화이트씨와 아이들이 있는 곳을 봤는데 에릭과 넬리가 아니었어.
머리 위로 뿔이 길게 돋아나 있었고 목은 한껏 구부러진 채 망측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더라고.
다시 로렌을 쳐다보니 가느다란 미소 사이로 날카로운 이가 드러나 있었어.
"우리는 당신을 도우려고 하는거야."
커다란 미소를 짓는 로렌을 보니 온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나면서 심장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어.
문 쪽으로 줄행랑을 쳤지.
아내랑 아이들이 아니라 다른 존재였다고.
목구멍으로 구역질이 올라와 부엌 싱크대로 갔어.
근데 토하고 보니 온통 붉은 피가... 그리고 그 안에는 수백마리의 거미가 헤엄을 치고 있었어.
어느새 화이트씨가 침착한 모습으로 내 옆에 와 서있더군.
"저 괴물들은 당신의 가족이 아니에요, 미치씨. 당신이 소환한 악령인가봐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이거로요."
화이트는 커다란 칼을 꺼내 들고는 가만히 쳐다봤어.
적어도 3초는 흘렀을거야. 곧바로 로렌이 부엌으로 뛰어들어왔거든.
"여보, 괜찮아?"
아내가 묻는데.. 아내가 아니야..
겉으로는 똑같아 보여도 목소리가 달랐거든.
그리고 눈이.. 맙소사 눈이 없었어.
에릭과 넬리는 그 뒤에 서 있었는데 목을 길게 빼내고 웃고 있더라고.
"우리가 도와준다잖아!"
로렌이 비명을 지르고는 셋이 한꺼번에 나를 덮치려고 했어.
그래서 앞도 안보고 칼을 집어들어 마구 휘둘렀지.
비명소리가 가득해도 나는 계속 칼로 찔러댔어.
화이트는 어느새 사라졌더라고.
그리고 나도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
눈을 떠보니 병원이야.
일어서려고 하니까 수갑이 채워져 있었어.
다 끝났다는 안도감에 도로 침대에 누웠지.
"미치 타일러는 3번 침대에 있습니다."
저만치서 의사가 경찰과 함께 얘기하는 모습이 보여.
"아직 정신이 들지 않았나요?"
"네. 검사 결과 마약이나 알콜 성분이 검출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일단 안정제는 놔뒀어요."
"그렇군요. 정말 안된 일이예요. 아내와 아이들이 바로 옆에서 자상을 입고 죽은 채로 발견 됐거든요.
원인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만, 저 사람이 알콜중독인 건 알고 있었거든요.
근데 저희가 발견한 술병엔 물 뿐이더라고요."